어느 여름, 셋째댁은 그녀의 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토끼 한 쌍을 사는 것으로 루쉰의 소설 <토끼와 고양이>는 시작한다. 그 천진난만한 토끼를 보며 아이들은 무척 좋아한다. 호기심 많은 강아지 에스도 그 토끼를 보고 달려들다 재채기를 하고 물러선다. 아이들은 자주 토끼를 껴안고 놀았고, 에스도 토끼를 괴롭히려 하지 않았다. 얼마 후 그 토끼들이 땅을 파자, 모두들 토끼새끼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새로 태어난 토끼 두 마리는 어느 새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 후 어미토끼도 나타나지 않았다. 셋째 댁은 토끼 굴의 다른 통로에 고양이의 발톱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 새끼 토끼가 사라진 이유가 고양이의 소행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그녀는 호미로 토끼 굴을 파기 시작한다. 그러자 원래 토끼 굴이 있었던 자리와 좀 떨어진 곳에서 어미토끼와 새끼토끼 일곱 마리가 자고 있었다. 필시 두 마리의 어린생명들이 희생당한 후, 어미토끼는 고양이를 피해 다른 굴로 옮겨가서 새끼를 낳았을 것이다. 셋째 댁은 이제 더 이상 그 어린 토끼들이 고양이에 희생되지 못하도록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다. 하지만 남들은 셋째댁을 보며 그토록 번거롭게 토끼를 기르는 법은 본 적이 없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런데 이를 지켜본 소설 속 주인공은 갑자기 그 죽은 두 마리의 어린 생명들을 생각하면서 서글픈 마음이 든다. 그는 그 작은 존재의 허약함과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사라진 것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갖는다. 그 토끼들은 존재의 빛을 한번도 발하지도 못한 채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는 옛날의 일을 생각한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회관 앞의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서 보게 된 가득히 흩어진 비둘기의 털, 그 비둘기는 누군가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마차에 치어서 죽어가는 강아지. 그러나 얼마 후 그 죽음의 흔적조차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그곳에서 한 생명이 끊어졌으리라는 것을 누가 알 것인가! 그는 그것을 보고 망연함과 허망함을 느꼈다.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그토록 쉽게 나고 사라져 버리는 허망한 모습에 슬퍼한다. 이에 조물주를 원망해보기도 한다. 조물주는 멋대로 생명을 만들기도 하며, 멋대로 짓밟아버리기도 한다면서.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든 조물주에게 돌을 던져보지만, 자연의 실상은 원래 그러하기에 의미 없는 돌이라는 것을 안다. 셋째댁이 그토록 새끼 토끼를 정성스레 돌보는 것, 주인공이 소리 없이 사라져간 생명들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과 같은 인간의 선의는 자연 속에서 무참히 짓밟힌다. 하지만 그는 그 무참히 짓밟힌 작은 생명을 기억하고, 그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또한 그는 작은 존재들을 무심히 밟아버리는 강한 자들을 증오하며, 약한 존재들을 대신해 강한 자에게 복수해주고 싶어한다. 그는 자꾸 책상 속에 숨겨둔 청산가리 병을 떠올린다. 주인공이 얼마만큼 고양이를 증오했는지 잘 나타난다. 청산가리는 정말 강력한 독극물이다. 얼마나 고양이가 싫었으면, 청산가리를 떠올리겠는가! 그는 언제까지나 고양이가 담장 위를 당당하게 활보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확신한다. 이 확신에는 증오에 가득 찬 살기와 비장함이 서려있다. 고양이를 설사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언제나 그 놈이 저리도 당당하게 살고 있는 꼴을 못보겠다는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증오인 것이다. 그도 다 안다. 그래봐야 약한 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는 강자는 여전히 많다고. 하지만 이건 그의 다짐 아닐까? 끝까지 한번 해보자는. 이 세상의 강한 것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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