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사랑하여 하나가 된다. 함께라는 것은 '너'와 '나', 두 개의 단어가 아닌 '우리'라는 하나의 단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혼이라든가 하는 제도 하에서의 얘기만은 아니다. 두 사람이 함께함으로써 생기는 여러가지의 '공유'가 있다. 나는 그 공유가 '우리'라는 단어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말과 육체, 시간과 공간, 사물과 인간 관계가 모두 두 사람 공통의 것이 된다.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는 연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을 공유한다는건 어떤 의미인가? 그로 인해 생기는 고난마저도 공유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많은 연인들이 고난의 공유만큼은 견디지 못하고 다시 혼자가 되곤 한다.
루쉰의 소설 「죽음을 슬퍼하며」에 나오는 두 사람, 주인공과 쯔쥔에게서도 이러한 관계를 볼 수 있다. 그들은 서로 깊이 사랑하여 당시 사회적 풍조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마저도 무시하고 마침내 함께 살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서로의 고난을 함께하게 되고 그에 대한 책임이 생기게 된다. 그 전에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연애에 머무를 때는(주인공이 살던 '회관의 낡은 방'으로 대변되는 시절) 서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그러나 '삶'을 같이 한다는 것은 결코 행복하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고난은 처음에 방을 구할 때부터 시작해서 마침내 주인공이 실직하게 되면서 더욱 더 심하게 치닫는다. 이것은 누구 한 쪽의 탓이라고 할 수도 없고 둘 중 한 명만 영향을 받을 수도 없는 일이다. 서로간에 책임이 있다는 말은 이런 의미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자연스레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쯔쥔과의 관계가 자신을 얽매고 있다고 말이다. '나는 아직 나의 날갯짓을 망각하기 전에 저 새로운 광활한 하늘을 날고자 했다.(p.402)' 주인공은 거듭해서 이러한 서술을 한다. 이것은 처음에는 해고를 당하고 난 뒤 사무실의 답답한 생활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자신의 재능을 펼쳐보겠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나중에 가면 자신을 얽매는 현실의 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뜻으로 읽힌다. 결국 주인공은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된다. 내가 잘 살기 위해서는 쯔쥔과 결별해야 한다고. 그러나 주인공은 결코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쯔쥔에게 이야기 할 때는 '함께 멸망하는 것을 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새로운 생활을 재건해야 한다(p.411)'고 말한다. 길게 보았을 때 주인공에게는 결별이 더 나은 삶을 가져올 지도 모른다. 그러나 쯔쥔은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운명은 이미 내가 준 진실로 결정되었다. ― 사랑 없는 인간은 사멸하고 만다.(p.417)' 그런 점에서 이러한 서술은 화가 날 정도로 뻔뻔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모든 갈등에서 주인공은 결별을 위한 더욱 확실한 사유를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스스로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기까지 이른다. 그리고 쯔쥔에게 그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한다. 사실 이만큼 확실한 사유는 있을 수가 없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람을 무슨 방법으로 잡아두겠는가? 쯔쥔은 얼마 뒤 집을 떠나고 만다. 이것은 물론 '함께 멸망하지 않으려고' 헤어진다는 주인공의 말보다는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때문에 내린 결정일 것이다. 쯔쥔이 떠나자 주인공은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진실을 말해버렸다면서 후회한다. '내가 허위의 무거운 짐을 짊어질 용기가 없었던 탓으로 도리어 그녀에게 진실의 무거운 짐을 지웠다.(p.416)' 하지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위인가?
주인공의 말에 따르면 '결별하는 것이 서로가 잘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이 두 가지가 그가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진실이다. 결별이 서로에게 좋다는 것은 사실 어디까지나 주인공의 생각, 즉 주인공의 진실이다. 쯔쥔의 진실은 또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두고 자신이 쯔쥔에게 너무 성급하게 진실을 일깨워 주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자신의 학식에 대한 자만심과 쯔쥔에 대한 무시가 섞여있는 태도이다. '쯔쥔의 공로는 완전히 이 식사에 세워지고 있는 듯했다(p.403)'라는 말에서는 그녀를 무시하는 태도가 극에 달한다. 쯔쥔은 그저 밥 밖에 할 줄 모르고, 밥을 먹으라고 닦달함으로써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존재인 것이다. 주인공이 애초에 쯔쥔을 자신과 동등하게 보지 않는 상태에서 그녀에게 사랑과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치가 맞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가 쯔쥔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어떤가?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진실이니 허위이니를 가리기가 어렵다. 주인공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이 진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연인이든 한 번 쯤은 자신이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잠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인 경우도 있고, 아니면 주인공처럼 거의 확신으로 자리잡는 경우도 있다. 둘 중 어느 쪽도 진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허위'라고 말할 수가 있는가? 어떤 생각이 들었을 때 그것을 그대로 좇아 행동해야만 진실이고, 그 생각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허위라는 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노력 또한 간절하고 커다란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에게 정말 허위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진실을 행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합리화이며 자기 위안이 되기도 한다.
나는 주인공의 결정 자체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함께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그것이 전부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선택과 그에 따르는 결과는 그 사람의 몫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자신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가를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는 스스로가 비겁자라고 인정하는 체 하지만, 사실은 아직도 비겁자가 되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가 비겁자가 되는 순간은 쯔쥔을 떠나던 때가 아니었다. 그에 대한 궤변을 늘어놓는 순간에 비겁자가 된 것이다. 그가 쯔쥔을 정말로 생각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솔직했어야 했다. 쯔쥔을 어설프게 위하는 식으로 얘기를 하는 것은 죽은 그녀에게 더욱 상처만 주는 일이다. 주인공은 바로 이 글을 씀으로써, 한 때 함께였던 사람에 대한 마지막 예우마저도 무너뜨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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