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다들 잘 지내나요.
너무 오랜만이죠.
한 번 마감을 놓치니 계속 눈팅만 하고 막상 글 올리는 걸 차일피일 미루게 되더라구요. 죄송합니다. 그 사이에 올리신 글들 열심히, 재미있게 읽었어요.
저는 이제 학교 시험이 끝나고 혼자 푹 쉬고 있습니다. 중간고사를 치루고 났더니 4월이 벌써 끝을 보이고 있네요. 나의 사월은 어디로 어느새 벌써 흘러가버렸나. 곧 오월인데 말이죠.
원래 시험기간이 되면 온갖 잡생각이 몰려들게 되는데, 이번 시험기간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학교를 떠날 날이 가까워 오는 요즘은 어떻게 살아야하나, 라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구체적인 것에서부터 좀 추상적인 것까지요. ‘나’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죠. 그래서 괜히 이것저것 책이나 강연을 기웃거리고 있네요.
요즘은 팟캐스트로 <벙커1 특강>, 그 중 강신주 선생님의 강의를 반복 재생해서 듣고 있어요. 직접 가서 듣고 싶은데, 금요일 수업이 늦게 끝나서 말이죠. 언제쯤 갈 수 있을까요. 한 번 가보고 싶어요. 이럴 땐 참 서울에 살고 싶네요.
원래는 이 <벙커1 특강>에서부터 시작해서 제가 자주 듣는 팟캐스트 방송들을 차례로 소개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시험 공부하던 중 아이폰 사진들을 쭉 훑어보다가 제가 오래전에 캡쳐해두었던 글들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그런 고로, 팟캐스트 방송에 관한 내용은 다음으로 미루게 되었네요. 제가 오늘 소개하려고 하는 것은 <소설가의 일>이라는 연재 글입니다.
<소설가의 일>, 스토리(story)와 그 후
지금은 연재가 끝났지만 네이버 문학동네 까페에서 <소설가의 일>이라는 코너가 있었어요. 2012년 2월 29일부터 시작해서 2013년 1월 29일, 매주 화요일마다 김연수 작가님이 연재하셨었죠. 그 당시 매일 웹툰을 기다리듯 화요일마다 이 연재를 기다렸던 기억이 납니다. 저는 어떤 자기계발서나 동기유발 강연에서 듣는 이야기보다 <소설가의 일>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요즘 소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들이 넘쳐나고 있는데, 제 마음에 와 닿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어요. 그런데 <소설가의 일>은 제게 좀 특별합니다. 막상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사는 건 이런 것이다, 이런 주제들을 전면에 세운 것도 아니고 제목 그대로 ‘소설 쓰는 것’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요.
때때로는 가볍게 읽은 에피소드들도 있고, 몇몇은 마음에 깊게 남아서 캡쳐해서 폰으로 자주 들여다본 구절들도 있어요. 제가 <소설가의 일>을 읽으면서 가장 많이 생각하게 된 것은 이런 것이에요.
과연 하나의 스토리(story)로서 나의 삶은 어떠한가?
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소설가의 일> 내용을 우선 볼까요.
-「이 삶이 너의 이야기라면, 넌 최대한의 너를 원해야만 해(2012. 04.10)」중에서-
영화나 소설에서 시간이 흘러간다는 것은 사건, 어떠한 액션들이 발생한다는 의미하죠. 만약 아무런 사건도 없다면 그 영화, 소설은 그저 정지되어있는 장면, 책장에 불과하겠지요. 사건이 쌓여 시간을 밀고 간다, 그러한 것이죠.
제가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하루하루 사는 것도 그와 비슷하게 그럭저럭 인데요. 누구와 싸우는 것도 싫어하고, 기본적으로 부드럽게 마찰 없이 넘어가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요즘 팟캐스트로 하도 상담코너를 많이 들었더니 갑자기 상담 사연모드가 되네요) 변화를 싫어하고 그다지 불행하지도, 행복하지도 않게 사는 것이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가끔 이런 게 스스로가 지겨울 때가 있잖아요. 별로 살아있는 것 같지 않고 지루할 때. 이야기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일상은 거의 정지에 가까운 삶일지도 몰라요. 책장이 아주 느릿느릿 넘어가는 거죠. 무언가를 겪지 않으면, 계속 같은 제 자신으로 살아가니까요.
작년 가을인가요, 겨울이었던가요.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버스 안에서 턱을 달달 떨면서 머리를 쥐어뜯던 기억이 납니다. 내가 이거 잘못하는 게 아닐까, 불안감이 엄습할 때마다 이 구절을 혼자 되새겼습니다. 뭐 어때, 결론은 해피 엔딩 아니면, 새드 엔딩인데. 시도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지. “이야기의 차원에서는 등장인물이 원하는 걸 얻든 얻지 않든 신경쓰지 않는다.” 이 구절이 제 마음에 박혀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물론 그 당시 제가 몰랐던 것은, 현실은 소설보다 어처구니없고, 드라마보다 구질구질하게 엔딩을 맺더라는 것이었죠. 참 만만하지 않고 먹먹하더라구요. 망할 놈의 엔딩들은 말이죠. 할리우드 가족영화와 달리 해피엔딩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로구나. 나 같은 인간들의 경우 새드 엔딩이 더 많구나. 소설과 현실이 다른 점은, 소설은 엔딩이 나면 책장을 덮으면 끝이지만, 현실은 엔딩 이후에도 계속되잖아요. 엔딩을 떠안고 다시 새로운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하는 제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엔딩이 어떤 종류로 끝을 맺던 간에, 새로운 사건에 빠져들 때마다, 오랜만에 저는 제가 살아있다, 라는 자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늘 주위를 관조의 시선으로, 그 표면으로만 미끄러지며 살다가, 세상에 직접 뛰어들게 되니, 많이 당황스럽고, 힘들더라구요. 생생하게 살아있다는 것이 행복하다는 것과 동의어는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엔딩이 끝나고 난 후, 시간이 지난 뒤에 돌아 본 제 자신은, 그 사건을 겪기 전의 나와는 조금은 달라졌다는 것을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제 이름이 붙여진 ‘이야기'의 챕터가 한 장씩 늘어난 셈이니까요. 그 뒤로도 저는 <소설가의 일>의 글들을 떠올리며 시도했던 몇 번의 사건들을 통해 그 중 8할은 새드 엔딩을 겪고, 밤마다 후회와 쪽팔림에 이불을 걷어차곤 했습니다만, 간간히 소소하게 해피 비스무리한 것을 느끼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때로는(특히 요즘은) 살아있는 게 지쳐서, 그냥 깜깜한 심해 속에 있듯 죽어지내기도 합니다.
<소설가의 일>의 많은 글 중 아주 일부를 소개해드려서 아쉽지만, 아마 직접 읽어보시는 것이 더 재미있으실 거예요. 제 얘기를 더 많이 했네요.
요즘 피로를 많이 느낍니다. 한 곳에 너무 오래 있었나봐요.
<소설가의 일> 중 한 부분을 발췌하며 글을 마칩니다. 오월에 다들 얼굴을 볼 수 있겠네요.
플롯의 시간은 어떻게 측정하는가? 그건 행동의 숫자로 측정한다. 하나의 행동을 하면 시간이 조금 진행된다. 또하나의 행동을 하면, 시간이 조금 더 진행한다. 그래서 플롯의 관점에서 인생을 보자면, 많은 일들이 일어난 삶과 별다른 일들이 일어나지 않은 삶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 많은 일들이 일어난 삶 쪽이 훨씬 더 미래에 가있다. 내가 얼마나 더 나아갈 수 있느냐는 오직 내가 하는 행동의 숫자에 달려 있는 셈이다. ‘making’이라는 건 바로 이런 뜻이다. 대장장이가 망치로 내리치면서 조금씩 낫을 만들어가듯이, 우리는 행위를 통해서 어떤 존재가 되어간다.
-「어제보다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더 많은 일들을 하기를(2012.06.0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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