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루쉰2010. 9. 28. 18:49
 


루쉰은 북경여자고등사범학교 문예회에서의 강연에서 노르웨이 문학가인 입센의 작품, 인형의 집에 나오는 주인공 노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노라는 가출하여 어떻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강연 첫머리에 던진다. 노라는 일명 Ein Puppenheim이라고 하는데, 이는 남이 이렇게 하라고 하면 그대로 움직이는 사람을 가리키는 넓은 의미의 꼭두각시 인형을 의미한다. 노라는 행복한 가정 속에서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지만, 자기가 남편의 꼭두각시라는 것을 깨달고 가출하게 된다. 여기서 루쉰은 가출한 노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노라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했지만, 루쉰은 그렇지 않다고 보았다.

 노라의 가출은 한 여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 혹은 더 넓게는 그 당시의 중국의 상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노라가 자신이 남편의 꼭두각시였다는 것을 깨달고, 가출을 했다는 점에서 노라의 가출을 개인적인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중국은 청조에서 새로운 근대국가로 넘어가려는 과도기였는데, 수많은 개인뿐만 아니라, 중국 전체가 예전의 안락한 상태에서 새롭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내몰렸고, 이런 새로운 상태에서 살아가야 했다. 노라가 가출하여 살아가야 하듯이 말이다. 여기서 노라가 머물렀던 행복한 가정은 중국인들이 흠뻑 빠져있었던 청왕조들과 겹쳐진다. 루쉰이 보기에 노라의 가출은 현실이었으며, 또 그래야만 했다. 그리고 중국인들의 변화 또한 필수적이었다.

 

다시 말하면, 집을 나온 노라는 길을 잃은 거나 다름없다. 마치 부자유스러운 조롱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모조리 잃어버린 새가, 조롱 밖으로 나와 자유의 무거운 짐과 온갖 위험에 어찌 살아갈지를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에게 남겨진 길은 다시 돌아가거나, 타락하는 길밖에 없었다. 이것은 노라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중국인 전체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서양문물의 도입과 혁명의 기운은 그들을 마치 가출한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서 비유적으로 사용한 ‘가출’은 행복하고 편안한 생활에서 무언가 생활의 토대를 다시 만들어야 하는 고되고 힘든 상황으로의 전락을 의미할 것이고, 루쉰은 노라의 ‘가출’을 통해 이런 상황의 뒤바뀜이 현실이라 말한다. 또한 시대적 조류에 따라 국가의 개혁을 위한 ‘가출’이 당위적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가출한 노라와 같이 살아갈 길을 잃은 상황에서, 또는 근대국가로 가는 과도기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중국의 상황에서 노라 혹은 중국인들은 무얼 어찌해야할까? 특히 노라가 가진 전 재산은 각성한 마음뿐이며, 그녀는 어려운 생활고에 처해있다. 루쉰은 이러한 상황에서 이상적인 장래의 황금세계를 몽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상적인 장래의 꿈을 꾸기 보다는 현실의 꿈을 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현실을 살아가는데 실질적인 힘으로 다가올 것이다. 특히 노라에게는 그것이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루쉰이 말하길, 노라에겐 돈, 즉 경제가 필요하다. 그녀가 분명 남편의 꼭두각시가 되는 게 싫었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집을 나왔지만, 그녀는 꼭 돈을 벌어, 자신의 생활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경제 혹은 돈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삶에 대한 절박하고 필수적 조건이다. 돈이 없다는 것은 곧, 굶주림과 죽음을 의미했다. 현재 우리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굶어 죽는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집 나온 노라에게 돈이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라가 자유를 찾아 집을 나왔지만, 집을 나와 죽게 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땐 그녀의 꿈이고 이상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 그 꿈이며 이상은 루쉰이 [노라는 가출하여 어떻게 되었는가]에 말하는 장래의 꿈이다. 그는 이 연설문에서 장래의 꿈이 아니라 현실의 꿈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길이 보이지 않는 경우에는 꿈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제한된 의미에서 그렇다. 나중에 거짓임이 밝혀질 수도 있는 장래의 꿈은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이상과 목표는 가출한 노라에게 어느 정도의 정신적 보탬이 된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살아갈 수 없다. 우선 현실의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현실의 꿈이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생활력과 마음 깊숙이 되뇌이는 이상에 대한 아득한 소망과 기억을 의미한다.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질지 아닐지는 잘 모른다. 그녀가 가진 소망이 큰 것이던 작은 것이던, 그것을 이루려면 우선 자신의 주위에서 이룰 수 있는 소박한 것들을 이루어야 한다. 생계와 일상의 안정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이상의 어떤 것도 해낼 수 없다. 가출한 노라에게는 그것도 꽤나 버거운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노라가 돈을 벌고 경제적 자립을 한다고 해서 그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의 소망이 단지 남편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은 사는 것이라면, 경제적 자립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남녀 평등, 여권의 신장 같은 사회적인 개혁을 원한다면 그녀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루쉰은 확답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천천히 끈기있게 투쟁하라고. 돈을 벌고, 자신의 삶을 책임지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루쉰의 말이 사회 전반의 작고 개인적 변화들이 쌓이고 쌓여서, 중국 전체가 변할 수 있다는 그런 말인가? 그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에게 장래의 꿈, 중국 전체의 변화는 거짓말이다. 그만큼 확실치 않은 장래에 대한 기약을 한다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 꿈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잘 모른다. 그러기에 그 꿈에 회의적이지만, 그조차 꿈꾸지 않을 수는 없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므로. 그것은 단지 현실을 살아가는데 보탬이 될 뿐이다. 그리고 계속 종착역이 어디가 될지를 모르는 길을 차근차근 걸어가야 한다. 종착역이 확실하지 않다면 길은 없다. 하지만 길을 만들면서.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