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생명연습2013. 4. 27. 21:34


근황, 다들 잘 지내나요.


 

너무 오랜만이죠.

한 번 마감을 놓치니 계속 눈팅만 하고 막상 글 올리는 걸 차일피일 미루게 되더라구요. 죄송합니다. 그 사이에 올리신 글들 열심히, 재미있게 읽었어요.

저는 이제 학교 시험이 끝나고 혼자 푹 쉬고 있습니다. 중간고사를 치루고 났더니 4월이 벌써 끝을 보이고 있네요. 나의 사월은 어디로 어느새 벌써 흘러가버렸나. 곧 오월인데 말이죠.

 

원래 시험기간이 되면 온갖 잡생각이 몰려들게 되는데, 이번 시험기간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학교를 떠날 날이 가까워 오는 요즘은 어떻게 살아야하나, 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구체적인 것에서부터 좀 추상적인 것까지요. ‘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죠. 그래서 괜히 이것저것 책이나 강연을 기웃거리고 있네요.

 

요즘은 팟캐스트로 <벙커1 특강>, 그 중 강신주 선생님의 강의를 반복 재생해서 듣고 있어요. 직접 가서 듣고 싶은데, 금요일 수업이 늦게 끝나서 말이죠. 언제쯤 갈 수 있을까요. 한 번 가보고 싶어요. 이럴 땐 참 서울에 살고 싶네요.

 

원래는 이 <벙커1 특강>에서부터 시작해서 제가 자주 듣는 팟캐스트 방송들을 차례로 소개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시험 공부하던 중 아이폰 사진들을 쭉 훑어보다가 제가 오래전에 캡쳐해두었던 글들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그런 고로, 팟캐스트 방송에 관한 내용은 다음으로 미루게 되었네요. 제가 오늘 소개하려고 하는 것은 <소설가의 일>이라는 연재 글입니다.


 

<소설가의 일>, 스토리(story)와 그 후

 

지금은 연재가 끝났지만 네이버 문학동네 까페에서 <소설가의 일>이라는 코너가 있었어요. 2012229일부터 시작해서 2013129, 매주 화요일마다 김연수 작가님이 연재하셨었죠. 그 당시 매일 웹툰을 기다리듯 화요일마다 이 연재를 기다렸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어떤 자기계발서나 동기유발 강연에서 듣는 이야기보다 <소설가의 일>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요즘 소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넘쳐나고 있는데, 제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그런데 <소설가의 일>은 제게 좀 특별합니다. 막상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사는 건 이런 것이다, 이런 주제들을 전면에 세운 것도 아니고 제목 그대로 소설 쓰는 것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요.

때때로는 가볍게 읽은 에피소드들도 있고, 몇몇은 마음에 깊게 남아서 캡쳐해서 폰으로 자주 들여다본 구절들도 있어요. 제가 <소설가의 일>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된 것은 이런 것이에요.

 

과연 하나의 스토리(story)로서 나의 삶은 어떠한?

 

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소설가의 일> 내용을 우선 볼까요.

 



-「이 삶이 너의 이야기라면, 넌 최대한의 너를 원해야만 해(2012. 04.10)」중에서-


영화나 소설에서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은 사건, 어떠한 액션들이 발생한다는 의미하죠. 만약 아무런 사건도 없다면 그 영화, 소설은 그저 정지되어있는 장면, 책장에 불과하겠지요. 사건이 쌓여 시간을 밀고 간다, 그러한 것이죠.

제가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하루하루 사는 것도 그와 비슷하게 그럭저럭 인데요. 누구와 싸우는 것도 싫어하고, 기본적으로 부드럽게 마찰 없이 넘어가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요즘 팟캐스트로 하도 상담코너를 많이 들었더니 갑자기 상담 사연모드가 되네요) 변화를 싫어하고 그다지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게 사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가끔 이런 게 스스로가 지겨울 때가 있잖아요. 별로 살아있는 것 같지 않고 지루할 때. 이야기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일상은 거의 정지에 가까운 삶일지도 몰라요. 책장이 아주 느릿느릿 넘어가는 거죠. 무언가를 겪지 않으면, 계속 같은 제 자신으로 살아가니까요.

 

작년 가을인가요, 겨울이었던가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버스 안에서 턱을 달달 떨면서 머리를 쥐어뜯던 기억이 납니다. 내가 이거 잘못하는 게 아닐까, 불안감이 엄습할 때마다 이 구절을 혼자 되새겼습니다. 뭐 어때, 결론은 해피 엔딩 아니면, 새드 엔딩인데. 시도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이야기의 차원에서는 등장인물이 원하는 걸 얻든 얻지 않든 신경쓰지 않는다.” 이 구절이 제 마음에 박혀있던 시절이었으니까요물론 그 당시 제가 몰랐던 것은, 현실은 소설보다 어처구니없고, 드라마보다 구질구질하게 엔딩을 맺더라는 것이었죠. 참 만만하지 않고 먹먹하더라구요. 망할 놈의 엔딩들은 말이죠. 할리우드 가족영화와 달리 해피엔딩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로구나. 나 같은 인간들의 경우 새드 엔딩이 더 많구나. 소설과 현실이 다른 점은, 소설은 엔딩이 나면 책장을 덮으면 끝이지만, 현실은 엔딩 이후에도 계속되잖아요. 엔딩을 떠안고 다시 새로운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딩이 어떤 종류로 끝을 맺던 간에, 새로운 사건에 빠져들 때마다, 오랜만에 저는 제가 살아있다, 라는 자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늘 주위를 관조의 시선으로, 그 표면으로만 미끄러지며 살다가, 세상에 직접 뛰어들게 되니, 많이 당황스럽고, 힘들더라구요.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과 동의어는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엔딩이 끝나고 난 후, 시간이 지난 뒤에 돌아 본 제 자신은, 그 사건을 겪기 전의 나와는 조금은 달라졌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 이름이 붙여진 이야기'의 챕터가 한 장씩 늘어난 셈이니까요. 그 뒤로도 저는 <소설가의 일>의 글들을 떠올리며 시도했던 몇 번의 사건들을 통해 그 중 8할은 새드 엔딩을 겪고, 밤마다 후회와 쪽팔림에 이불을 걷어차곤 했습니다만, 간간히 소소하게 해피 비스무리한 것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때로는(특히 요즘은) 살아있는 게 지쳐서, 그냥 깜깜한 심해 속에 있듯 죽어지내기도 합니다.

 

<소설가의 일>의 많은 글 중 아주 일부를 소개해드려서 아쉽지만, 아마 직접 읽어보시는 것이 더 재미있으실 거예요. 제 얘기를 더 많이 했네요.

 

요즘 피로를 많이 느낍니다. 한 곳에 너무 오래 있었나봐요.

 

 

<소설가의 일> 중 한 부분을 발췌하며 글을 마칩니다. 오월에 다들 얼굴을 볼 수 있겠네요.



롯의 시간은 어떻게 측정하는가그건 행동의 숫자로 측정한다하나의 행동을 하면 시간이 조금 진행된다또하나의 행동을 하면시간이 조금 더 진행한다그래서 플롯의 관점에서 인생을 보자면많은 일들이 일어난 삶과 별다른 일들이 일어나지 않은 삶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많은 일들이 일어난 삶 쪽이 훨씬 더 미래에 가있다내가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느냐는 오직 내가 하는 행동의 숫자에 달려 있는 셈이다. ‘making’이라는 건 바로 이런 뜻이다대장장이가 망치로 내리치면서 조금씩 낫을 만들어가듯이우리는 행위를 통해서 어떤 존재가 되어간다.


-어제보다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더 많은 일들을 하기를(2012.06.05.) 중에서-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에세이/생명연습2013. 3. 3. 00:05


여러분 안녕, 벌써 3월 2일이네요. 2월 안에 업데이트를 했어야 했는데, 미안해요.


이 글도 그저 주저리주저리 잡담을 늘어놓는것이라 생각해주세요.


1.

핸드폰 화면에 백지 블로그를 홈화면에 추가 해둔 덕에 사실 매일 블로그를 확인하고 옛날에 올렸던 글들도 소소히 읽어보고 있는데요.

뭔가 내 생활에 대해서 친구들에게 업데이트해줄게 있을 때 써야지 하고, 미뤄뒀더니 나의 방학은 그저 속절없이 흘러버렸던 것이었던..것이었던..것이죠. 정말 별일 없이 살았어요.

이제 내일만 어찌어찌 시간이 흘러간다면 학교를 가야 합니다. 


요즈음에 저는,

지난 주말에 서울에 갔다온 이후로 쭉 자취방에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상경해서 곰사형 연구실에도 놀러갔었어요ㅎㅎ)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나고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와서, 흠.


제 일상은 

책을 읽다가 책이 영 눈에 안들어오면 미드를 보다가, 미드도 영 질리면(문제는 잘 안질린다는거) 다시 책을 보다가, 그리고 중간중간 밥을 차려먹고, 과일을 깎아먹는, 그런 생활이었어요. 

답답하면 밖에 나가서 장을 보거나 뜀박질을 하구요. 저 이렇게 삽니다 이렇게 살았어요 여러분!!!!!! 


이렇게 뒹굴거리면서 여러 생각이 들더라구요.

학생 신분이 1년밖에 남지 않게되니까, 내가 지금까지 뭘 했는지 돌아보게되더라구요.




  

요즘에는 영 자신이 없어요.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들이나 선후배들, 심지어는 가족들에게 제가 요즘 하는 얘기의 팔할이 

'자신없다'라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어요.  

그래서일까 책읽는 것도 허둥지둥, 공부하는 것도 허둥지둥, 심지어 밥먹는 것도 허둥지둥하곤 했어요.


그래서 3월에는 허둥지둥하지말고 자신을 잡아보려구요, 그래도 자꾸 흔들릴때면 뛰어보려구요

뜀박질을 하면 이상하게 내가 뭐든 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잡생각도 없어지구요.

봄에는 뜀박질! 제 계획입니다. 뛰고나서 숨 좀 가라앉히고 뭐라도 해야겠지요. 




2.

앞으로는 무슨 글을 올려볼까, 했는데 관심있게 읽은 책이나, 혹은 드라마, 강의들을 소소하게 올려볼까합니다.

제 근황이나 소식도 함께요.

제가 요즘 뭘 보는지가 바로 절 말해주지 않겠어요? 

이번에는 그냥 시작의 의미로 간단하게 소개만할게요.


익숙한 반찬만 먹는 제 자취생활(전 질리지 않고 잘 먹긴하지만)을 말해주는...제 미각적, 시각적 굶주림을     

절절히 표현해주는!!!!!  


바로 <고독한 미식가 (孤独のグルメ)>라는 일본드라마입니다.

사람들이 '먹방'을 보는 이유를 알겠더라요. 제가 먹는 것도 아닌데 왜이리 기분이 좋아지는지 모르겠네요.(맛집에 대한 맹목적인 로망을 지니고 있는 저에게 딱맞는 드라마죠.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있습니다.) 


오늘 본 제2화에서는 주인공이 짭잘한 대구조림과 미소장국에 흰쌀밥을 두그릇째 흡입하며 "밥이 맛있다라는 건 행복이다"라고 무심한듯 말하는데요.(다른 편 요리도 참...맛..있어..보여요) 맛있는 음식에 대한 주인공의 반응이 <미스터 초밥왕>이나 <요리왕 비룡>처럼 과함이 없어서 좋습니다. 음식에 대한 절제된 감탄이 보는 저를 울리네요.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일본드라마<심야식당>과 소재상으로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만, 스토리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어요. 드라마 제목 그대로 <심야식당>은 음식에 관련된 스토리가 "심야식당"이라는는 공간적 배경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그만큼 배경 속 '인물'들의 '음식' 이야기에 초점이맞춰진다면,  

<고독한 미식가>에서는 (원작 만화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그냥 맛있는 거 먹으러 갑니다. 왜? 맛있으니까! 배고프니까! 촬영장소가 실제 일본의 맛집이라는 점도 흥미로워요. 리얼리티가 있습니다.  

<심야식당>과는 다른 묘한 매력이 있네요. 특히 주인공을 맡은 배우는 앞서 말씀드린것 처럼 "고독한 미식가"에 아주 잘 어울립니다. 

    


말이 너무 길어지죠? <고독한 미식가>를 정주행한 후 제대로 한번 포스팅을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짧게 소개한다는게,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써서 그런가봐요.


삼월이네요. 다들 맛있는것도 많이 먹고, 그래도 너무 '고독'하게는 말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즐겁게 먹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독한 미식가>의 오프닝 멘트를 끝으로, 저는 한편만 더 보고 자야겠습니다. 

 

"시간이나 회사에 상관없이 

극심한 공복이 찾아왔을 때 츠카노마, 그는 자기 멋대로 되고 자유로워 진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먹고싶은 것을 먹는 자신에게 주는 포상,

이 행위야 말로 현대 현대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최고의 치유 행위라고 할 수 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에세이/생명연습2011. 9. 24. 21:49

시오노 나나미, 『십자군 이야기1』, 문학동네, 2011

십자군, 정제된 ‘꾼’의 이야기


그 순간, 역사가 스토리가 될 때

역사는 픽션(fiction)인가, 논픽션(nonfiction)인가. 술 한 잔 걸치고 주정부리듯 읊조리는 자신의 과거조차, 이것을 논픽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사건이라는 것은 그것이 허구이든 실제이든 간에 발화되는 순간 새로운 ‘겹’을 입게 된다. 그 겹은 투명도에 따라 윤색 혹은 왜곡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래서 어떠한 이야기에 'non'이라는 단어는 쉽게 붙일 수 없는 접두어다. 순도 백 퍼센트의 ‘non'은 결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결국 픽션과 논픽션은 함량의 차이랄까. 특히나 역사라는 ’스토리‘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야기의 태초에 역사가 있었다. 역사는 다른 무수한 픽션, 논픽션들의 원본이다. 어떤 이들에게 역사는 무거운 이름일지도 모르지만, 또 다른 낡은 평상에서는 그 무거운 역사가 여름날 밤의 한담처럼 입에서 입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몇 백 년, 몇 천 년의 시간에도 살아남은 이야기, 이들이 바로 역사가 아닌가. 역사는 그 자체로 자신이 논픽션임을 보증하려하지만, 때때로 듣는 이들을 매혹시키는 것은 그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적’인지와 같은 단순한 것이기도 하다. 아마 우리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은 이러한 이야기로서의 역사, 그 스토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쯤 되면 이 스토리를 말해주는 누군가가 필요하다. 역사가 스토리가 되는 순간, 그 순간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로 스토리텔러, 이야기꾼들이다.




성(聖) 혹은 세속의 전쟁, Crusades

꾼들이 어떤 ‘겹’을 입히느냐에 따라 역사는 다르게 말해진다. Story of the Crusades. 시오노 나나미는 어김없이 이야기‘꾼’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사실 꾼이라고 하기에 그녀의 스토리는 차라리 반듯한 사관(史官)의 서책이다. 그녀의 방식은 소위 야사(野史)에 연연하는 ‘꾼’의 그것은 아니다. 십자군 전쟁사를 냉철히 분석하고 깔끔하게 구성해내는 단호함은 명백한 사관의 필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오노 나나미를 노련한 이야기꾼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능숙한 이야기꾼의 조건은 무엇보다도 자신이 말하는 서사를 확실히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사 속에 박제된 인물들을 움켜쥐고 생생하게 흔들어내는 것. 십자군 이야기를 새롭게 흔들어 보이는 그녀의 손이다.

이슬람교도를 무참히 살해하고 마침내 예루살렘에 입성한 십자군이 제단 앞에 울면서 무릎을 꿇었을 때, 그 순간에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선인과 악인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한 인간 안에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교나 철학이나 윤리를 통해 교정하려 노력하는 것인데, 아직도 그 성과는 신통치 않다. 옛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을 두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말했다.

(『십자군 이야기』p.239)

가끔씩 무심한 듯 덧붙이는 그녀의 목소리는 수다스럽다거나, 농익은 익살을 담고 있지는 않지만, 그러기에 십자군 전쟁을 써내려가기에는 아주 적합하다. 교황의 엄숙한 연설에서부터 시작된 200년 동안의 전쟁. 십자군 전쟁은 다른 어느 전쟁보다도 성(聖)적이며 동시에 세속적인 전쟁이다. 시오노 나나미가 치밀하게 서술해낸 것처럼 십자군 전쟁은 십자가를 짊어진 군대에 걸맞게 성(聖)과 속(俗)이 복잡하게 뒤엉켜있다. 이것은 신의 이름을 빌린 인간의 전쟁, 그 숙명 때문일 것이다.

두 간극을 매끄럽게 묘사하면서 그녀가 놓치지 않은 것은, 단연 제 1차 십자군의 주역들이다. 아데마르 주교, 레몽, 보에몬드, 고드프루아, 탄크레디, 보두앵. 시오노 나나미가 살려낸 이야기의 핵심 축은 바로 이 인물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십자군 전쟁의 진로 하나하나를 결정하는 이들의 ‘고유성’은 단순한 재미 그 이상이다. 이렇듯 십자군 전쟁 200년의 역사를 픽션처럼 현실감 있게 정제해서 보여줄 수 있었던 노련함은 바로 캐릭터, 즉 ‘인간’에 있다. 1권을 끝으로 십자군 제 1세대는 무대에서 퇴장했다. '성도 예루살렘 해방'이라는 십자군의 성스러운 목표를 너무나 인간적으로 달성하고 나서 말이다.

이야기 한 편을 마치고 일어서는 이야기꾼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듯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차마 넘기지 못하고 잡고만 있다. 그래도 어쩌랴, 꾼의 입이 벌어지기를, 이야기가 곧 이어지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릴 수밖에.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에세이/생명연습2011. 9. 24. 21:25

황석영, 『낯익은 세상 』, 문학동네, 2011

푸른 불빛들의 거리에서, “아, 다행이다.”

“내 속에 그게 정말 아직도 살아있는 거냐?(「낯익은 세상」p.234)”

왕가위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를 제외한 주위의 모든 장면들이 빠르게 지나감을 느낀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멍한 머릿속을 가다듬고 천천히 생각해본다. 2011년 7월 부산. 아마 새벽일 것이다.

장대비가 내렸다. 그 장대비보다 더한 물대포가 뿌려진다. 물대포를 맞은 부위가 뜨끈뜨끈하더니 점점 아파온다. 생각이 마비된 채 사람들을 따라 달린다. 얼핏 돌아보니 전경들이 쫓아오고 있다. 사람들이 빽빽한 화장실로 들어가 따가운 최루액을 씻다가 문득 거울을 본다. 온몸이 파란 색소로 뒤범벅이 된 채 멍하니 있는, 위태로운 파란 불빛 같던 하나의 형체. 화장실에서 나와 아픈 눈을 연신 비비며 본 부산의 새벽 거리는 수많은 파란 불빛들이 비척비척 걸어가는, 낯설지만 낯익은 풍경이었다. 나는 왜. 새벽, 물대포가 날아들고 전경들이 곤봉을 휘두르는 그 순간에 이 소설을 떠올렸던가.

“아, 다행이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딱부리는 이제 알고 있었다. 수많은 도시의 변두리에서 중심가까지의 집과 건물과 자동차들과 강변도로와 철교와 조명 불빛과 귀청을 찢는 듯한 소음과 주정꾼이 토해낸 오물과 쓰레기장과 버려진 물건들과 먼지와 연기와 썩는 냄새와 모든 독극물에 이르기까지, 이런 엄청난 것들을 지금 살고 있는 세상사람 모두가 지어냈다는 것을. 하지만 또한 언제나 그랬듯이 들판의 타버린 잿더미를 뚫고 온갖 풀꽃들이 솟아나 바람에 한들거리고, 그을린 나뭇가지 위의 여린 새잎도 짙푸른 억새의 새싹도 다시 돋아나게 될 것이다.(「낯익은 세상」p.228)”

아, 다행...일까. 처음 침대에 느긋이 누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넘겼을 때, 나는 그래도 다행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중얼거렸다. 마치 내가 이 말의 주인이라도 된 것 마냥. 부산에 다녀와서 나는 다시 책장을 펼치고 하나하나 구절들을 다시 읽고 또 읽는다. 아직 파란물이 빠지지 않은 손가락으로 연신 책장에 밑줄을 쳐본다.

수레바퀴의 한 회전. 백년 뒤에는 현재의 모든 것들이 사라질 것이다. 난지도에 다시 꽃이 피듯 그렇게 모든 것은 변할 것이다. 덧없고, 쓸쓸한 것이다.

라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었을까. 아마 나는 자격이 없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허겁지겁 쓰레기를 버리는 내가, 쓰레기 악취에 코를 찡그리는 내가 말이다. ‘꽃섬’의 철저한 외부인이면서도 모든 것을 이해한 듯 아무렇지도 않게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인지. 쓰레기 매립지라든가, 자본주의의 욕망이라든지. 잊혀져가고 있는 푸른 불꽃들, 도깨비들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을까. 그곳에서도 결국 다시 꽃은 필 것이라고. 물대포를 흠씬 맞으며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꽃섬을 떠올렸다. 온갖 주인 잃은 욕망들이 다시 한 번 버려진 곳. 채워졌다가 비워지기를 반복하는 거대한 쓰레기장. 이곳에서는 쓸모가 남은 쓰레기들이 또 다른 욕망들에 의해 분류되어 되팔아진다. 쓰레기에 값이 매겨지고, 이 돈뭉치를 따라 꾸역꾸역 사람들이 모여 들어 밤이면 소주와 잡탕 냄새가 진동한다. 쓰레기가 그 매개라는 점만 빼면 내 주위의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러나 나에게는 꽃섬이 고무장갑으로 간신히 집어올린 쓰레기의 감촉처럼 어정쩡하게만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오히려 나는 더 쉽게 이 세계를 동정하고, 희망의 말을 건네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꽃섬은 텍스트 안에서만 박제된 세계가 아니었다. 단지 여러 모습을 띈 채로, 다양한 시공간의 좌표 속에서 있어 쉽게 깨닫지 못할 뿐이다. 꽃섬이라는 공간은 단순히 쓰레기 매립장에서만 그치지 않고, 자본의 욕망을 지탱하는 그 모든 곳으로 확장된다. 나는 불타는 꽃섬만큼이나 낯익은 세상을 마주했다. 자본의 욕망이 만들어낸 또 다른 공간, 푸른 불빛들이 그렇게 차츰차츰 뒤로 흘러갔던 부산 거리에서 말이다. 내 눈 앞에서 또 다른 꽃섬을 마주한 이후, 그렇게 나는 조금 더 편안하게 딱부리의 말을 소리 내어 읽어볼 수 있었다.

새벽이 다시 밝아 오고, 당연한 듯 허기가 찾아온다. 배추김치 한 조각과 일회용 그릇에 담긴 뜨끈한 육개장을 황급히 넘기며, 조용히 곱씹는다. “내 속에 그게 정말 아직도 살아있는 거냐?” 그리고, 다행이라고. 또 이렇게 아침이 밝았다고.

2011년 7월, 부산의 한 거리에서 나는 쭈그리고 앉아 이렇게 중얼거렸다.


 [푸른 불빛] http://photo.naver.com/view/2005080921565786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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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에세이/생명연습2011. 8. 22. 04:50


첫 번째 공연이 끝나고, 밀려있던 생각을 좀 했습니다.

다들 생각이 많았겠죠.


홈(home), 어웨이(away)


스포츠에는 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스포츠 리그를 막론하고 각 팀에는 연고지가 있고, 홈구장이 있습니다.

연고지라는 것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박민규 씨의 소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에 나온 것처럼, 팀에게 있어서나 혹은 팬에게 있어 꽤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도 하지요.

늘, 이라고 하기는 어렵고(제가 늘 진지하게 생각만 하는 건 아니니까요)
가끔씩 제가 생각하는 저의 모습은 늘 홈구장이 아닌 어웨이에서 경기하는 운동선수였습니다.
선수 중에서도 간신히 2군에 있는 정도의, 프로와 아마 둘 다 부르기 어색한 그런 선수.

구장, 경기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힘들기도 하고,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겠지요.

투애니곰, 백지와 함께하는 공간은 제가 유난히 좋아했던 구장이었습니다.
이 공간을 좋아하는 아주 많은 이유들이 있지만, 굳이 여기에서 말하지는 않을게요.

구장이라고 하니까, 흡사 제가 여기 저기 많은 곳에서 열심히 사는 것 같지만, 그래서
마치 거만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제가 경기할 곳이 많기나 하겠습니까.
구장이니, 경기니 순전히 비유들에 불과하죠.

제가 어웨이에서 경기하는 기분이라고 했지만,
어웨이 구장에서 경기를 한다고 해서 선수가 그 경기에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경기가 의미 없다거나, 재밌지 않다는 것은 전혀 아닐 겁니다.
사실 홈구장에서 경기해본 적이 없지만 말이죠. 허허.

그러나,

힘들거나, 혹은 갑자기 모든게 낯설게 느껴지곤 할 때면
어떨 때는 이를 악물어보기도 했고, 질겅질겅 껌을 씹어보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여러모로 쉽지 않네요.

홈이니 어웨이니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냥 좀 지쳤나 봅니다.
소질도 체력도 없는 사람인가봐요.


사실, 홈(home)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홈을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몇 년이 지나든, 몇 십년이 지나든 늘 힘든 일일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조금은 막막하네요.


뭔가 좀 명확한 것을 제 스스로에게나,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으면 했는데. 이번 여름이 가기 전에.

밤공기는 차가워져 가는데
결국 모르겠다는 말 밖에 남지 않았네요.


그래서
저는 잠시, 사라져 있겠습니다.
어디에서부터, 어디로, 어떻게,
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사라진 상태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프로스포츠에도 시즌이라는 것이 있잖아요.
이번 시즌이 끝나고 다시 새 시즌이 찾아오면
저도 다른 모습으로 여러분을 만날 수 있지도 모르지요.


*

이런 이야기는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해야하는데,
운을 떼기도 어렵고 또 제가 말은 잘 하지 못하는 지라 글로 정리해보려 했지만
역시 아직 제 스스로도 정리가 잘 안되네요.
제 상황을 비유로만 설명한 것도 마음에 걸리지만. 어쩔 수가 없네요.
이런 식이 아니면 구구절절, 심하면 구질구질이 될 것 같아서요.

나만 힘든 척해서 미안합니다. 다들 힘든 거 알고 있는데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