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루쉰2011. 2. 2. 19:49



장례식으로 시작해서 장례식으로 끝나는 「고독자」. 화자(선페이)는 두 장례식에서 리엔수를 만난다. 살아있는 리엔수와 죽어있는 리엔수를. 그러나 그의 모습은 시종일관 고독해 보인다.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던 모습과 여윈 얼굴로 가슴팍에 핏자국을 남기고 떠난 모습은 그가 여전히 고독했음을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 리엔수가 ‘나는 고독하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화자와 소설을 읽는 우리는 그가 지독하게 고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냉담한 성격, 실의에 빠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독신주의자, 검은 피부에 작고 마른 체격, 그리고 실패했다고 몇 번이나 울부짖고 있던 그의 서신.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그가 고독한 사람이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그의 고독이 무엇에서 기인했고 그가 왜 거기서 고독을 느끼는지는 알지 못한다. 느낌상, 그가 풍기는 분위기상 그가 고독함을 알 뿐이다. ‘고독’이란 단어로 정의되는 리엔수.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더 알기 위해서는 그의 고독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





표면적 고독


소설은 리엔수 할머니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이질에 걸려 상태가 위급했던 할머니는 리엔수를 찾지만 그가 S시에서 한스산으로 오기 전에 돌아가시고 만다. 마을사람들은 그가 도착하기 전에 모여 회의를 한다. 신당(新黨)인 리엔수가 장례의식을 신식으로 바꾸려고 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회의 끝에 마을사람들은 그에게 옛 전통대로 장례를 치를 것을 요구하기로 한다. 모두들 엄청난 충돌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리엔수는 의외로 담담하게 그 조건을 수락한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대단한 솜씨로 수의를 입혀 마을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이 놀라움은 리엔수가 신당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그가 서양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옛 도리를 무시하고 서구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맞는 말이다. 그가 옛 도리를 무시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한스산에서 유일하게 외지로 유학을 나가 서양식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이 이유만으로 의도치 않게 신당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추측해 보건데 그는 봉건사상을 떠나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위치에 있었다. 자신을 ‘불행한 청년’이나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하면서 그를 찾아오던 지식인 청년들, 글을 발표한 것 때문에 지방의 작은 신문에서 그를 공격한 익명의 인사들, 그리고 이로 인해 당한 해직. 리엔수는 당시 사회를 바꿔 보려했던 혁명가였던 것이다. 그것이 계몽운동과 관련된 것인지 계급과 관련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혁명을 꿈꾸는 지식인이라고 하기에 이 청년은 너무나 무기력해 보인다. 매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고 누군가를 방문하는 일도 없다. 그리고 사람을 냉담하게 대한다. 게다가 결혼도 하지 않아 그 처지가 더 쓸쓸해 보인다. 마치 수많은 좌절을 겪어 더 이상 낼 기운조차 없는 사람 같다.



그도 처음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밝은 청년이었을 것이다. 자유나 평화, 희망을 말하는 청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밝은 이상을 품고 뛰어든 세상은 그에게 좌절만을 안겨주었다. 중국에 신교육운동이 일어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자신의 고향에는 초등학교조차 없다. 마을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신당이라며 괴상한 눈을 하고 쳐다본다. 집 주인네 할머니는 결혼을 하라고 성화다. 지식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결국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이상은 그저 이상일 뿐이었다. 삶을 살아갈수록 늘어나는 것은 실망과 좌절뿐이다. 그래서 마을 어르신들이 장례를 전통의식에 따라 치르라고 요구했을 때에도 그저 ‘다 좋습니다’라고 체념한 듯이 말한 것이 아닐까. 그가 거기서 옛 전통을 따르지 못하겠다고 주장해도 그것이 받아들여지기는커녕 싸움을 일으키거나 마을을 소란스럽게 할 뿐이다. 봉건사상이나 봉건예교를 배척해야한다는 주장은 이 마을 사람들에게 먹히지 않을뿐더러 화를 돋우는 말이다. 리엔수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어르신들의 요구대로 하고 그것도 대단한 솜씨로 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이미 많은 좌절을 겪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의 내면



현실과 이상의 괴리. 거기서 오는 슬픔과 고독. 리엔수의 고독을 이렇게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의 내면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인생에서 좌절과 실망이 계속된다면 사람은 자신의 주위에 방어벽을 치고 세상과 단절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방어벽 안에서 나오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계속 홀로 외로이 존재하고자 한다. 더 이상 상처를 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벽 안 쪽으로 자신을 숨기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보신주의. 밖으로 괜히 나갔다가 넘어지고 다칠까봐 아예 나가지 않는 것이다. 겁쟁이라 불러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만큼 자신을 소중히 여기니까. 세상은 이미 글러먹었다. 내가 나서서 뭘 해 본다 한들 변하지 않는다. 구제불능. 그래서 이렇게 방어벽을 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잘못 생각한 거요. 모두 결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스스로 누에집을 만들어 자신을 그 속에 가두어 놓고 있소. 세상을 좀 밝게 볼 필요가 있어요.”



언뜻 리앤수에게 적절한 충고 같아 보인다. 그는 깜깜한 누에집 속에서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니 말이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누에집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



이건 무슨 의미일까? 내가 담을 쌓기는 했지만 내 의지는 아니었다? 아니면 누에집을 만들기는 했지만 난 그놈의 고독을 전혀 즐기고 있지 않다?



그는 이 말 뒤에 자신의 할머니 이야기를 꺼낸다. 집에서 하루 종일 창밑에 앉아 천천히 바느질을 하던 할머니. 그리고 평생을 말없이 그렇게 살아온 할머니. 리앤수는 할머니의 일생을 이렇게 평한다. ‘스스로 고독을 만들어서 그것을 씹어 삼켜 온 사람의 일생’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니 자연 슬퍼져서 장례식 때 통곡을 하고 말았다. 할머니가 느꼈을 고독과 세상엔 이런 사람들이 많을 것이란 생각에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는 타인의 고독을 읽어낼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누에집 속에서 오로지 자신의 내면만을 바라보고 고독해하는 사람과는 다르게 남의 고독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곧 그가 고독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람은 자신의 속에 있는 것만큼을 남에게서 발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는 고독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만큼의 고독을 남들에게서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리앤수는 사람을 냉담하게 대하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에는 손님들이 드나들었다. 그 대부분은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항상 실의에만 빠져있으란 법은 없어 그에게는 오래 사귄 벗이 없었다. 그에게는 몇 주 찾아오다가 연락이 뜸해지고, 그러다 또 몇 주 찾아오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한동안 나에게 찾아와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고 술로써 그 고통을 함께 잊던 친구가 날 더 이상 찾지 않을 때의 처절함과 쓸쓸함을 그는 잘 알았으리라. 그런데도 그는 손님들을 맞아 주었다. 분명 이 사람도 몇 주 후엔 더 이상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 사람이 떠난 뒤 자신에게 남겨질 쓸쓸함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는 자신만큼 남들의 고독을 잘 이해하고 헤아려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신의 고독을 뒤로하고 남의 고독을 들어줄 수가 있었겠는가.



그는 고독이 주는 쓰라림을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 고통을 알기 때문에 그들과 마주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도 그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것은 자신이 해고를 당해 심경이 편치 않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겨울 공원’에 비유하며 ‘겨울 공원에 가는 사람은 없잖소?’라고 말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는 해고를 당하기 전이나 후나 늘 겨울공원이었다. 음울한 건 마찬가지고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돈이 없어 영양상태가 좋지 못한 것과 가재도구가 줄어든 것이다. 천진난만 했던 아이가 나쁘게 된 것은 환경 탓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겨울 공원이라고 말하는 사람. 리앤수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미워하지 못하는 사람임이 느껴진다. 그래서 화자가 ‘당신은 인간을 너무 나쁘게만 보는 것 같은데’라고 말했을 때 차갑게 웃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누에집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라는 말의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닐까. 누에집들은 그 생김새가 다 다르듯이 고독도 그 모양새가 다 다르다. ‘고독’이라는 단어 속에는 전 인류만큼이나 다양한 고독들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리엔수의 고독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고독은 이런 모양을 하고 있다. 거센 바람이나 파도에 온 몸이 상처를 입어도 다른 돌들을 그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큰 바위. 그의 고독은 찢겨진 상처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보호하고 있는 돌들에게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아, 사람이 죽은 뒤에 한 사람도 그를 위해 울어 주는 이가 없도록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야.”



리앤수는 타인의 고독을 받아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무도 자신을 위해 울지 않게 하려고 한다. 누군가가 죽어 그를 위해 운다는 것은 상실의 아픔이 있다는 것이다. 리앤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아픔조차 남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혼도 하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의 죽음에 가장 슬퍼할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는 마치 세상에서 자신의 모든 흔적을 지우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도 결벽증적으로. 마지막까지 모든 고독의 짐을 자신이 짊어지려한다.






그의 삶



리앤수는 성공했다. 그의 장례식에서 그를 위해 울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형식적인 곡소리만 있을 뿐이었다. 그가 좀 더 살기를 바라던 한 사람도 이미 죽고 없었다. 그는 그의 소원을 이뤘다. 아무에게도 상처를 남기지 않고 떠난 것이다. 마치 성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모진 환경 속에서 자신이 상처를 입어도 두 팔로 남을 감싸 안은 모습. 그리고 그 와중에도 아무런 존재감 없이 조용히 있다 가는 모습.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맞나?)으로 향하는 예수님만큼이나 아름다운 모습이다. 희생과 박애의 정신! 그러나 그는 인간이다.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신이 되려 했다. 희생과 박애는 허울 좋은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잊었다.



리앤수가 가난에서 벗어나 뚜 사단장의 고문이 되어 운이 트이게 되고 난 후 화자에게 서신을 보낸다. 이 마지막 서신에서조차 그는 끝까지 멋있으려한다.



“인생의 변화는 너무도 빠르오! 지난 반년 동안 난 거의 거지나 다름없었소. 아니, 실제로 이미 구걸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소. 그러나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소. 나는 그것을 위해 구걸을 하고, 그것을 위해 추위에 떨고 굶주렸으며, 그것을 위해 고독하게 살았고, 그것을 위해 고통을 받았소. 하지만 멸망만은 원하지 않소. 보시오, 내가 좀더 살기를 원하는 한 사람의 힘은 이렇게 컸소. 그런데 지금은 없소. 이 한 사람마저도 없어졌소. 동시에 나 자신도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느꼈소. 다른 사람은? 역시 자격이 없소. 동시에 난 또 내가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기어코 살아가야 하겠다고 생각하오. 다행히 내가 잘 살아가기를 바라던 사람은 이미 사라졌으니까 그 누구도 마음 아파하지는 않을 것이오. 나는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소.”




언뜻 보면 굉장히 멋있어 보인다. 자신의 굳건한 신념을 지키며 그 신념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모습. 그리고 그가 좀더 살기를 원하던 한 친구가 그에게 엄청난 힘이 되었다는 것도 느껴진다. 그 친구는 아마 리앤수와 비슷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친구가 리앤수란 사람을 알아 볼 수 있었을 것이며 그에게 많은 힘이 되었을 것이다. 친구를 잃고 절망하며 울부짖는 리앤수를 보건데 그 친구는 리앤수의 내면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의 힘은 얼마나 컸던지 리앤수는 구걸도 추위도 고통도 고독도 견뎌냈다. 그러나 그 친구가 죽자 살아갈 의지를 잃었다. 자신은 살아갈 자격이 없지만 그 친구를 죽인 놈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 놈들을 위해서라도 살아가려 한다. 뭔가 이상하다. 희생과 박애의 리앤수가 갑자기 복수의 화신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앞에서 살펴본 내면대로라면 이 순간에 리앤수가 취해야 할 행동은 자살이 더 옳아 보인다. 그런데도 살아가려 한다니.



그가 서신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그의 삶은 항상 누군가를 위한 삶이었다. 자신을 믿어준 친구를 위해 살아가던 삶, 그 친구가 죽고 나서는 그의 적들을 위해 사는 삶, 자신을 찾아오는 실의에 빠진 청년들을 위한 삶. 리앤수는 남들을 위해 자신이 살아왔지 자신을 위해 인생을 살아오지는 않은 것이다. 고독, 희생과 박애, 복수라는 것들도 다 그의 이런 태도 때문에 생겨난 말들이다. 이 단어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전제로 생겨날 수 있는 단어들이다. 그는 자신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생각해 왔고 그렇게 만들어 온 것이다. 그는 분명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왔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말했듯이 멸망만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미 멸망했다. 그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멸망했다. 이 세상을 자기가 스스로 자신의 발로 서서 살아가는 것에는 많은 책임감이 따른다. 리앤수는 이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이 무겁게만 느껴졌고 무의식적으로 피하려 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핑계거리로 고독과 희생정신이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삶의 본위가 되었을 때의 모습은 마치 고귀한 신의 모습을 띄게 된다.



리앤수는 서신에서 ‘실패했소’라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간간이 ‘승리했소’라고 말하기도 한다. 자신이 자신의 삶을 평가하고 논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모든 생을 마감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화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들이 결국 같은 길을 걷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오. 그렇다면 제발 나를 잊어 주기 바라오. 당신이 일전에 나의 생계를 걱정해 준 것에 대해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소. 그러나 이제 나의 일을 잊어 주시오. 나는 이미 좋아졌으니 말이오.”



자신이 누군가의 기억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 리앤수는 이 구절을 쓰면서 마음속으로 얼마나 울었을까. 차가운 말투로 자신을 잊으라고 말하지만 속으로 징징 짜면서 정말 외롭다고 울부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끝까지 쿨한 척 하고 있다.



자신을 고귀한 위치로 끌어올려 스스로의 생을 논하고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리앤수의 모습은 솔직히 오만해 보인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변명할지도 모른다. 나는 정말 고독했고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에 그들이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이런 내가 뭐가 오만하냐고. 그가 고독한 것도 상처를 입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그 고독에 휩싸여 누에집만한 세계에 갇혀 살아갈 뿐이었다. 울고 싶고 친구와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싶고 때론 즐겁게 살고 싶은데 삶이라는 것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한 나머지 고독이란 단어에 갇혀 살아온 것이다.



이 세상에 그토록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았던 그는 이를 남들에게 상처를 주기 싫어서라고 말하지만 사실 자신이 자신의 존재를 그토록 싫어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감도 없고 애착도 없기 때문에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고독과 희생이란 말로 포장했다. 자신의 삶을 살아보지도 않은 사람이 실패했다느니 승리했다느니, 나를 잊으라니 라고 말하는 것은 오만하다. 이 세상에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을 거란 생각이나 나만 왜 이런 고통을 다 당하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삶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다.
 



(* 사진은 영화 '더 로드' 캡쳐 장면입니다. 소설 '고독자'와는 내용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지만 캡쳐를 하면서 왠지 부끄러워지네요. 나는 리엔수를 정말로 이해하기 싫었구나란 생각이 자꾸 들어서요. 반면에 영화 속 주인공에게선 그의 슬픔을 느끼고 말이죠. 시시각각 변하는 저의 마음이 무섭네요.)


Posted by masoume
History/루쉰2011. 2. 1. 13:46

               

 





-루쉰은 왜 암흑을 바라보았는가-

 









 

         들어가며

 루쉰은 종종 자신을 암흑을 쓰는 작가라고 했다. 그는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항상 마음에 묘한 응어리가 남곤 했다. 물론 읽으면서 감동할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산뜻하거나 상쾌한 것이 아니었으며, 알 수 없는 더러움같은 것이 마음의 한 구석에 남아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 응어리를 루쉰이라면 암흑이라 불렀을 것이다.

 문장의 곳곳에 나타나는 그의 암흑은 나를 싫증나게 하기도 했지만, 또한 흥미를 끌기도 했다. 그 때마다 나는 루쉰은 성격이 나빴을까?’라든지, ‘왜 이런 것을 쓸 필요가 있나?’라든지 머리를 굴리곤 했다. 그의 암흑은 왠지 나를 끌다. 살짝 열린 커튼에서 안을 들여다보듯이, 나는 그의 열린 상처에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루쉰의 암흑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루쉰의 암흑이란 무엇인가.

1)    혼을 부르는 것보다는, 자기가 자기를 부르면 된다. 불러도 누가 아는가, 무덤의 진호는 자기가 되라.

2)      돌이 부르고 있는 돌의 스님, 자기가 자기를 부르면 된다. 빨리 집으로 돌아갑시다. 무덤의 진호는 질색이에요.

3)      제멋대로 만드는 중산능, ()에게 상관이 있을 것인가. 혼을 불러도 가지를 않네, 제멋대로 자기가 가면 된다. (하략)

 이상 , 어느 수를 들어 보아도 불과 20, 그런데도 거기에는 혁명정부와의 관계, 혁명가에게 행해진 감정 시민의 견해가 남김없이 서술되어 있다. (중략) 남이 것을 읽고 느끼는 것이지만, 지금이 동트기 어두움이라고 끝까지 믿고 싶은 같다. 그러나 시민이 이러한 시민이라면 새벽이건 저녁때이건 혁명자들은 일군의 시민을 짊어지고 전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술가>

 

글은 루쉰의 여러 잡감을 실린 三閑集에서부터 발췌한 것이다. 루쉰은 종종 이런식으로 시민쪽의 암혹을 써대면서 혁명세력들을 비판했다. 당시 루쉰이 많은 혁명문학자들에게 심하게 욕을 먹었던 것도 그가 꺼침없이 암흑을 폭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암흑이란 무엇이었을까? 루쉰의 글을 읽고 있으면, 암흑이란 그가 실제로 본 내용을 글로 표현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지 않고 넘어가려고 하는 부분, 안 본 척하면서 피해가려는 부분을 아주 날카롭게 부각시키는 것이 그의 암흑이 아니었을까.

 머리 속에서 그린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본 것을 글로 표현하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아니, 실제로 본 바를 인정하거나 인식하는 것이 어렵다고 해야 할까. 우리는 자꾸 자신의 키워드에 맞춰서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과 어긋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하거나 아니면 애초부터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인정하고 싶지 않는 현실, 그것을 폭로하기 때문에 그의 글은 우리에게 응어리를 남기고 우리가 자기 스스로를 질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나는 재일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 머리속에 일종의 재일의 상을 그린다는 것을 요즘에 알게 되었다. 그 상은 내가 마음대로 만들어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상과 어긋나는 재일을 아예 부정하려고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만을 갖고서는 절대 현실적으로 뭔가를 실현시킬 수 없다. 이하는 당시의 그런 혁명분학자들을 비판한 루쉰의 글이다.

 

요즈음의 혁명문학가는 극단적으로 암흑을 두려워하여 암흑을 덮어두려 하지만 시민은 대담, 솔직하게 그것을 폭로한다. 한편의 약아빠짐이 딴편의 둔중한 무관심에 부딪친 결과, 혁명문학자는 사회 현상을 도저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서, 마치 까치는 기뻐하지만 올빼미는 싫어하는 노파처럼 미신이 깊어지고 사소한 길조를 발견하여 자기 도취하고 그것으로 시대를 초월한 셈이 된다.

축하하오, 영웅 여러분! 그대는 전진하시라. 내버려진 참된 현대는 뒤에서 그대의 진군을 바라볼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는 공존하는 채이다. 그대가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눈을 감기만 하면 무덤의 진호 보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의 최후의 승리이다.

<주술가>

 

그런대 그가 그려내는 이런 암흑은 가끔 전염될 때가 있다. 그 자신도 암흑을 널리 알리는 것에 우려한 적이 있는 것처럼, 나는 그의 문장을 보면 종종 낙심해버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2ne곰에서도 몇번 썼듯이, 나는 일본에 있었을 때 재일의 해방이나 사회의 변혁을 원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기보다는 지금 상황에 대한 불만, 부당함을 느끼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나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자기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하려고 결심한 것이 아니라, 불만을 쌓고 있기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주변에 있는 활동가들의 말에 감동하고 집회나 시위에 참석하면서 사회의 부당함을 외쳤다. 그러한 나의 열의’, ‘정의감 루쉰은 (?)하고 돌을 던져 버린다.

 

  만약 혁명의 실제 상태를 모르고 있으면 경우에도 역시 간단히 우익으로 변합니다. 혁명은 괴로운 것이며, 아무래도 더러움이나 피를 머금지 않을 없고, 시인이 상상하는 같은 재미있는 혹은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혁명이라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으로서 여러 모로 고상하지 않은 성가신 작업이 필요합니다. 시인이 상상하는 같은 로맨틱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혁명엔 파괴가 따르지만 이상으로 건설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파괴는 통쾌하지만 건설은 성가신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혁명에 대하여 로맨틱한 환상을 품고 있는 사람은 막상 혁명에 접근하여 혁명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금세 실망하기 쉽습니다.

<좌익 작가연맹에 대한 의견>

 

사람은 종종 상황이 한꺼번에 바뀌는 것을, 현재 상태가 혁명되어 좋아지는 것을 바란다. 그러면서 외친다. “혁명을! 자유를!” 그러나 루쉰은 거기에 칼을 댄다(?). 당신은 혁명을 하고 싶은지, 혁명하는 것에 책임을 있는지 말이다. (그는 특히 당시 지식인들에게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었다.) 나도 글을 읽으면서 질문할 밖에 없었다. ‘혁명이라는 말에 내가 품고 있는 이미지란 무엇인가? 나는 파괴가 아니라 건설에 대해 세밀하게 생각해 적이 있는가? 라고.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구사회를 증오합니다. 그러나 증오할 뿐미녀 장래에 대한 이상은 지니고 있질 않습니다. 열심히 사회 개조를 외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럼 어떤 사회로 개조하고 싶으냐고 물어 보아도 대답은 실현 불가능한 유터피아일밖에 없습니다. 혹은 생활이 몹시 무료하다 못해 무언가 자극물이 필요해져서 대변화를 공상하는 사람도 있읍니다. 따위는 실컷 마시고 먹고 입가심으로 고추를 먹고 십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려가면, 본디부터 낡은 타입의 인간이면서도 사회적 실패를 만회하려고 새로운 간판을 내걸고 신흥 세력을 이용하여 유리한 위치를 노리는 자도 있읍니다.

<오늘날의 신문학 개관>

 



 

       루쉰은 왜 암흑을 그렸는가

그런데 루쉰은 굳이 암흑을 폭로했는가? 그것은 그가 혁명에 대해서 비판적이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도 있다.

 

그렇지만, 암흑이기 때문에, 출구가 없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나는 아닌가. 만약 자기 앞에 광명 출구 보증서가 놓여 있지 않으면 혁명에 참가하지 못하겠다면, 이것은 혁명가가 아닐 뿐만 아니라 기회주의자마저도 되지 못한다.

<掃共大観>

 

 이것을 보니 루쉰은 거꾸로 이런 암흑을 직시함으로서 근번적인 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인상을 받는다. 한번 혁명해서 통치자가 바뀌었다 한들 시민의 생활에 변화가 없는, 그런 일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닌 혁명. 암흑자체를 치유하려는 혁명을 말이다.

지금까지 말해 왔듯이, 나는 한국에 오기전에는 일본에서의 재일의 상황에 분노를 느끼고 그것에 대해 싸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있었다. 그런 나에게 가장 울린 루쉰의 글은 <華蓋集> 나오는 <생각나는대로 11-3 “동포여,동포여!”>였다. 그는 동포들에게 사회개혁을 외치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학생들은 연설을 흔히 동포여, 동포여!....”라고 외친다. 그러나 제군은 그것이 어떤 동포이며 동포들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를 아는가?

 알지못할 것이다. 나의 마음까지도 내가 말을 하기 전에는 아마도 모금하러 사람이 몰랐을 것이다. 

 

그는 학생들이 실제 동포들에게 너무 무지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것때문에 아마도 실패할 그들의 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중국을 좋게 하기 위해서는 밖에도 해야 일이 있다.                                 

이번의 북경에서의 연설회나 모금운동 결과 학생들에게는 여러 사회 층의 사람들과 접척할 기회가 많이 있었다. 여러가지 일에 주의를 기울인 사람들 가운데서 누구라도 좋으니까 자기가 , 받아들인 , 느낀 것을 쓰는 사람이 나오기를 나는 바란다. 좋은 , 나쁜 , 감탄할 , 사나운 , 수치스러운 , 슬픈 아무것이나 모두 발표하여 도대체 우리에게는 어떤 동포 있는가를 모두에게 알리기 바란다.

그것들을 알고 다음에야 밖의 해야 일의 계획을 세울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식을 하지 않아야 한다. 가령 동포 따위는 있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처음부터 창조를 다시 하면 된다. 암흑 이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암흑과 싸우면 된다.

 

 , 루쉰은 학생들에게 관념적 동포상을 증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만나고 동포들에게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귄유했던 것이다. 폭로된 동포의 상은 청년들의 머리 속에 있는 기대와는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선동해야 하는 동포들이란 타인의 시체를 보면서 기뻐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掃共大観>참고). 그러나 그러한 암흑 혁명을 없다는 . 루쉰은 명백하게 폭로된 현실이 자신이 인식한 바와는 어긋나 있어도, 암흑과 싸울 있는지를 사람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것인가

인간에게는 생활속에서 부딪치는 눈을 가리고 싶을 정도의 찌질한 면이 존재한다. 그것은 인간을 찬가하는 아름다운 시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 것이고, 지금까지 많은 운동속에서 무시를 당해 것들이다 (나의 경험은 적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운동에는  암흑을 반영한 구호나 목표를 거의 보지 못했다.) “암흑 사람을 편하게 주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희망과 혁명에 불타 있었던 마음을 식혀 버리고, 삶에 대한 권태감, 포기하는 마음을 불러 이르킨다. 그렇지만 루쉰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직 실제로 뭔가를 적도 없는데 자기가 몇문장의 글을 읽고 포기하고 만다니 의지야 얼마나 나약한가!라고.

 나는 재일의 문제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부딪쳐 적이 없다. 그리고 옛날에 믿고 있었던 재일은 어떤 면에서는 결국 일본사회에서부터 똑같은 억압을 받고 있고, 그것을 위해 단결할 있다는 , 그리고 억압 받는 사람들이 만나고 연대하는 희망을 갖고 있다. 결과는 아마도 자신이 실제로 실행해 봐야만이 있을 것이다. 일본에 돌아가서 뭔가를 시도해 봐도 그것이 성공할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좋은 점과 나쁜 , 되는 것과 실망스러운 면이 있을 것이다. 전혀 돼서 실패하고 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재일을 만나서 직접 던져보고, 사람들속에서 생각을 키워가지 않으면 결국 재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을 같다. 그것은 자신의 삶속에서 배우는 것이기에.

루쉰의 암흑을 대하는 자세는 혁명이나 운동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자신을 대하는 태도에도 적용시킬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자신을 만나는 것을 무서워한다. 자신의 암흑을 아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자신의 암흑을 알게 되면 예전처럼 자기에 대해 희망을 계속 가질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를 바뀌고 싶다고 생각할 때는 자신의 암흑이야 말로 알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밝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볼 수 있지만 어두움은 잘 들여다보아야만이 볼 수 있듯이 말이다. 루쉰에게 귀를 기울여 보자.

 

생각컨대, 희망이란 본시 있는 것이라 수도 없고, 없는 것이라 수도 없다. 그것은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위에는 길이 없다. 걷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고향>

 

그는 사람들 앞에 암흑을 폭로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걸음을 끊지는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걸어가는 것을 통해 사람들의 희망이 되려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에게 성실해지려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암흑과 마주 대할 있는 것은 의지인 것같다. 지금까지 것을 끝내고, 뭔가를 새로 시작해 그것을 건설하고, 더욱 좋은 것을 만들어가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도 일본의 상황, 재일의 처지를 슬퍼하기만 했지, 그것에 대해 자신이 있는 제대로 모색하지 않았다. “파괴는 통쾌하지만 건설은 성가신 작업이다. 그것은 나의 정춘의 타는 마음만으로는 실현시키지 못하는 것일거라고 생각한다. 나의 마음도 실제로 재일조선인들과 만나면서 파괴되고 실망을 느낄 것이다. 그것에 이겨낼 있는 것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현실속에서 어떤 형태로 만드려고 하는 의지, 이렇게 살고 싶다는 의지밖에 없을 같다. 천천히라도 인간의 암흑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의 암흑에 어떻게 마주보는가를 삶의 과제의 하나로 삼고 싶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루쉰2011. 1. 31. 23:38
 

2NE곰 루쉰 파이널 에세이   

루쉰의 오래된 환등기와‘그들’의 서늘한 눈빛




  이 글은 다분히 시각적이다. 아니, 시각적이기를 바란다. 내가 준비한 것은 몇 장의 슬라이드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루쉰의 단편소설「조리돌리기」의 수많은 슬라이드 중 내 ‘취향’대로 몇 장을 고른 것뿐이다. 말이 취향이지, 사실 이 장면들은 내 머리 속에서 잊혀지지 않았던 ‘서늘한 눈빛’들에 대한 이미지이다. 오래된 환등기를 돌려 한 슬라이드씩 비춰본다. 


S#1 군중의 시선, 본능적이기에 더 잔혹한


  여느 때와 같이 평범하게 외출을 했을 뿐인데,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얼굴에 뭐가 묻었나,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당황을 넘어서 경우에 따라서는 두려움, 공포를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저 사람이 무슨 죄를 졌습니까……?”

사람들이 모두 깜짝 놀라서 보니, 노동자 같아 보이는 초라한 사내가 대머리 노인에게 낮은 목소리로 묻고 있었다.

대머리는 대답을 하지 않고 다만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그 바람에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가 잠시 후에 다시 보았다. 대머리는 그때까지도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모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그러자 그 사나이는 마치 자기가 죄라도 지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더니 종당엔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면서 빠져나가고 말았다. 그 자리는 양산을 옆구리에 낀 키다리가 들어와서 메웠다. 대머리도 얼굴을 돌리고 다시 흰 조끼를 보기 시작했다 (루쉰 소설 전집,「조리돌리기」p.334)


  루쉰의 단편 소설 「조리돌리기」의 한 장면. 타인의 시선을 느낀다는 것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컷이다. ‘그’가 한 일은 군중에게 에워싸여진 죄인이 무슨 죄를 지었냐고 물어본 것뿐이다. 그 물음 하나에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를 쳐다본다. ‘그’는 “마치 자기가 죄라도 지은 것처럼” 자리를 빠져나간다. 아마 ‘그 사나이’는 사람들이 왜 자기 자신을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는지 제대로 된 이유조차 알지 못했을 것이다. 꼭 눈에서 레이저빔을 쏜다고 해서 제대로 된 ‘눈빛 공격’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군중의 무표정한 시선만으로도 누군가는 죄인이 되고, 그것은 그 자체로 공격이다. 공격의 대상이 되는 순간 그 사람은 군중과는 다른 ‘대상’이 될 뿐이다. 그런데 사실 무엇에 시선을 준다는 것, 특히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는 상황에서 무엇을 본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에서 ‘본능적’이다. 

 “뚱뚱한 아이도 그 때까지 소학생의 얼굴을 주시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자기도 모르게 그 아이의 시선을 따라서 뒤를 돌아본다(334p)” 

“자기도 모르게” 타인의 시선을 따라간다. 시선은 그런 점에서 묘한 힘을 지닌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구경하고 있는 곳에는 왠지 모르게 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가? 이처럼 군중의 시선은 무의식적, 본능적이기에 더 잔혹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군중이 한 대상을 본다는 것, 쉽게 말해 ‘구경한다’는 행위는 ‘구경거리’가 생겼을 때, 시작된다. 조리돌리기도 이러한 전형적인 경우이다. 집행인이 죄인을 끌고 나오면 사람들은 그를 반원형으로 에워싸고는 손가락질하기도 하고, 욕을 하기도 한다. 죄인은 군중들의 시선에 다시 한 번 낙인찍힌다. 이것이 조리돌리기가 하나의 형벌로써 작용할 수 있는 이유이다. ‘조리돌리기’와 관련된 테마는 루쉰이 소설집 『납함』의 자서에 실려 있는 ‘환등기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참수당하는 동포를 둘러싸고 무감각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중국인들. 이때의 군중들은 구경거리가 대령되었을 때 수동적으로 시선을 두는 자들이다. 아마도 이것은 슬라이드 사진이라는 매체의 한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루쉰은 단편 소설 속에서 좀더 ‘움직이는’ 군중상을 그려낸다.    

“사람들은 모두가 거의 실망하면서도 행여나 하는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 찾아보고 있었다.(337p)”

  소설「조리돌리기」속 군중들은 흡사 먹이를 찾는 포식자와도 같이 ‘구경거리’를 찾아 나선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사건’, 즉 원을 만들어 구경할 만한 구경거리이다. 그들은 구경거리가 될까 싶어 넘어진 인력거꾼에게로 다가갔다가 아무 일도 없자 실망하며 흩어진다. 이들은 물론 다른 ‘조리돌리기’들의 경우처럼 시선의 감옥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같은 눈빛을 지녔다. 그러나 구경거리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는 그들의 눈빛은 군중의 ‘본능’을 더욱 더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S#2「조리돌리기」, ‘시선’돌리기?!


  정적이 흐르는 뜨거운 여름날의 거리. 무료한 거리에 ‘조리돌리기’가 등장한다. 이에 순식간에 반원형의 군중이 구경거리에 모여든다. 그런데 이 단편에서 묘사하는 조리돌리기는 단순히 루쉰이 일본에서 정지된 한 장면으로 보았던 ‘조리돌리기 슬라이드’와는 다르다. 이 한 장면을 가지고 단편영화를 만들었달까. 그만큼 「조리돌리기」는 읽는 내내 활동사진을 본다고 착각할 만큼 ‘시각적’이다. 루쉰은 이 소설에서 어떤 짜임새 있는 서사를 풀어내는 대신 그저 ‘시선’ 자체를 보여주기로 작정한 듯하다. 휙휙 지나가는 장면들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샌가 소설은 끝나있다. 그러나 또한 책장을 덮으면 망막에 남은 군중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생한 시선이 등골을 서늘하게 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조리돌리기는 슬라이드 사진처럼 충분히 정적이면서도 동시에 동적이다. 이것은 앞서 말했듯 시선의 문제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조리돌리기 장면자체는 정적인 사건인데, 카메라는 계속해서 움직인다. 즉, 감독 루쉰은 한 곳에 카메라를 고정시켜놓고 조리돌리기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바쁘게 카메라를 이동시킨다. 흔히 조리돌리기라고 하면 반원형을 이루는 군중이 원 가운데에 있는 죄인을 보는, 구심적인 시선의 방향을 떠올리기 쉽다. 혹은 반대로 원 중심의 죄인이 주위의 군중들을 돌아보는 원심적인 시선 정도. 그런데 이 소설에서는 하나의 시선이 더 추가된다. 그것은 바로 군중끼리 서로를 훑어보는 시선.「조리돌리기」에서 시선은 단순히 원 밖에서 원안의 중심, 한 대상으로만 던져지는 것이 아니다. 그 시선의 궤적은 배구공의 움직임처럼 여기에서 저기로 ‘토스’ 되어 진다. 소설 속 문장을 인용하자면 “담에 부딪쳤다가 퉁겨나오는 공처럼” 말이다.

  루쉰이 묘사하는 시선은 말 그대로 사람들이 보는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만두팔이 소년이 흰조끼를 입은 죄인을 보자 죄인이 소년을 보고, 죄인이 대머리노인을 보고 이를 따라 소년은 대머리 노인을 쳐다본다. 뚱뚱한 아이는 조리돌리기에 끼어든 소학생을 주시하고, 소학생의 시선을 따라 또 다른 구경꾼을 본다. 죄인을 보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이지만, 그들의 시선은 거미줄처럼 얽혀있다. 카메라는 한 사람 한사람 구경꾼들의 눈이 된다. 사실 때로는 카메라가 보여주는 이러한 시선은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구경꾼 한 사람이 허리를 펴는 것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은 그 별 것 아닌 것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순경이 돌연 한쪽 발을 올리자”, 혹은 “귓가에서 쩝쩝하는 소리”와 같은 사소한 사건에 사람들의 시선은 빠르고, 신속하게 움직인다.


 

S#3 ‘심심풀이 땅콩’과 시선의 역전


  시선이 이동한다. 그것도 계속해서. 그렇다면 무엇에 군중의 시선은 반응하는가? 앞서 말했듯 참으로 시시콜콜한 소리, 행동에 구경꾼들의 시선은 이동한다. 그들은 물론 조리돌리기의 관중이지만, 그들에게 조리돌리기란 단지 메인요리와 같다고나 할까. 사람에게는 세끼 밥뿐만 아니라 심심풀이 땅콩도 필요한 법이다. 루쉰은 이러한 ‘심심풀이 땅콩’들을 계속해서 군중들 사이로 떨어뜨린다. 그러면 군중들의 시선은 그 땅콩들로 향하고, 다시 별 것 아니로군, 하고 반원형 안의 죄인에게로 눈을 돌린다. 문자 그대로 이러한 ‘동적인 사건’들은 반원형의 대형 자체에서도 나타난다. 더 앞으로 끼어들려 하는 사람, 늦게서야 구경거리를 발견하고 허겁지겁 달려드는 사람, 한 대 얻어맞고 뒤로 도망가려는 아이, 그리고 마지막에는 뿔뿔이 흩어지는 구경꾼 무리들까지. 죄인을 발견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반원형의 띠는 고정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살아있는 것 같다.

  만약 이 소설 속 조리돌리기를 새가 높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이 ‘조감’해보면 어떨까? 즉, 군중 한 명씩의 시선을 따라다니는 것이 1번 카메라라면, 높은 곳에서 조리돌리기 전체를 조명하는 것은 2번 카메라 정도 될 것이다. 사람들의 움직임을 조감해보면 통통 토스되는 시선들만큼이나 흥미롭다. 우선, 크고 잔잔한 호수를 떠올려 보자. 연못 위로 모든 물고기들이 좋아할만한 먹이가 던져진다. 인기만점 영양만점 물고기 밥, 쉽게 말해 떡밥 열 봉지 정도? 처음에 떡밥이 던져지면 많은 물고기 떼들이 떡밥 주위를 동심원으로 둘러싸고 먹이를 먹는 것에 열중할 것이다. 그런데 물고기 떼의 동심원으로부터 조금 떨어진 곳에 새우깡이나 콘칩 한 두 개를 던져준다고 하자. 한 두 개 정도야 뭐, 떡밥 열 봉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으니 몇몇 물고기만이 또 다른 작은 동심원을 만들고 과자를 먹어치우면 금방 다시 떡밥에게 달려들 것이다. 물론 구경하는 것과 먹는 것은 엄연히 다른 행위지만 ‘시각적’으로는 동일한 효과를 불러 온다. 앞서 비유했던 메인요리와 심심풀이 땅콩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왜 루쉰은 ‘심심풀이 땅콩들’을 군중들 사이로 던져 넣는가.      


“좋았어!”

어디선가 갑자기 몇 사람이 동시에 소리쳤다. 무언가 일이 일어났음을 알고 사람들의 머리가 모두 그쪽을 향해 돌아갔다. 순경과 순경에게 붙들린 범인도 조금 동요했다.(337p.)


  웃기지 않은가. “무언가 일”이 일어나자 모든 사람들이 그쪽을 보고, 조리돌리기의 중심에 있던 죄인조차 “동요”한다. 루쉰은 조리돌리기의 군중집단의 시선, 움직임을 동적으로 표현하면서 시선이라는 것이 쉽게 전이될 수 있는 것임을 시사한다. 심심풀이 땅콩, 새우깡, 콘칩 한 조각으로도 시선은 움직인다. “저 사람이 무슨 죄를 졌습니까……?”라는 한마디에 구경꾼의 위치에 있던 사람도 ‘죄인’이 되어버린다. 루쉰의 뇌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환등기 슬라이드에서 구경꾼과 죄인은 원과 원의 중심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소설 「조리돌리기」속에서는 조리돌리기는 하나의 고정된 상황이 아니다. 조리돌리기의 중심은 여기에서 저기로 쉽게 전이되고, 이와 동시에 한사람은 구경꾼도 구경당하는 사람도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시시덕거리며 누군가를 구경하고 있는 사이에, 우리 스스로가 다른 이들의 시선에 둘러싸여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시선의 역전’, 정확히 말하면 시선이 역전될 수 있는 ‘가능성’이야 말로 이 소설이 가져다주는 ‘서늘함’의 정체가 아닐까.



    에세이 쓰면서 참고한 [블루씨 위젯] 입니다. 마우스로 클릭하면 물고기가 모여요.
    여기에서는 "심심풀이 땅콩"이 마우스 클릭질이겠네요. 콩콩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루쉰2010. 11. 27. 16:01


지난 에세이에서 ‘노신은 어떻게 저리 당당하게 싸울 수 있는 것인가’를 궁금해 했었다. 당당하게 싸울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그 문제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자신의 삶에 대해 떳떳하다는 의미일 것이므로. 하지만 그가 써댄 글만큼이나 그가 벌이는 논쟁을 마땅찮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오랫동안 창작물의 출판이 없고, 러시아의 검은 빵의 번역이 조금 있는 이외에는 잡감문만 쓰고 있다. 잡감문은 겨우 일천 자, 붓을 쥐면 곧 이루어진다.…노신 씨는 이쪽도 마음에 들지 않으며, 저쪽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어쩐지 노신 씨는 이 노파를 닮은 것 같다. 아침부터 밤까지 풍자니 야유니 하며 무책임한 잡감만 토로하고 있는 점이. 그럼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228)” 이렇게 노신을 추악한 노파에 비유하는 신랄한 글이 있는가 하면, “「아Q전」을 능가할 만한 위대한 저작을 몇 권은 더 쓰셔야 하지 않(229)”느냐는 조언도 있다. 실제로 「준풍월담」에 수록된 장자와 문선에 관한 논쟁을 보다보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말꼬리를 잡는 것처럼도 느껴지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내 머릿속 이미지와 실제가 달라서였던 것 같다. 노신이 벌이는 논쟁은 전혀 멋있지 않았던 것이다.

노신은 왜 비꼬고, 욕하고, 실례를 범하면서까지 논쟁하는 글을 썼을까? 노신이라고 장자나 문선이 나쁘다는 것은 아닐 게다. 다만 장자를 권하는 사람들과 또 그 권유로 장자를 읽은 사람들이 지금 그들이 사는 세상과 그 세상 속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에 비난을 퍼부었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욕한다고 세상은 갑자기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그 때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그 작은 사건들을 집어내 흔들어 보이는 것이였던 게다. 노신은 이렇게 말한다.



시간은 하루하루 지나간다. 거기에 따라서 크고 작은 가지각색의 사건도 지나가버리고, 이윽고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다. 더구나 사건은 뿔뿔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나 개인으로서도 느끼지 못한 것, 알지 못했던 것이 얼마나 있는지 모른다. 그저 여기에 모은 수십편에 관하여 말하면, … 규모는 작지만 하나의 모습을 그리지 않았나 생각한다. (236)



어딘가에 있을 아름다운 문학이나 훌륭한 옛글이 아니라 바로 자기 발밑의 암흑을 보는 일, 그것이 노신이 하고자 한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노신의 그런 태도가 잘 반영된 글이 「진이재 부인의 경우」라고 생각한다. 자살한 부인은 성은 공이고 이름은 윤하이며 신보관 영어 번역원 진리재의 아내였다. 그런데 남편인 진리재가 1934년 2월 25일 상해에서 병으로 죽자 무석에 있는 그녀의 시아버지는 며느리에게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들 딸의 교육을 이유로 돌아가지 않았고 시아버지로부터 여러 차례 독촉을 받다가 5월 5일 두 아들, 그리고 딸과 함께 자살한다. 지금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 사건이 다른 누구도 아닌 죽은 공윤하의 아우에 의해“아내는 남편을 따라 죽으며, 자식은 어머니를 따라 죽고……”라는 미담을 포장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당시 중국의 분위기가 짐작될 만하다. 노신은 “이와 같은 가정에서 자라고, 그 훈도를 받은 몸으로 어찌 약자가 되질 않고 베길 것인가(242)”라며, “남의 자살을 책잡는 자는 책잡는 일과 동시에 남을 자살로 내모는 환경에 도전하여 이를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243)”고 쓰고 있다. 자살한 개인에 대해서만 책잡을 것이 아니라 그 자살자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 그 약자를 죽음으로 내몬 암흑에 대해 한 발의 화살이라도 쏘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신은 “‘이것을 보아도 느낌이 있고, 저것을 보아도 느낌이 있어’서 끊임없이 잡문을 쓸 수 밖에(229)” 없었던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불쾌하다고 해도 말이다. 논쟁을 벌이고 글을 쓴다는 것은 착하기만 해서는 할 수 없다. ‘옳고 나쁨이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서로 다른 것이다’라는 말만 해서는 논쟁도 되지 않고 화살도 되지 않는다. 노신은 미움을 받으면서도 화살을 쏘았다. 내가 그에게 배울 점이다.


(*11월 13일 투애니곰 세미나에서 읽었던 글입니다.
노신이 어떤 식으로 논쟁을 벌였던가, 그의 논쟁 태도는 어떤 경향, 일관성을 가지는지 좀 더 써줘야 함에도 스윽 넘어간 부분이 있었어요. 미처 고치지 못한 원본이지만 올립니다.)
Posted by Journey.
History/루쉰2010. 9. 28. 18:49
 


루쉰은 북경여자고등사범학교 문예회에서의 강연에서 노르웨이 문학가인 입센의 작품, 인형의 집에 나오는 주인공 노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노라는 가출하여 어떻게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강연 첫머리에 던진다. 노라는 일명 Ein Puppenheim이라고 하는데, 이는 남이 이렇게 하라고 하면 그대로 움직이는 사람을 가리키는 넓은 의미의 꼭두각시 인형을 의미한다. 노라는 행복한 가정 속에서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지만, 자기가 남편의 꼭두각시라는 것을 깨달고 가출하게 된다. 여기서 루쉰은 가출한 노라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묻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노라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했지만, 루쉰은 그렇지 않다고 보았다.

 노라의 가출은 한 여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 혹은 더 넓게는 그 당시의 중국의 상황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노라가 자신이 남편의 꼭두각시였다는 것을 깨달고, 가출을 했다는 점에서 노라의 가출을 개인적인 일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당시의 중국은 청조에서 새로운 근대국가로 넘어가려는 과도기였는데, 수많은 개인뿐만 아니라, 중국 전체가 예전의 안락한 상태에서 새롭고 혼란스러운 상태로 내몰렸고, 이런 새로운 상태에서 살아가야 했다. 노라가 가출하여 살아가야 하듯이 말이다. 여기서 노라가 머물렀던 행복한 가정은 중국인들이 흠뻑 빠져있었던 청왕조들과 겹쳐진다. 루쉰이 보기에 노라의 가출은 현실이었으며, 또 그래야만 했다. 그리고 중국인들의 변화 또한 필수적이었다.

 

다시 말하면, 집을 나온 노라는 길을 잃은 거나 다름없다. 마치 부자유스러운 조롱 속에서 자신의 능력을 모조리 잃어버린 새가, 조롱 밖으로 나와 자유의 무거운 짐과 온갖 위험에 어찌 살아갈지를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그녀에게 남겨진 길은 다시 돌아가거나, 타락하는 길밖에 없었다. 이것은 노라뿐만 아니라 그 당시의 중국인 전체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서양문물의 도입과 혁명의 기운은 그들을 마치 가출한 상태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서 비유적으로 사용한 ‘가출’은 행복하고 편안한 생활에서 무언가 생활의 토대를 다시 만들어야 하는 고되고 힘든 상황으로의 전락을 의미할 것이고, 루쉰은 노라의 ‘가출’을 통해 이런 상황의 뒤바뀜이 현실이라 말한다. 또한 시대적 조류에 따라 국가의 개혁을 위한 ‘가출’이 당위적임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가출한 노라와 같이 살아갈 길을 잃은 상황에서, 또는 근대국가로 가는 과도기에서 혼란을 겪고 있는 중국의 상황에서 노라 혹은 중국인들은 무얼 어찌해야할까? 특히 노라가 가진 전 재산은 각성한 마음뿐이며, 그녀는 어려운 생활고에 처해있다. 루쉰은 이러한 상황에서 이상적인 장래의 황금세계를 몽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상적인 장래의 꿈을 꾸기 보다는 현실의 꿈을 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현실을 살아가는데 실질적인 힘으로 다가올 것이다. 특히 노라에게는 그것이 살아가는데 매우 중요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루쉰이 말하길, 노라에겐 돈, 즉 경제가 필요하다. 그녀가 분명 남편의 꼭두각시가 되는 게 싫었고, 자유롭게 살고 싶어 집을 나왔지만, 그녀는 꼭 돈을 벌어, 자신의 생활을 유지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경제 혹은 돈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삶에 대한 절박하고 필수적 조건이다. 돈이 없다는 것은 곧, 굶주림과 죽음을 의미했다. 현재 우리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굶어 죽는다는 것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집 나온 노라에게 돈이 없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노라가 자유를 찾아 집을 나왔지만, 집을 나와 죽게 되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그땐 그녀의 꿈이고 이상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다. 그 꿈이며 이상은 루쉰이 [노라는 가출하여 어떻게 되었는가]에 말하는 장래의 꿈이다. 그는 이 연설문에서 장래의 꿈이 아니라 현실의 꿈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길이 보이지 않는 경우에는 꿈이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제한된 의미에서 그렇다. 나중에 거짓임이 밝혀질 수도 있는 장래의 꿈은 위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의 이상과 목표는 가출한 노라에게 어느 정도의 정신적 보탬이 된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살아갈 수 없다. 우선 현실의 꿈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현실의 꿈이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생활력과 마음 깊숙이 되뇌이는 이상에 대한 아득한 소망과 기억을 의미한다. 자신의 소망이 이루어질지 아닐지는 잘 모른다. 그녀가 가진 소망이 큰 것이던 작은 것이던, 그것을 이루려면 우선 자신의 주위에서 이룰 수 있는 소박한 것들을 이루어야 한다. 생계와 일상의 안정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 이상의 어떤 것도 해낼 수 없다. 가출한 노라에게는 그것도 꽤나 버거운 일일 것이다.

 그렇지만 노라가 돈을 벌고 경제적 자립을 한다고 해서 그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그의 소망이 단지 남편의 꼭두각시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은 사는 것이라면, 경제적 자립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남녀 평등, 여권의 신장 같은 사회적인 개혁을 원한다면 그녀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있을까? 이에 대해 루쉰은 확답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천천히 끈기있게 투쟁하라고. 돈을 벌고, 자신의 삶을 책임지면서 말이다. 

그렇다면 루쉰의 말이 사회 전반의 작고 개인적 변화들이 쌓이고 쌓여서, 중국 전체가 변할 수 있다는 그런 말인가? 그는 이에 대해 회의적이다. 그에게 장래의 꿈, 중국 전체의 변화는 거짓말이다. 그만큼 확실치 않은 장래에 대한 기약을 한다는 것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 꿈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잘 모른다. 그러기에 그 꿈에 회의적이지만, 그조차 꿈꾸지 않을 수는 없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으므로. 그것은 단지 현실을 살아가는데 보탬이 될 뿐이다. 그리고 계속 종착역이 어디가 될지를 모르는 길을 차근차근 걸어가야 한다. 종착역이 확실하지 않다면 길은 없다. 하지만 길을 만들면서.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