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루쉰2011. 1. 31. 23:38
 

2NE곰 루쉰 파이널 에세이   

루쉰의 오래된 환등기와‘그들’의 서늘한 눈빛




  이 글은 다분히 시각적이다. 아니, 시각적이기를 바란다. 내가 준비한 것은 몇 장의 슬라이드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루쉰의 단편소설「조리돌리기」의 수많은 슬라이드 중 내 ‘취향’대로 몇 장을 고른 것뿐이다. 말이 취향이지, 사실 이 장면들은 내 머리 속에서 잊혀지지 않았던 ‘서늘한 눈빛’들에 대한 이미지이다. 오래된 환등기를 돌려 한 슬라이드씩 비춰본다. 


S#1 군중의 시선, 본능적이기에 더 잔혹한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하게 외출을 했을 뿐인데,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얼굴에 뭐가 묻었나,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당황을 넘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두려움, 공포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저 사람이 무슨 죄를 졌습니까……?”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서 보니, 노동자 같아 보이는 초라한 사내가 대머리 노인에게 낮은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대머리는 대답을 하지 않고 다만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바람에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가 잠시 후에 다시 보았다. 대머리는 그때까지도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 사나이는 마치 자기가 죄라도 지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더니 종당엔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면서 빠져나가고 말았다. 그 자리는 양산을 옆구리에 낀 키다리가 들어와서 메웠다. 대머리도 얼굴을 돌리고 다시 흰 조끼를 보기 시작했다 (루쉰 소설 전집,「조리돌리기」p.334)


  루쉰의 단편 소설 「조리돌리기」의 한 장면. 타인의 시선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컷이다. ‘그’가 한 일은 군중에게 에워싸여진 죄인이 무슨 죄를 지었냐고 물어본 것뿐이다. 그 물음 하나에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쳐다본다. ‘그’는 “마치 자기가 죄라도 지은 것처럼” 자리를 빠져나간다. 아마 ‘그 사나이’는 사람들이 왜 자기 자신을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지 제대로 된 이유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꼭 눈에서 레이저빔을 쏜다고 해서 제대로 된 ‘눈빛 공격’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군중의 무표정한 시선만으로도 누군가는 죄인이 되고, 그것은 그 자체로 공격이다. 공격의 대상이 되는 순간 그 사람은 군중과는 다른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런데 사실 무엇에 시선을 준다는 것, 특히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는 상황에서 무엇을 본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 ‘본능적’이다. 

 “뚱뚱한 아이도 그 때까지 소학생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자기도 모르게 그 아이의 시선을 따라서 뒤를 돌아본다(334p)” 

“자기도 모르게” 타인의 시선을 따라간다. 시선은 그런 점에서 묘한 힘을 지닌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하고 있는 곳에는 왠지 모르게 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가? 이처럼 군중의 시선은 무의식적, 본능적이기에 더 잔혹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군중이 한 대상을 본다는 것, 쉽게 말해 ‘구경한다’는 행위는 ‘구경거리’가 생겼을 때, 시작된다. 조리돌리기도 이러한 전형적인 경우이다. 집행인이 죄인을 끌고 나오면 사람들은 그를 반원형으로 에워싸고는 손가락질하기도 하고, 욕을 하기도 한다. 죄인은 군중들의 시선에 다시 한 번 낙인찍힌다. 이것이 조리돌리기가 하나의 형벌로써 작용할 수 있는 이유이다. ‘조리돌리기’와 관련된 테마는 루쉰이 소설집 『납함』의 자서에 실려 있는 ‘환등기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참수당하는 동포를 둘러싸고 무감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중국인들. 이때의 군중들은 구경거리가 대령되었을 때 수동적으로 시선을 두는 자들이다. 아마도 이것은 슬라이드 사진이라는 매체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루쉰은 단편 소설 속에서 좀더 ‘움직이는’ 군중상을 그려낸다.    

“사람들은 모두가 거의 실망하면서도 행여나 하는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 찾아보고 있었다.(337p)”

  소설「조리돌리기」속 군중들은 흡사 먹이를 찾는 포식자와도 같이 ‘구경거리’를 찾아 나선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사건’, 즉 원을 만들어 구경할 만한 구경거리이다. 그들은 구경거리가 될까 싶어 넘어진 인력거꾼에게로 다가갔다가 아무 일도 없자 실망하며 흩어진다. 이들은 물론 다른 ‘조리돌리기’들의 경우처럼 시선의 감옥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같은 눈빛을 지녔다. 그러나 구경거리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는 그들의 눈빛은 군중의 ‘본능’을 더욱 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S#2「조리돌리기」, ‘시선’돌리기?!


  정적이 흐르는 뜨거운 여름날의 거리. 무료한 거리에 ‘조리돌리기’가 등장한다. 이에 순식간에 반원형의 군중이 구경거리에 모여든다. 그런데 이 단편에서 묘사하는 조리돌리기는 단순히 루쉰이 일본에서 정지된 한 장면으로 보았던 ‘조리돌리기 슬라이드’와는 다르다. 이 한 장면을 가지고 단편영화를 만들었달까. 그만큼 「조리돌리기」는 읽는 내내 활동사진을 본다고 착각할 만큼 ‘시각적’이다. 루쉰은 이 소설에서 어떤 짜임새 있는 서사를 풀어내는 대신 그저 ‘시선’ 자체를 보여주기로 작정한 듯하다. 휙휙 지나가는 장면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샌가 소설은 끝나있다. 그러나 또한 책장을 덮으면 망막에 남은 군중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생한 시선이 등골을 서늘하게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조리돌리기는 슬라이드 사진처럼 충분히 정적이면서도 동시에 동적이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 시선의 문제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조리돌리기 장면자체는 정적인 사건인데, 카메라는 계속해서 움직인다. 즉, 감독 루쉰은 한 곳에 카메라를 고정시켜놓고 조리돌리기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바쁘게 카메라를 이동시킨다. 흔히 조리돌리기라고 하면 반원형을 이루는 군중이 원 가운데에 있는 죄인을 보는, 구심적인 시선의 방향을 떠올리기 쉽다. 혹은 반대로 원 중심의 죄인이 주위의 군중들을 돌아보는 원심적인 시선 정도.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하나의 시선이 더 추가된다. 그것은 바로 군중끼리 서로를 훑어보는 시선.「조리돌리기」에서 시선은 단순히 원 밖에서 원안의 중심, 한 대상으로만 던져지는 것이 아니다. 그 시선의 궤적은 배구공의 움직임처럼 여기에서 저기로 ‘토스’ 되어 진다. 소설 속 문장을 인용하자면 “담에 부딪쳤다가 퉁겨나오는 공처럼” 말이다.

  루쉰이 묘사하는 시선은 말 그대로 사람들이 보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만두팔이 소년이 흰조끼를 입은 죄인을 보자 죄인이 소년을 보고, 죄인이 대머리노인을 보고 이를 따라 소년은 대머리 노인을 쳐다본다. 뚱뚱한 아이는 조리돌리기에 끼어든 소학생을 주시하고, 소학생의 시선을 따라 또 다른 구경꾼을 본다. 죄인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시선은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카메라는 한 사람 한사람 구경꾼들의 눈이 된다. 사실 때로는 카메라가 보여주는 이러한 시선은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구경꾼 한 사람이 허리를 펴는 것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은 그 별 것 아닌 것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순경이 돌연 한쪽 발을 올리자”, 혹은 “귓가에서 쩝쩝하는 소리”와 같은 사소한 사건에 사람들의 시선은 빠르고, 신속하게 움직인다.


 

S#3 ‘심심풀이 땅콩’과 시선의 역전


  시선이 이동한다. 그것도 계속해서. 그렇다면 무엇에 군중의 시선은 반응하는가? 앞서 말했듯 참으로 시시콜콜한 소리, 행동에 구경꾼들의 시선은 이동한다. 그들은 물론 조리돌리기의 관중이지만, 그들에게 조리돌리기란 단지 메인요리와 같다고나 할까. 사람에게는 세끼 밥뿐만 아니라 심심풀이 땅콩도 필요한 법이다. 루쉰은 이러한 ‘심심풀이 땅콩’들을 계속해서 군중들 사이로 떨어뜨린다. 그러면 군중들의 시선은 그 땅콩들로 향하고, 다시 별 것 아니로군, 하고 반원형 안의 죄인에게로 눈을 돌린다. 문자 그대로 이러한 ‘동적인 사건’들은 반원형의 대형 자체에서도 나타난다. 더 앞으로 끼어들려 하는 사람, 늦게서야 구경거리를 발견하고 허겁지겁 달려드는 사람, 한 대 얻어맞고 뒤로 도망가려는 아이, 그리고 마지막에는 뿔뿔이 흩어지는 구경꾼 무리들까지. 죄인을 발견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반원형의 띠는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살아있는 것 같다.

  만약 이 소설 속 조리돌리기를 새가 높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이 ‘조감’해보면 어떨까? 즉, 군중 한 명씩의 시선을 따라다니는 것이 1번 카메라라면, 높은 곳에서 조리돌리기 전체를 조명하는 것은 2번 카메라 정도 될 것이다. 사람들의 움직임을 조감해보면 통통 토스되는 시선들만큼이나 흥미롭다. 우선, 크고 잔잔한 호수를 떠올려 보자. 연못 위로 모든 물고기들이 좋아할만한 먹이가 던져진다. 인기만점 영양만점 물고기 밥, 쉽게 말해 떡밥 열 봉지 정도? 처음에 떡밥이 던져지면 많은 물고기 떼들이 떡밥 주위를 동심원으로 둘러싸고 먹이를 먹는 것에 열중할 것이다. 그런데 물고기 떼의 동심원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새우깡이나 콘칩 한 두 개를 던져준다고 하자. 한 두 개 정도야 뭐, 떡밥 열 봉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으니 몇몇 물고기만이 또 다른 작은 동심원을 만들고 과자를 먹어치우면 금방 다시 떡밥에게 달려들 것이다. 물론 구경하는 것과 먹는 것은 엄연히 다른 행위지만 ‘시각적’으로는 동일한 효과를 불러 온다. 앞서 비유했던 메인요리와 심심풀이 땅콩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왜 루쉰은 ‘심심풀이 땅콩들’을 군중들 사이로 던져 넣는가.      


“좋았어!”

어디선가 갑자기 몇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무언가 일이 일어났음을 알고 사람들의 머리가 모두 그쪽을 향해 돌아갔다. 순경과 순경에게 붙들린 범인도 조금 동요했다.(337p.)


  웃기지 않은가. “무언가 일”이 일어나자 모든 사람들이 그쪽을 보고, 조리돌리기의 중심에 있던 죄인조차 “동요”한다. 루쉰은 조리돌리기의 군중집단의 시선, 움직임을 동적으로 표현하면서 시선이라는 것이 쉽게 전이될 수 있는 것임을 시사한다. 심심풀이 땅콩, 새우깡, 콘칩 한 조각으로도 시선은 움직인다. “저 사람이 무슨 죄를 졌습니까……?”라는 한마디에 구경꾼의 위치에 있던 사람도 ‘죄인’이 되어버린다. 루쉰의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환등기 슬라이드에서 구경꾼과 죄인은 원과 원의 중심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설 「조리돌리기」속에서는 조리돌리기는 하나의 고정된 상황이 아니다. 조리돌리기의 중심은 여기에서 저기로 쉽게 전이되고, 이와 동시에 한사람은 구경꾼도 구경당하는 사람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시시덕거리며 누군가를 구경하고 있는 사이에, 우리 스스로가 다른 이들의 시선에 둘러싸여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선의 역전’, 정확히 말하면 시선이 역전될 수 있는 ‘가능성’이야 말로 이 소설이 가져다주는 ‘서늘함’의 정체가 아닐까.



    에세이 쓰면서 참고한 [블루씨 위젯] 입니다. 마우스로 클릭하면 물고기가 모여요.
    여기에서는 "심심풀이 땅콩"이 마우스 클릭질이겠네요. 콩콩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