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루쉰2010. 8. 28. 01:56

클립과 자석

자석 가까이에 있는 클립은 자석 쪽으로 끌려간다. 클립은 자석 덕분에 나아갈 수 있다. 아니, 클립은 끌려가는 것에 불과하다. 자석이 있는 곳으로 갈 수 밖에 없으니까. 아, 그래도 클립은 자석 덕에 나아갈 수 있다. 끌려가는 걸 포기한 다면 나아갈 수조차 없다.

꿈을 꾼다는 것.

그는 행복한 가정을 떠올려야만 했다. 그가 쓰고 있는 작품의 제목이 ‘행복한 가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작품 속에 평소에 바라던 것을 쭈욱 적어나간다. ‘이것만 있으면 행복한 가정이 될 거 같은데’ 하고 꿈꿔왔던 것들이다. 그런데 그가 고른 것들은 당시에 각광받기 시작한 세련된 것들이다. 자유결혼, 부부사이의 평등을 약조하는 조약, 서양 유학, 문학에 대한 깊은 조예 등등, 젊은 감각을 갖은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꿈꿔봤을 것들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것 하나는 있지 않은가? 유행하는 것들 말이다. 유행하는 것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경향이라는 것만을 의미한다. 누구나 다 그 취향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그가 살던 시대에 보수적인 누군가는 자유결혼이나 남녀평등에 치를 떨었을지 모른다. 또 그 취향이라는 게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거일 수도 있다. 서양 유학을 다녀왔고 문학에 대한 깊은 조예가 있더라도 가정이 행복할 거라는 보장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리고 그렇지 않다고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또 어떻게 하겠는가. 그것은 단지 그 시대에 유행했던 취향일 뿐이다. 왜 유행했는지, 그게 바람직했는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은 때로는 정말 그 유행에 진지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꿈을 꾸는데 익숙하다.


그 꿈이 구체적이고 확고한 것은 아니지만, 하루, 하루의 일상에서부터 인생 전체에 이르기 까지, 가정을 꾸리는 것, 공부를 해나가는 것 모두에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가지고 산다. 그런데 그의 ‘행복한 가정’이 말해주듯 우리가 꿈을 꾼다는 것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를 갈망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원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이고, 불변의 것, 이상적인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두려움과 불안함, 막연함이 우리를 꿈꾸게 이끌기도 한다. 남들이 다 한다는 걸 보증삼아 위안을 얻으려고 하는 경우가 그렇다. 뭔가 목표가 있다는 것에, 그것도 남들도 다 갖는 목표라는 것에 큰 위안을 삼고 살아가게 된다. 욕망에 의해 뭔가를 꿈꾸기도 한다. 마음속에서 원하는 것을 꿈꾸는 경우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의사’가 되고 싶어 하는 거, ‘공무원’이 되고 싶어 하는 거, ‘아이돌 가수’가 되고 싶어 하는 거 같은 예를 생각해보자. 한국이 아닌 다른 곳, 예를 들어 아프리카 초원에서 이었다면 ‘공무원’이 되기를 바랐을까? 혹은 조선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가수’가 되기를 바랐을까? 이런 것들을 꿈꾸는 것이 한국사회와 무관하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입된 것을 꿈꾸는 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뭔가를 꿈꾼다는 것은 그리 아름다운 얘기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불안감과 막연함, 그리고 주입된 환상이 있었다.

그 결코 ‘능동적’이지 못 한 것이 그래도 인간조건인 이유는 우리에게 그것만큼 추진력을 제공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수동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꿈꾸는 내용에 있어서만큼은 진지하다. 불안감에 의해서면 불안한 만큼, 욕망에 의해서면 욕망하는 만큼 우리는 꿈을 진지하게 여긴다. ‘능동적’이었냐 ‘수동적’이었냐 와는 별개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꿈은 우리의 삶의 추진력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추진력은 불안감 혹은 외부에서 주입된 환상에 의해 생긴 것이다. 아, 그렇다면 우리는 꿈을 꾸며 이 ‘수동적’인 삶을 계속 나아가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꿈을 버리고 추진력마저 잃어야 하는 것일까? 클립은 자석에 끌려서라도 앞으로 나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자석에 끌리기를 포기하며 나아가기조차 포기해야 하는 걸까?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