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카프카2010. 8. 3. 18:20

2NE곰 카프카 파이널 에세이

세 개의 감옥, 갇혀진 욕망 그 너머


카프카의 단편, 욕망의 국카스텐(guckkasten)

“내 잡문에 씌어진 것은 언제나 코이며, 입이며, 털이다. 하지만 그것을 합치면 하나의 형상인 전체로 될 것이다”[각주:1]
  루쉰의 잡문처럼 카프카의 단편은 짧지만 강렬한 이미지들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메시지가 아닌 ‘이미지’인 것은, 명확하게 메시지로 표현하기엔 카프카가 보여주는 세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카프카의 단편이 모호한 허상만 담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루쉰이 자신의 잡문에 대해 평했듯, 카프카의 단편들도 각기 떨어져있을 때는 “코이며, 입이며 털”이기에 전체를 파악하기 쉽지 않은 것뿐이다. 물론 가끔씩은 코, 입, 털조차도 구분해내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난해함 속에서도 재미있는 것은 그 단편의 조각들이 국카스텐, 즉 만화경 안의 알갱이처럼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며 다채로운 무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만화경 안을 들여다보듯 카프카의 단편들을 찬찬히 보면 색다른 무늬들을 포착할 수 있다.  
  몇 번을 흔들어 포착해낸 하나의 코드. 불완전한 알갱이들의 이산과 집합이 만들어낸 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가 바로 ‘욕망’이다. 카프카는 그의 소설에서 끊임없이 ‘욕망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편입의 욕망, 탈주의 욕망, 권력의 욕망. 그의 소설들은 욕망에 대한 각기 다른 단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욕망의 단상 또한 보는 각도에 따라서, 모여든 알갱이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때문에 좀 더 명확한 상을 보기위해 알갱이를 선별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선택 된 카프카의 단편이, 「어느 단식 광대」,「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이다. 욕망의 국카스텐인 두 단편 소설에는 각기 다른 세 개의 감옥이 등장한다. 감옥 속에 갇혀져 있는 무엇. 그것은 바로 욕망이다. 세 욕망은 서로 다른 표현, 소통 방법을 가진 채 창살 안에 ‘갇혀져’ 있다.

광대와 표범, 철창 안에 갇힌 욕망


  세 개의 감옥을 흔들어 볼 수 있는 그 각도들은 무엇일까. 욕망은 말 그대로 무엇인가를 바라고, 또 원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욕망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욕망의 대상을 ‘어떻게’ 욕망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런데 ‘무엇’과 ‘어떻게’ 사이에는 선후관계가 없다. 오히려 ‘무엇’은 동시에 ‘어떻게’이며, ‘어떻게’는 그 자체로 ‘무엇’이다. 즉, 욕망은 표현되는 그 방식으로 정의된다. 욕망의 방식이 중요한 만큼 그 욕망과 시대의 관계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대와 욕망이 만나는 지점에서 욕망이 발현되고, 그 방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시대의 욕망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욕망에 큰 영향을 끼친다. 시대와 욕망은 서로가 서로를 얽어매어 욕망의 시대, 시대의 욕망을 만들어낸다.
  여기 시대의 욕망을 재현해주는 한 광대가 있다. 광대는 시대의 욕망을 배설, 대리해주는 존재이다. 광대의 유희를 보며 사람들은 자기 안에 갖고 있는 욕망을 배설해내고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단식광대 또한 극한의 단식을 통해 관객들에게 탄성을 자아낸다. 관객들은 자신들은 할 수 없는 단식, 절제의 행위를 극한으로 밀고나가는 광대를 보며 희열을 느낀다. 단식 광대는 철창 안에서 단식이라는 광대놀음으로 시대의 욕망, 시대의 광대가 된다. 그런데 단식광대의 유희가 벌어지는 장소는 다름 아닌 철창 안이다. 감옥 안에 갇혀있는 광대를 사람들은 저 멀리서 신기한 듯 구경 한다. 철창을 경계로 광대는 일반인과는 다른 사람으로 격리되며, 이로 인해 단식행위는 더 대단한 것이 된다. 단식광대, 개인의 단식에 대한 욕망은 감옥이 씌워짐으로써 하나의 표상, 상징이 되어버리고, 그 상태로 사회, 군중에 의해 소비된다.
  그런데 시대의 욕망이라는 것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이제 단식에 열광하는 ‘단식을 위한 시대’도 지났다. 절제의 극한을 찬양하는 것은 더 이상 시대의 코드와 맞지 않는다. 욕구를 인내하는 것이 하나의 해방구, 카타르시스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욕구의 무한 증식만이 열광의 대상이 된다. 결국 단식 광대는 시대에 의해 버려져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감옥 안에서 홀로 굻어죽은 채 말이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단식의 끝을 보았으니 죽기 전 단식광대는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단식 광대의 생명이 끊어진 그 철창 안으로 새로운 욕망, 새끼 표범이 넣어진다. 표범은 자신이 철창 안에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생명력이 넘쳐 보인다. 그 무엇도 먹지 않았던 단식광대와 달리, 새끼 표범은 철창 우리 안에서 마음껏 고기를 물어뜯는다. 표범은 시대가 원하는 욕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상이다. 사람들은 이 새로운 ‘욕망 덩어리’가 보여주는 욕망의 그르렁거림에 열광하며, 표범 우리 앞을 떠날 줄 모른다. 그러나 사실 관중이 열망하는 것은 표범의 생명력이 아니라 철창 안에 가두어진 야생의 욕망이다. 표범 우리의 철문이 열리면, 그 누구도 표범에 열광하지 못할 것이다. 공포에 질려 도망가기 바쁠 것이다. 단식광대의 철창처럼 표범의 감옥 또한 그를 군중과 격리시키고 하나의 ‘소비되는 욕망’으로 박제화 시킨다. 표범도 언제 단식 광대처럼 버려질지 모르는 운명이다. 결국 단식광대도, 표범도 박제된 광대, 욕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감옥 밖으로 나온 원숭이, 인간세계 안에 스스로를 가두다

 
이번에는 앞의 두 존재들과 달리 감옥에서 벗어나 출구를 찾은 한 수인(囚人)이 있다. 그는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감옥의 문을 열었으며, 스스로 만족할 만한 지위를 얻었다. 자유로운 그, 그는 다름 아닌 원숭이이다. 원숭이는 말한다. “저는 자유를 원치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의 출구만을 원했습니다. 그 출구가 하나의 착각일지라도 말입니다.” [각주:2]감옥에 갇힌 원숭이는 ‘출구’를 욕망했고 출구를 위해 원숭이이길 포기했다. 말하자면, 이 원숭이는 출구를 ‘학습한’ 셈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다른 길은 없었다고 말한다. 인간을 모방하고 인간세계로 편입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길이자 욕망인 것이다. 그는 악수를 배우고, 술을 마시고, 담배피우며, 심지어 인간의 언어로 말을 한다. 그래서 결국 그는 그가 원하던 대로 유럽인의 ‘평균 교양’에 도달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원숭이는 참 당돌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원숭이는 이러한 반응을 예측하기라도 했던 듯이, 자신의 노력에 대한 평가절하는 사양한다고 말한다. 다른 인간의 판단은 원치 않는다며 말이다. 원숭이 말대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했으며, 그만한 대가를 얻었다. 이것에 만족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착각일지도 모르는 자유지만 나는 행복하다, 만족한다. 원숭이는 그를 가두고 있던 작은 감옥 속에서 벗어나는 훌륭하게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는 작은 철창 보다 훨씬 거대하여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세계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꼴이 된다. 원숭이도 결국 단식광대나 표범처럼 갇힌 존재이다. 인간세계로 편입되고 싶은 욕망, 그것은 원숭이에게는 생존의 열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욕망을 모방한다. 인간세계의 욕망에 자신의 모든 욕망을 동일화 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모방이 그에게는 또 다른 하나의 ‘감옥’이다. 물론 그는 보이지 않는 감옥 속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그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사회의 욕망을 모방해야한다. 새로운 와인이 나오면, 그 와인의 이름을 외워야하고, 다른 유행이 오면 또 그 유행에 맞춰가기 급급해야한다. 이런 것들을 족쇄가 아닌 축복으로 여긴다면야 더 이상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개의 감옥들. 감옥에 갇힌 것이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혹은 그 안에서 행복하든 불행하든 간에 결국에는 ‘감옥’이다. 그 공간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동일한 속성을 지닌 곳이라는 얘기다. 단식광대와 표범의 욕망이 발현되는 지점은 판이하지만 갇힌 욕망이라는 동일한 성격을 지니듯, 원숭이의 자유로운(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 세계도 똑같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사람들에게 그는 특이한 원숭이, 구경거리의 대상일 뿐이다. 이렇듯 감옥, 철창은 욕망의 주체들을 소외시키고 한낱 ‘대상’으로 격하시킨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욕망을 소외시키는 주체, 시대와 사회를 언급할 수밖에 없어진다.

욕망과 시대라는 허상, 상상력의 곡선

시대는 욕망을 지배하고, 욕망은 또한 그 시대를 지배한다. 각 시대, 사회 마다 내세우는 특정한 가치들이 있다. 중세의 신, 조선시대의 유교 논리 등, 이러한 가치들은 그 시대 사람들의 욕망에 하나의 틀이 되어준다. 사람들은 그 틀을 따라 자신들의 욕망을 배출해낸다. 그런데 이 배출은 사실 진정한 욕망의 배설이라고 할 수 없다. 앞서 말했듯 배설되는 것은 각 개인들의 욕망이 아니다. 자신들의 욕망이라고 믿고 있지만, 단지 시대와 사회가 정해준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주체는 소외되고 그 자리에 욕망만 남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실 시대의 욕망이라는 것도 허상에 불구하다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욕망의 종류는 달라지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인간의 <정당해>와, 가진 건 돈뿐이야 하는 인간의 <에헴>과, 어때 나 이쁘지 하는 인간의 <흥>은 시간만 다를 뿐 같은 성질의 관념이야.”[각주:3]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현실’의 가치 관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욕망의 본질은 같다. 시대는 욕망의 종류를 정의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노선을 강요 한다. 그 노선은 어쩌면 시대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욕망의 본질을 구성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시 한 번 욕망의 탄생과 맞닿아 있다. 한 사회의 주류적 욕망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사회, 경제, 문화적인 다양한 요인이 관여한다. 그러나 어떠한 시대적 욕망이 탄생하던 간에 이 욕망이 굴러가는 힘은 간단하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바로 끊임없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것’. 단순화시키기에는 뭐하지만, 자신보다 좀 더 나은 존재를 부러워하고, 그만큼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사실 여기에서 ‘좀 더 나은 존재’라는 것도 단지 시대의 욕망에 조금 더 충실한 사람을 의미할 뿐이다.) 이것이 시대의 욕망을 작동시키는 원리이다. 이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계속되는 한 시대의 욕망은 그 커진 힘으로 자신과 배치되는 욕망들을 삼켜버린다. 이쯤 되면 “1년에 한 번씩 예수가 온다 한들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각주:4] 정도의 궁상스러움과 회의가 밀려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역사의 반복과 순환처럼, 시대의 욕망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불쌍한 존재의 한계일까?
  사실 허상을 깨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것이 허상임을 깨닫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그 허상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시대의 욕망에서 한 발짝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시대의 욕망이 허상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상상력. 당대의 욕망이 아닌 ‘그 너머’의 욕망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그래서 사실 갇혀있다는 것은, 욕망하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 자체가 금지되는 것, 새로운 것이 있다는,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상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차원에 있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이 진정으로 감옥이며, 보이지 않는 창살이다. 그러나 이렇듯 당대의 상상력이 아닌, 자신만의 상상력을 갖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시대의 욕망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허우적거리며 불행해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어제보다 한 번 더 자위하는 세상”[각주:5], 수인(囚人)의 자격

“기적이 그런 거라면, 하고 내가 말했다. 왜 이렇듯 다들 불행한 거죠? 그게 인간이야, 하며 요한은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팡이로 바다를 갈라 보여준다 한들 내일 아침이면 또 다른 기적을 원하는 게 인간이지. 끝없이 자위를 해야 하고 끝없이 손을 씻어야 하는 게 인간이야. 그리고 또, 자위를 너무 하면 몸에 해롭지 않나요 걱정하는 게 인간이지. 그러고 돌아서면 자위도 안하는 척, 하는 게 인간이야. 휴지는 휴지대로 진창 써놓고 뭐야 휴지가 떨어졌잖아, 하는 게 인간이라구.”[각주:6]
  저는 기적을 믿어요. 티 없이 맑은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저 어색한 미소로 작게 끄덕여줄 수밖에. 그렇다고 인간이란 원래 그런 거야,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이런 말에 완전히 동의할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긍정과 체념 사이를 곁눈질 하다가 어정쩡하게 경계선에 서있다. 그러기에 소설 속 원숭이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감히’ 감옥에 있는 것을 쉽게 조롱할 수는 없다. 또한 난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감옥에서 벗어나자고 말할 자신도 없다. 비난할 자격이 있는 자, 수인(囚人)이 아닌 자 그 누구일까. 우리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어떠한 방식과 형식으로든 ‘욕망이라는 감옥’의 죄수라는 것이다. 카프카가 감옥의 이미지를 반복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족쇄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카프카는 앞서 말했듯 국카스텐이다. 만화경은 자신이 보여준 현란한 무늬에 대해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단지 그가 보여주는 모양들이 그의 메시지이다.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각자가 조각들을 해석해보고, 그 모양에 이름붙일 뿐이다.
  이름붙이는 행위에 그 어떠한 ‘자격’이 필요한가. 굳이 말하자면 그 자격을 ‘수인(囚人)의 자격’이라고, 그러니 우리, 죄수들은 충분한 조건이 된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또한 죄수로서 자신이 갇혀있는 감옥에 대해 기꺼이 궁시렁거리는 것이 권리이자 의무라고도 해두고 싶다. 그것이 무기력감이든 상상력의 곡선이든, 그러나 죄수라는 한계가 있기에 너머가 있는 것이고, 너머가 있기에 또한 한계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철창 ‘너머’를 보는 것은 죄수의 본능이다. 본능은 긍정과 체념, 어떤 판단보다도 우선에 있는 것이다. 그 본능을 “어제보다 한 번 더 자위하는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 발휘할지는 각자의 욕망이다.


  1. 루쉰, 「준풍월담 후기」중 [본문으로]
  2. 카프카 전집,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p.267 [본문으로]
  3.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p.227 [본문으로]
  4.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221 [본문으로]
  5.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221 [본문으로]
  6.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22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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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카프카2010. 8. 3. 00:28

  실종자, 카알 로스만

정 철 현

실종자

 실종(失踪)자는 종적을 잃어 간 곳이나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자를 의미한다. 보통 어떤 사람이 실종되면 가족을 비롯한 주변사람들은 그를 애타게 찾을 것이다. 주로 불의의 사고에 의한 실종, 보통 이러한 실종은 그 사람이 죽었을 높은 가능성을 이야기해주고 있기 때문에 가족 및 주변 사람들은 그가 살아 돌아오길 간절히 바란다. 한편 일상에서 실종되었다는 말이 비유적으로 쓰일 때도 있다. 우리가 어떤 친구가 실종되었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 친구가 요즘 눈에 잘 띠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그 친구를 애타게 찾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친구에 대한 관심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실제 실종자에 대한 마음이 그러하듯 같다.

그 관심은 자신과 함께 생활해 오던 동료 혹은 가족의 부재에 대한 걱정과 염려일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와 함께 했던 생활의 일부분들에 대한 그리움, 다시 돌아와 함께 생활하면 좋겠다는 기대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는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함께 했었고, 그래서 그 누군가가 그를 찾고, 함께 하길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카프카의 『실종자』에는 이와 또 다른 실종자가 등장한다. 카알 로스만. 하지만 그에게는 실종자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다른 이들로부터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는 그가 어떻게 실종자일 수 있겠는가. 주로 우리가 실종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누군가가 어디로부터 실종되었다라고 말한다. 즉 그 사람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실종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카알은 실종자가 아니다. 그를 실종자라며 관심을 가지고 찾아줄 원래 그가 있었던 자리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그는 원래부터 실종자였다. 그가 있을 장소란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실종자, 카알 그리고 아메리카

 아메리카. 그곳은 카알에게 어떤 장소도 주지 않았다. 그 장소란 간단히 말해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놀고, 쉬고 하는 공동체를 말한다. 그는 그러한 공동체 안에 속해, 미국생활에 적응하고 싶었지만 그 곳으로부터 계속 미끄러지게 된다. 옥시덴탈 호텔에서, 외삼촌에게서, 그는 그 안에서 어떤 확실한 지위에 오르고 싶었지만 계속 이곳저곳 떠돌기만 한다. 이렇게 카알이 어느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떠돌아다는 것은 아메리카 탓이기도 하고 그가 지닌 상황자체의 모순 때문이기도 하다. 공동체 안에서 살고 싶은 카알의 바람, 그러나 그렇지 못한 아메리카 현실.

  그건 중요치 않아요, 우선은 대단치 않은 일을 맡게 될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부지런하고 세심하게 일하여 지위가 높아지도록 해야만 돼요. 좌우간 세상을 방황하고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어디엔가 정착하는 것이 당신에게 더 좋고 또 적합할 것 같군요. 내 생각엔 당신은 세상을 떠돌아다닐 체질도 아닌 것 같아요. 134p

  옥시덴탈 호텔의 여주방장은 떠돌아다닌다는 카알에게 호텔에서 일하면서 공동체 속에서 편히 살기를 권유한다. 여주방장은 카알에게 하찮은 일부터 시작하더라도, 열심히 일한다면 호텔 안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며, 그가 호텔 안에 들어와 일할 것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러한 여주방장의 말처럼, 옥시덴탈 호텔에서 어떤 확실한 지위에 오르기란 쉬운 것이 아니다. 이곳, 옥시덴탈 호텔은 아메리카라는 기계의 축소판이다. 그곳은 끊임없이 카알에게 호텔에 들어와 일할 것을 권유하면서도, 한편으로 호텔로부터 밀어낸다. 호텔에 들어와서 열심히 일하면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카알을 꼬신다. 하지만 그러한 꼬심에 넘어가 호텔을 욕망하는 카알은 다시금 호텔에 의해서 내쳐진다. 카알이 호텔 속에 일하기를 바라듯, 아메리카 속에서 일하길 바라는 사람들. 하지만 아메리카는 거대한 기계. 그 기계는 많은 작업량으로 고장이 잦다. 계속 해서 부품을 교체해주어야 한다. 그 부품은 바로 기계 주위를 배회하는 카알 같은 산업예비군들인 것이다.

  카알이 자주 놀란 것은 그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도 다른 동료들은 현재 자신의 지위에 완전히 만족하여 그것이 일시적인 직업임을-이십 세 이상의 엘리베이터 보이는 고용하지 않았다-전혀 느끼지 못했고 또 장래에는 다른 직업을 결정할 필요성도 깨닫지 못한 채, 침대에서 침대로 전해지고 있는 더러운 누더기에 쌓인 탐정소설 외에는 아무것도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158p

  아메리카라는 기계, 그것은 카알이 자신을 욕망하게 만들지만, 카알이 그 곳에 들어갈 자리는 마련해주지 않는다. 아니면 잠시 사용했다가, 철저한 규율 하에 다른 부속품으로 대체된다. 철저한 규율 하에 그는 엘리베이터 보이에서 해고되었고, 다른 일자리를 구하러 오클라하마로 간다. 다른 종류의 부품이 되려고 말이다. 이럴 줄 알았을까? 그는 엘리베이터보이를 할 때도, 혹시 모를 훗날을 위해 열심히 상업교본 공부한다.

  또한 카알은 자신 안에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외면적으로, 혹은 거짓으로 그 집단에 수용된 것이며, 그 자신도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믿으며 살아간다. 항상 그가 꿈에 그리고 상상하던 모습대로 될 것이라면서 말이다. 어찌됐든 바로 아메리카 시민이 되는 것이 바로 눈앞에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눈앞의 모습은 거짓된 유리를 통해서 본 착시현상에 불과할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카알이라는 개인 안의 모순이 드러나게 된다. 그 사회에서 받아들어졌다고 착각하는 카알, 그러나 그럴 리가 만무한 현실. 현실과 배치되는 카알 자신의 상상은 그가 바라는 자아의 모습일 것이다. 그가 여러 공동체를 떠돌아다니며 꿈꿔왔던 자기상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것은 카알 자신의 존재이유였고, 그것은 그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다. 이러한 그의 모순적 상황에서 ‘실존적 실종’을 볼 수 있다. 그는 현실 속에서 자아의 상을 계속 해서 잃어나간다.
아메리카라는 거대한 기계는 카알을 원래부터 실종자이게 했다. 그가 머무를 곳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가 미국에 발을 들인 순간 그는 실종자가 되었다. 그리고 카알 자신 안의 모순은 그를 영원히 실종자이게 한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실종자이다.

 
카알의 존재이유, 아메리카

 그들은 이틀 밤낮 기차를 탔다.…………첫째날에 그들은 높은 산악지대를 가로질러갔다. 푸른 기가 도는 검은 암석덩이들이 뾰족한 쐐기 모양을 하고 기차 쪽으로 다가왔다. ……계곡 물의 찬 기운 때문에 얼굴이 덜덜 떨릴 정도로 계곡이 가까이 있었다. 330p

  카알이 브루넬다의 집에서 나와 오클라하마의 대형극장에 채용되어, 그곳으로 떠나는 마지막 장면이다. 이 마지막 장면에는 새로운 기대감과 앞으로 겪게 될 고단함이 느껴진다. 카알은 아메리카에서 살아가기 위해, 고단한 먼 길을 꿋꿋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연이지만 이 소설의 결말이 나지 않은 채로, 카알이 어딘가로 또 다른 새로운 일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그는 멈추지 않고, 그의 새로운 아메리카에서, 아메리카를 위해, 설사 그것이 자신을 밀어낸다 할지라도 아메리카의 당당한 시민이 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끝은 어딜런지.

 
그래서 더욱 더 비참한

 카알이 행동하는 주저없고, 경쾌한 움직임은 더욱더 비참함을 가미시킨다. 그는 독일 집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올 때에도, 외삼촌에게 절연의 편지를 마주할 때도, 옥시덴탈 호텔에서 해고당할 때도 어떤 우울함이나 좌절감을 갖지 않는다. 그는 단지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씩씩하게 나아간다. 그것은 그 당시 아메리카의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일자리는 구하기 쉽다. 언제나 누군가 타라는 차를 타면 그곳에 가서 일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야콥 운송회사에서 일할 노동자 모집’의 글귀가 붙은 차를 타거나, 오클라하마의 극장 직원 채용공고를 보고 그곳으로 달려가면 일할 수 있다. 그러나 옥시덴탈에서 해고되듯이 쉽게 해고되고 다른 일자리를 찾고, 그런 식의 무한한 반복. 그래서 좌절하는 것은 그 상황에 맞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카알에게 필요했던 것?

  정의의 문제가 중요한 것같이 보이지만, 동시에 규율의 문제도 중요하지. 40p

  카알은 아메리카에서 적응하기 위해 꿋꿋이 살아가지만 고독하고 외로웠다. 오직 규율만이 지배하는 그 곳은 그의 목을 옭아맨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하건, 그가 얼마나 착하고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던 항상 규율만이 그를 평가한다. 계속 그랬다. 규율이 그를 자꾸만 밀어냈다. 독일서 미국으로 쫓겨났을 때에도 그는 하인을 임신시킨 죄로, 외삼촌과 절연하게 된 계기도 그 대단한 외삼촌의 규율과 원칙을 어긴 일로, 옥시덴탈에서 해고당했을 때도 엘리베이터 보이 규칙을 어긴 일로, 그는 평가받았고, 그 모든 곳에서 쫓겨났다. 모두 규율이 그를 평가하고 속박하고, 결국 내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삭막함 속에서 그가 원하는 것은 따뜻한 온정이었을까?

  너는 저 화부에게 홀린 것 같구나.” “너는 외로움을 느꼈을 테지. 그때 화부를 만났고, 지금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려는 것이지.”42p

침대에 앉아서 깜짝 놀라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을 잠옷 차림의 사랑하는 외삼촌을 놀라게 하고 싶었다. 어쩌면 이 사실 자체로는 대단한 일이 못되기는 하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까지 잘 생각해보아야했다. 아마 그는 처음으로 외삼촌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아침 식사를 계속하게 되면 지금까지 하루에 단 한 번 하는 것보다 더 자주 자리를 함께 하게 될 것이고, 물론 그러면 서로 솔직하게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69p

  그는 단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원했다. 그는 외삼촌에게서도 금전적인 것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그와의 솔직한 대화를 원했다. 그가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는 옥시덴탈 호텔에서 그런 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과 만난다. 여주방장과 테레제는 그에게 있어서 소중한 친구이자 어머니 같이 포근한 존재였다. 하지만 어머니와 같은 포근한 존재는 아버지로 대변되는 엄격함과 규율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시켜준다. 이런 의미에서 어머니와 같은 포근함은 그가 영원한 실종자가 되는데 기여하지 않을까?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어머니에게 치유받고, 또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치유되고....

 
카알의 마지막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 건

 카알이 오클라하마로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나고 『실종자』는 끝이 나는데, 그가 너무 경쾌하게 나아가서 일까? 물론 그 경쾌함 속에 외로움과 두려움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 뒷모습이 무언가 미묘한 여운을 준다. 또한 그가 아메리카에 처음 와서 외삼촌 집에 피아노를 쳤던 행위가 그의 마지막 모습과 겹쳐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카알이 소음으로 가득한 하늘을 향해 열린 창 앞에서 고향의 옛 군가를 연주할 때면 그것은 참으로 기묘하게 울렸다. ……그러나 군가를 연주한 후 카알은 거리를 내려다보았는데, 그 모습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그것은 순환 속에 작용하는 모든 힘을 알지 못하고는 우리가 그 자체를 정지시킬 수 없는 거대한 순환의 한 조그마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50P

  그는 자주 발코니에 우두커니 서서 길을 잃은 양처럼 거리를 내려다본다. 물론 이것을 삼촌이 불쾌하게 생각해서 그만 두었지만 카알은 이를 매우 즐겼다. 뉴욕의 바쁜 하루를 멍하니 바라보는 것을 말이다. 언젠가 그는 이 뉴욕 거리를 향해, 그 분주함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가득 찬 하늘을 향해 고향의 옛군가를 연주한다. 무언가 변화되길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 거리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것은 정지시킬 수 없는 거대한 아메리카다. 그래서 외삼촌이 말하지 않았던가. 우두커니 그것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한다고. 물론 카알은 뉴욕의 거대한 순환 고리 속으로 들어갔지만, 그가 열린 창 앞에서 연주했던 고향의 옛 군가는 그의 마지막 뒷모습에서 은근히 들려온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카프카2010. 8. 2. 18:46

~자립과 권력~

                                                 

l         코도화 된 권력

이제 안전하지 않겠냐?” 라고 말하고 있는 우리에게 호령이 떨어진다. “ 모두들 밖에 나가서 줄을 서라!” 나는 호령이 죽음의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숨을 죽이고 뒷문에서 혼자 도망간다. 멀리서부터 전차가 오는 것이 보인다. 여기는 수용소다. 총을 가진 군인들이 사람들을 재촉하고 있다. 건물에서 나온 사람들은 수용소에서 착용해야 제복을 입고 줄로 서도록 재촉 당하고 있다. 파수꾼도 지금부터 시작되는 공격을 보려고 히쭉거리면서 자기 일을 잊고 있다. 지금밖에 도망갈 기회는 없다! 나는 오직 혼자, 어떻게든 자리에서 달아난다. 뒤에서 총소리가 울리고 있다….

초등학교 입학에서 10대가 끝날 때까지, 나는 자주 같은 주제의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무서운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무리는 나를 죽이려고 하고, 나는 때로는 숨고, 때로는 뛰면서 항상 겨우 살아남았다. 가끔은 편도 있었지만, 나는 항상 혼자 살아남곤 했다. 보통 위험에서 벗어난 순간에 눈을 떴지만, 심장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크게 고동을 쳤고, 땀이 흐르며 몸이 굳어져 있는 것을 느꼈다. 꿈속에서 나는 종종 나치에 쫓기기도 했다.

나의 부모님은 사회운동을 하는 분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재일조선인이 일본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를 자주 얘기하곤 하셨다. 가끔 재일조선인에 대한 폭언이나 폭력사건이 일어났으면 나에게 전해 주셨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서움에 떨곤 했다. 일본이름이 없이 한국이름으로 사는 나는재일조선인이라는 것을 한눈에 있는 존재였고, 그것을 무서워했다. 어느 TV에서 나치에 대한 다큐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나에게 강하게 따가왔다. 광폭한 나치의 돌격대, 열광하는 독일의보통사람들, 수용소에서 펼쳐지는 학대와 살인…. 그것을 보면서 전쟁중에 일어난 일본 광동대지진이 떠올랐다. 당시 치안유지를 위해 군부가 퍼뜨린재일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던지고 있다 소문 때문에 많은 재일조선인이 학살됐다. 조선인 사냥 선두의 사람은, 군부와 일본 민중으로 만들어진 자경대였다. 자신의 주체 없어진 민중이야 말로 가장 무서웠다. “ 전쟁이 일어날 거야. 만약에 그렇게 되면 우리 가족이 먼저 죽임을 당할 거야! 어떻게 도망갈 있을까?” 머릿속에서 필사적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런 나에게 ‘권력’이라는 것이 오랫동안 큰 협위이자 테마였다. 그런데 당시의 나에게 ‘권력’이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나의 일상과는 전혀 먼 곳에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왕이나 경찰, 혹은 역사에 등장하는 나쁜 통치자들이 나의 권력의 상징이었는데, 그들은 나와 동떨어진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의 일상이라고 하면, 마치 안개가 낀 듯이 희미했다. ‘인권’이나 ‘자유’, ‘평등’이라는 말을, 혹은 ‘권력’ 이나 ‘폭력’, ‘부정’이라는 말은 잘 들었다. 나는 그 단어들에 고도화되어 기계적으로 분노했다. 나는 ‘때가 오면’ 언제든지 정의를 위해 권력과 싸울 수 있고, 또한 권력에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나에게 ‘폭력’이란 무엇이었을까. ‘폭력’은 확실히 있었다. 그것도 바로 나의 눈앞에. 그러나 신기하게도 일상에서 벌어지는 개인간의 폭력을 ‘폭력’으로써 인식하지는 않았다. 일상의 일은 ‘다른’이야기였다. 나에게 권력이나 정의는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완전히 코드화되어있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가 부당하다고 지정한 것, 정의라고 외친 것에 불가했다. 역설적이지만, 나에게 있어서 이른바 ‘권력’ 에 저항한다는 것이 점점 다른 사람이 외친 ‘정의’의 범위안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게 되어갔다.

 

l         권력이란 무엇인가? 카프카의 <소송>

일상속의 권력...카프카의 <소송> 은 한 명의 평범한 은행원이 재판에 말려들게 되는 모습을 그리면서 권력에 대한 하나의 시점을 보여준다. 주인공 K는 어느 날 갑자기 감시인에게 체포되었으며, 자신에 대한 소송이 시작되었다고 듣는다. 이 체포는 K 에게 전혀 영운을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감시인은 어쨌든 “상급기관에서..자세한 정보를 입수한(P14)” 뒤에 결정된 “틀림없는 체포(P14)라고 한다. 여기서 감시인은 스스로 판단해서 K를 체포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법률, 즉 어떤 매뉴얼에 따라 권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자기의 신분증명서를 제시하면서 무죄를 주장하는 K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말단 직원이라서 신분증명서 같은 것은 제대로 줄도 모르고 당신 문제에 대해서는 그저 매일 시간씩 당신을 지키면서 보수나 받을 뿐입니다(P14) .”민주주의 국가는 국민이 골라낸 의원이 법률을 통해 통치하는 사회다. 거기에서는 더 이상 ‘왕’ 은 없다. 대신, 법률이라는 매뉴얼이 우리를 끊임없이 통제하고 있다. 법률에는 우리가 하면 안 되는 것과 해도 되는 것, 그리고 해야만 하는 것이 적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안 지킨 사람들에게는 형이 내려진다. 현재, 우리에게는 자신의 행동이 ‘죄’ 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그것은 법률이라는 이름의 권력에게 빼앗겨 버렸다. 우리는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끊임없이 ‘매뉴얼’ 에 비취어 봐야만 한다. 매뉴얼을 지시하는 것은 이제 법률뿐만이 아니다. 시험의 해답, 드라마나 광고들은 우리의 행동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제시한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있어야만 하는 모습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된다. 항상 답이 제시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자기의 판단이 아닌, 내가 책임을 져서 한 것이 아닌 행동만 하다보니까, 이제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 판단하기가 무섭다는 것. 이제 무엇이 맛있는지, 무엇이 행복인지, 무엇이 위험한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대신 말해주지 않으면 너무나도 불안해진다는 것을. 그것이야말로 지금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 아닐까. <소송> 에는 권력에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빼앗긴 사람들의 모습이 잔혹하게 그려진다. 법률을 어기고 소송을 받게 된 사람들은 모두 불안 때문에 정신이 팔려버린다. 그들은 변호사에게 자신의 행운을 맡기지만, 불안은 줄어들기는 커녕 더 한층 비참한 처지가 된다. K처럼 소송을 하게 된 블로크는 그 처지를 나타내고 있다.

― “어제 말인데” 변호사가 말했다. “내 친구인 제3 판사에게 갔었는데 화제가 점차 자네 문제로 돌아간 거야.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알고 싶은가? ” “아, 제발 말씀해주세요.” 변호사가 얼른 대답하지 않자 블로크는 다시 간청을 하고 무릎이라도 꿇듯이 몸을 구부렸다…… K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K는 놀라 이 혼란스러운 인간을 그저 멍하니 응시할 뿐이었다…그러 하여금 이리저리 몰리게 하고 친구와 적을 구별 못하게 만든 것은 소송 때문일까?..... “남에게 신경 쓰지 말게.” 변호사가 말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나 하게.” “그렇습니다.” 블로크는 자기 스스로를 격려라도 하듯 이렇게 말하고 슬쩍 곁눈질해 보면서 바짝 침대 곁에 가서 무릎을 끓고 앉았다. “변호사님 저는 무릎을 끓었습니다.” 그가 말했다……(변호사) “…(블로크는) 쉬지 않고 (서류를) 읽었나?” “거의 쉬지 않았어요.” 레니가 대답했다. “단지 한 번만 마실 물을 청했었지요, 그래서 통풍창으로 한 잔 주었지요. 여덟 시에 그를 나오라고 해서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블로크는 지금 자기에 대한 칭찬이 얘기되고 있으니 잘 들어두라는 듯이 K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이제 꽤 희망을 가진 듯 보다 자유럽게 움직이면서 무릎을 꿇은 채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변호사의 다음 말에 그의 겁에 질린 표정이 더욱 역력했다. “넌 그를 칭찬하지만” 변호사가 말했다. “바로 그게 나로 하여금 말하기 곤란하게 만드는 거야. 판사는 블로크 자신에 대해서나 그의 소송에 대해서나 유리하게 말한 적이 없어. (P205~210)

여기서 블로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블록은 이상 자신의 통제하에 있지 않다. 그의 몸은 이제 완전히 권력의 힘아래 있으며, 그에게 속하지 않는다.

 

l         사람은 양떼와는 다르다

산다는 것은 선택을 스스로가 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선택하는 것과 책임을 지는 것은 항상 같이 간다. 전술한대로 현재 사람들은 자기가 판단하는 , 자기가 책임을 지는 것을 무서워한다. 그것은산다 것을 무서워하고 있다고 말할 없을까. 판단은 권력이 한다. 그리고 권력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자기의 재판의 핵심에 있는 사람을 만나려고 해도 만났던 K처럼, 우리는 중앙에서 전체 권력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을 수가 없다. 책임의 부재. 이것이 민주주의 사회 아래서의 권력의 특징이다. “ 같군.” 이렇게 외치면서 K 마지막에 순간에서도 권력의 책임의 부재를 목격한다.

―한 남자가 프록코트를 열더니 조끼에 꼭 끼게 맨 혁대에 달린 칼집에서 양쪽으로 날이 선 길고 얄팍한 푸줏간 칼을 꺼내 높이 쳐들어 날을 달빛에 비춰보았다. 또다시 불쾌한 인사치레 말이 시작되었다. 한 사람이 K 너머로 다른 사람에게 칼을 넘겨주더니, 그 다른 사람은 다시 K 너머로 그 칼을 되돌려주었다. K는 자기 위로 손에서 손으로 오가는 칼을 스스로 잡아 자기를 찌르는 것이 자기의 의무일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아직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목을 돌려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는 스스로를 완전히 입증해 보일 수도 없었고, 당국으로부터 모든 일을 제거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마지막 과오에 대한 책임은 그런 행동에 필요한 힘의 여분을 포기한 자가 겨야 할 것이다. (P246)

 

전에 나에게는 권력은 아주 먼 곳에 있었다. 그리고 세계에는 ‘나쁜 권력’ 관 ‘그 피해자’ 밖에 없었다. 그 정이은 맞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자신의 판단을 포기하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맡겨 버리는 한, 나에게 권력이 작동된다. 그런 의미로 일상에서 매 순간 마주치는 선택의 순간이야말로 내가 관여하고 있는 권력의 장이다.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나는 약자이기 전에 한 명의 인간이었다. 권력에게 선택을 맡기는 그 순간에도, 선택하고, 행동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인도의 혁명가, 비노바바베는 권력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모든 일에서 정부의 도움에 의지하는 , 그리고 마치 정부가 신이기라도 끊임없이 호소해 대는 , 세계는 정부라는 짐으로부터 해방될 없을 것이다.

사람은 양떼와는 다르다. 당신들 스스로가 자기 일을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나에 대한 통제권을 갖는 일, 이것에서부터 혁명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루쉰2010. 8. 2. 00:13
**서울신문에 게재한 원고입니다.

[고전 톡톡 다시 읽기] <18> 루쉰 ‘아Q정전’

아큐는 곧 우리네 모습

중국 근대 문학가 루쉰(迅)은 ‘아Q정전’을 일간지 ‘천바오’(晨報)에 1921년 12월4일부터 1922년 2월12일까지 주 1회 또는 격주로 연재했다. 첫 편이 발표된 직후부터 많은 사람들이 다음엔 자기가 당하는 차례가 아닐까, 하고 전전긍긍했다. 아큐에 대한 이야기가 자신에 대한 빈정거림이라고 생각하고선 신문 기고자들을 닥치는 대로 아큐의 작가라고 의심했다고 한다. 루쉰이 작자임이 밝혀진 이후에는 아큐 이야기가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다니는 사람 또한 많았다. 아큐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했다. 날품팔이꾼 아큐는 이름, 고향도 알려진 바 없으며 일정한 직업도 없다. 뭐 하나 똑부러지게 해내는 것도 없다. 몰골도 형편없다. 그런데 이 볼품없는 사내, 자존심만은 강하다.

▲ 1935년 판화가 리화가 그린 작품 ‘중국이여 절규하라’.

●아큐의 정신승리법


문제
는 자존심이 특정한 장소와 시점에서 발현된다는 것이다. 그의 자존심은 강자 앞에서는 자취를 감춘다. 강자 앞에서 무력하다. 모욕을 당해도 자존심을 쉽게 드러내지 못한다. 싸울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노와 치욕만은 어쩔 수 없다. 이런 욕망의 배출구를 찾아야 한다. 어디에서? 그는 자신보다 더 약한 자들에게서 이를 찾는다. 가령 노예도 폭군이 될 수 있다. 그에게 자식과 부인이 있는 한에서 말이다. 그렇지만 아큐는 마을에서 가장 무력한 부류에 속하며 가족조차 없다. 따라서 자신보다 약한 자를 쉽게 찾을 수 없다. 대략난감한 상황이다. 이 때는 스스로를 공격한다.

“그는 곧 패배를 승리로 전환시켰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힘껏 자기 뺨을 두세 차례 연거푸 때렸다. 얼얼하게 아팠다. 때린 후에 그는 마음이 평안해지기 시작했는데, 마치 때린 것같이 몹시 만족하여 의기양양 드러누웠다. 그는 푹 잠들었다.”

스스로를 때리면서, 때린 ‘나’와 맞는 ‘나’로 나를 분리한다. 그리고 때린 ‘나’를 기억하고, 맞았던 ‘나’를 망각한다. 이때 분노와 굴욕감은 다른 곳으로 향한다. 자신은 폭력을 당한 존재가 아니라 행사한 존재라는 환상을 통해. 아큐는 자신이 당한 분노와 굴욕감을 자각하지 않는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존재이며, 이런 고양감 속에서 분노와 굴욕감을 소멸시켰기 때문이다.

아큐는 말한다. 자신도 주인이라고. 그러므로 아큐는 늘 즐거울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놓인 상황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만족한다. 루쉰은 이를 ‘정신승리법’이라고 부른다. 결국 바뀌는 것은 없다. 아큐는 단 한 번도 ‘패배’를 경험하지 못한다.


●즐거운 환상 vs 썰렁한 일상


우리는 자신이 부정될 때 존재의 변신을 꾀한다. 그러나 아큐는 이런 체험의 현장으로 뛰어들지 않는다. 루쉰이 아큐를 노예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예들은 본능적으로 자기 해체를 거부한다. 이들은 오직 눈앞의 환상만을 붙잡으려 할 뿐, 패배라는 쓰디쓴 일상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 괴로움이나 불안과 대면한다. 이 불안과 괴로움을 통해 나를 구성하는 표면인 습속에 대해 회의하게 된다. 이 때야말로 무엇인가를 배우게 된다. 즉 습속을 날카롭게 재단하는 힘, 그리고 습속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이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그럼에도 자유를 향한 절연(絶緣)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노예는 정해진 길로 가길 원하지 낯선 길로 향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결국 이들은 습속을 거부하지 못하며 자유 또한 체험하지 못한다. 아니 노예들은 습속과 억압을 욕망하지 자유를 욕망하지 않는다. 이들은 한사코 자유를 거부한다. 루쉰은 ‘허(虛)를 실(實)로 오판’한 것에서 환멸의 비애가 생겨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 환멸 앞에서 몸을 돌려 단단해 보이는 것으로 되돌아간다.

가령 아큐는 패배에 직면할 때, 환멸의 비애를 다른 환상으로 치환한다. 그러나 단단해 보여도, 즐거워 보여도 ‘허’(虛)는 ‘허’(虛)다. 아큐가 계속 미끄러져 간 것도, 이 환멸의 비애를 애써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는 환상 이후에 오는 실재의 삶, 즉 썰렁한 일상을 견디지 못했다. 아니 견디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썰렁한 일상은 회피된다. 아큐는 애써 밝은 빛 속에 있다고 자위하지만 그가 있는 곳은 자신이 서 있는 곳조차 알 수 없는 깊은 어둠, 무명의 세계다.


●행인-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자!

 
그런데 루쉰은 이런 아큐의 어둠을 지켜볼 뿐 대안을 쉽게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아큐의 욕망을 그대로 보여줄 뿐이었다. 사실 사람들은 허위와 환멸을 붙잡고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허(虛)한 세계는 아큐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 우리 자신의 무명(無明)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한 우리 역시 아큐다. 무상함, 그리고 어둠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할 때 우리는 겸허해진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황량한 일상을 환상 없이 만날 수 있다. 

루쉰은 사람들이 이런 허위나 환상, 명분에 걸려서 넘어지지 않기를 희망했다. 왜냐하면 자기를 기만하지 않는 인간만이 황량하고 썰렁한 일상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허(虛)가 삶의 조건임을 인정하는 이들은 자신이 별로 의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삶의 무상함과 가변성을 알고 있기에 조심스럽게 상황에 한 발을 앞으로 내민다.

따라서 자신이 별로 의지가 되지 않음을 아는 사람들이야말로 도리어 계속 길을 걸어 갈 수 있다. 자신에 대한 환상이 없기 때문에 한 발 한 발 내딛게 된다.

썰렁한 일상 속, 그 길이 보이지 않은 삶 속에서라도 빛을 찾아내면 된다. 칠흑 같은 어둠이라 해서 빛이 없는 게 아니다. “희미한 빛, 어두컴컴한 빛, 편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어둠, 아주 캄캄한 어둠” 처럼 어둠 속에서도 빛은 존재한다. 빛과 어둠이라는 말의 환상에 빠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최진호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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