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NE곰-납함 에세이>
현실을 살아가기
명혜원
아아, 이것이 20년 동안 한시도 잊지 못한 고향의 모습이란 말인가? 내가 알고 있는 고향은 전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내 고향은 훨씬 더 좋았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며, 그 좋은 점을 말로 표현하려하면, 금새 그 모습은 사라지고 말은 잃어버린다. 역시 이런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나 자신을 위로하였다. ‘본래 고향이란 이런 것이다. 진보도 없는 대신, 내가 느끼는 바와 같은 적막함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나 자신의 심경이 달라진 탓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번의 내 귀향은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라고.
루쉰의 소설 '고향' 속 20년만에 고향을 찾은 주인공의 심경묘사이다. 이사를 위해 고향을 찾았을 때 그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기억하던 고향의 모습과 너무나도 다른 쓸쓸하고 황폐한 마을이 생기를 잃은 채 가로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자신이 20년 동안 그리워하던 고향이 정말 맞는지 가슴에 슬픔이 솟아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과거 고향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그리며 좋은 점을 말해 보려 하면 그 모습은 순식간에 지워지고, 표현하고자 했던 말도 없어져 버리고 만다. 그가 알던 고향의 아름다움이란 그가 그려낸 막연한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고향’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것만 같은 막연한 공간으로서의 이미지가 있기도 하고, 지친 나를 포용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푸근함도 존재하는 듯하다. 고향에서의 추억은 아련하나 즐거운 감정을 만들어내 되새기고 은미하며 현재를 즐겁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준다.
하지만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두고 만나지 않는 것이 나았다는 말이 있듯이 시간이 흘러 마주하게 된 고향은 그가 막연히 그리던 아름다움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특히 추억 속 자신의 작은 영웅인 룬투는 모진세월을 견디며 ‘등신 같은 인간’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순수하던 어린시절 주고받은 우정은 그들에게 남아 있지 않다. 룬투와 그의 사이에는 이제 그를 ‘나으리’라고 부르는 벽이 생겨나 있었다. 고향의 아름다운 이미지와 더불어 어린시절 추억까지 깨어져 버린 것이다.
옛 집은 차츰 나로부터 멀어져 갔다. 고향의 산천도 차츰 나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내 둘레에 보이지 않는 높은 벽이 쳐져 나 혼자 그 속에 남겨진 듯한 생각이 들어 울적해질 뿐이었다. 수박밭의 은목걸이를 한 어린 영웅의 모습은 다시 없이 선명하였었는데, 이제는 갑자기 희미해져버렸다. 이 또한 견딜 수 없이 슬픈 일이었다.
오랫동안 타지 생활을 하던 그가 마음한편에 두었던 기억하고 싶던 추억이 사라졌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슬픔이었을 것이다. 이제 막연히 아름답다 칭하며 떠올릴 마음의 안식처가 사라져버렸다는 점과, 자신이 그리던 아름답던 추억이 단지 과거의 기억일 뿐이었다는 점이 그를 슬픔으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깨닫게 된다. 자신은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고, 룬투는 룬투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흔히 현재의 상황이 싫어지면 과거를 떠올리며 추억하게 된다. 대학생 때는 ‘고등학교 때가 좋았지’, 고등학교 때는 ‘중학교 때가 좋았지’, 중학교 때는 ‘초등학교 때가 좋았지’ 등 현재의 상황과 과거 좋았던 일부를 비교하며 돌아가고 싶은 추억으로 만들어 떠올리며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를 버텨나갈 수 있는 일종의 희망이 된다. 즉 추억이라는 희망은 사람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그러나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가공된 이미지속 추억에 너무 의존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들을 직접 마주했을 때 크나큰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평생 추억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기란 불가능 하다. 추억이란 것은 우리가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어느 순간 생겨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추억과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가? 결론은 2가지다. 희망적 추억을 만들고 그것을 직접 대면하지 않은 체, 평생 추억을 그리며 살아가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추억이 추억일 뿐임을 인식하고 너무 큰 기대와 희망을 가지지 않고 마주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조카와 룬투의 자식이 잠깐의 만남으로 서로를
그리워하는 정이 생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그들은 자신과 룬투와 같은 단절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그러기 위해선 이들이 기존과 는 다른 전혀 새로운 길을 가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곧 이러한 바람조차 희망임을 직시하며 위와 같은 말을 하게 된다.
우리가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막연히 그리게 되는 추억 또한 희망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땅위의 길과도 같은 희망. 우리가 걸어갈 수, 실천 할 수 있어야만 희망은 만들어 질 수 있게 된다. 고향에 대한 추억이, 추억에 대한 이상이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절망이 되어버린 것은 고향과 추억에 대한 이상이 과거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추억에 의지하며 현재를 부정하고 살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자신의 희망과 현실이 마주했을 때의 간극으로 절망하며 패배감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과거를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희망만을 의지한 체 살아가는 사람들도 아니고,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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