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루쉰2010. 8. 19. 02:59

2NE곰  루쉰 소설집 『방황』

루쉰, 오 마이 라이팅!(Oh, my 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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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골 서늘한 일상의 ‘침공’

  한 작가가 ‘행복한 가정’이라는 주제로 소설을 쓴다. 그 소설에는 매우 세련된 부부 한 쌍이 등장한다. 작가는 고상하고 우아한 주인공들의 삶을 하나하나 구상해본다. 그런데 소설 구상이 쉽지만은 않다. 안타깝게도 그의 구상은 단지 상상, 가정뿐이기 때문이다. 그가 쓰고자 했던 행복한 가정은 처음부터 ‘가정’에서 시작된다.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도시 조차 정할 수 없다. 그저 A시이다. 당시 중국의 도시 중에서는 ‘현실적’으로 작가가 구상하는 행복한 가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은 한 번도 읽지 않은 책이지만, 교수들이 좋게 평가했다는 이유만으로 주인공들에게 『이상적인 남편』을 읽히고, 진귀한 요리를 먹게 한다. "My dear, please." 느끼한 영어로 서로에게 뱀장어를 권하는 부부라니.
  소설은 어찌어찌 진행된다고 해도 더 큰 문제가 그를 괴롭힌다. 그것은 바로 소설 속 행복한 가정과는 정반대인 그의 일상, 현실이다. 소설을 구상해나가면서 일상의 언어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장작 스물다섯 근, 오오는 이십오. 떨어진 장작을 사는 일이 그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돈다. 그러나 일상이 글 속으로 ‘침투’하려 할수록, 오히려 소설은 작가의 일상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즉, 그는 그의 일상을 하나하나 지워나가며 글을 구상해나가는 것이다. 그는 그의 일상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가령 책장 옆 배추더미라든지, 늘 열려있는 서재 문과는 정반대의 ‘행복한’ 세계를 소설 속에서 구현해낸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침투는 ‘침공’으로 바뀌어 그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그는 자신이 쓰려는 ‘행복한 가정’과 배치되는 자신의 현실을 마주 할 때마다, 허리에 바늘이 박히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 스릴러 영화에 나오는 살인마처럼 일상은 그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아내가 아이를 때리는 ‘찰싹’소리,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를 현실세계로 돌아오게 만든다. 결국 그는 자신의 현실과 소설 사이의 괴리를 참지 못하고 원고지를 찢어버리고는 그것으로 아이의 눈물과 콧물을 닦아 준다.

현실은 시궁창, 글쓰기 그리고 루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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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보면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손으로는 젖과 꿀이 흐르고 무지개가 뜨는 낙원을 그릴 때가 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러하다. 내 손으로 쳐내려간 활자들이지만, 나의 일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러려니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가끔은 짜증이 밀려오기도 한다. 영어발음 굴려가며 맛있게 먹을 뱀장어를 집어 올렸는데, 뭣도 아닌 현실이 내 허리를 콕콕 찌르고, 순간 놀라 뱀장어를 떨어뜨린다. 떨어진 뱀장어가 능글맞게 웃으며, 네 현실이나 돌아보라 한다. 내가 그려내는 글 속의 세계는 위풍당당하게 미래와 희망을 이야기하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뚜벅 뚜벅 나아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의 일상은 여전히 글과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사실 글과는 달리 나는 전혀 나아가고 있지 못하며, 그렇다고 희망적이 되고 싶은지 그 조차도 잘 모르겠다. 내 글 속에는 희망으로 향하는 너무나 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들이 등장하지만, 정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은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차라리 글을 쓰지 않는다면 좀 더 마음이 편해질까? 더 이상 그 평행선, 뱀장어의 비웃는 얼굴을 떠올릴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루쉰의 소설, 잡문을 읽다보면, 현실 속 자신과 그의 글 사이에서 고민하는 루쉰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는 변화와 희망을 얘기하지만, 동시에 누구보다도 회의하고 절망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그런 그의 글을 “가면 속 외침”이라고 한다. 나는 나의 또 다른 글에서 루쉰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괴리, 모순을 직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의 인생을 직시한다는 것, 그 비참함을 안고 한 시대를 살아낸 ‘인간 루쉰’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내가 루쉰을 이렇게 받아들여 글을 쓰는 것과 나의 일상 사이에는 무엇이 놓여 있는 것인가. 루쉰을 위대하다고 ‘쓰는 나’는 오히려 루쉰을 쓰는 행위를 통해서 그를 밀어냈던 것은 아닐까. 루쉰이라는 화살이 내 일상, 현실에 닿지 못하도록 글을 방패삼아 막아내며 말이다.
  소설「행복한 가정」속에서 원고를 찢어버린 작가의 눈앞에 “여섯 포기의 배추더미”가 우뚝 서있다. 루쉰이 직시했던 것은 바로 이 우뚝 서있는(아마 우뚝 서있어 피할 수 없는) 일상이었을 것이다. 오, 마이 루쉰. 오, 마이 라이팅! 아직은 나지막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언젠가 나 또한 원고지를 구겨버리고 ‘무언가’를 마주해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미 그 배추더미의 실체를 어느 정도 마주해버렸다. 시궁창인 현실과 쉽게 바뀌지 않는 시궁창의 그 끈질긴 관성. 지금 이 순간에도 무의식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타이핑했다 지우고를 반복하는 나의 글, 나의 현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시궁창의 관성에 지배당하기 전에 희망찬 ‘그럼에도’가 아닌 ‘오, 마이’의 절규로 끝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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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루쉰2010. 8. 10. 14:07

납함에 있는 소설 속 주인공들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인물은 아큐이다.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그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큐는 이런 사람이구나 하다가도 갑자기 방향을 틀어 전혀 다른 행동이 나타난다. 혹은 아예 그의 생각을 읽어버릴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아큐는 자신의 부스럼을 놀리는 동네 건달들에게 몇 번 덤볐다가 항상 벽에 머리를 짓찧게 된다. 그래도 절대로 자신의 부스럼에 대한 놀림을 넘기지는 않는다. 아큐를 일반적인 바보나 맹추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몇 번 호되게 당한이후로 놀림을 받아도 그저 속으로 분해할 뿐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맞는 것이 두려우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건달들에게 힘이 통하지 않자 매섭게 째려보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대단한 자존심이다. 이랬던 그가 얼마 안가서 건달들에게 머리채를 잡히자 자신은 벌레라며 빨리 놓으라고 한다. 그 대단한 자존심이라면 오히려 머리채가 뜯겨져 나가도 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네가 어떻게 나의 친척일 수가 있냐고 화를 내며 따귀를 때리는 짜오 나으리 앞에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것은 그가 당한 폭력의 수준 차이 때문인 것일까?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 맞는 것이 더 아프고, 덜 아프고를 떠나서 맞는 것 자체를 싫어할 텐데 아큐는 폭력을 자처하고 있다. 매에 맞기 전에 변명을 하기보다 매에 맞고 난 후 변명을 하는 것이 그다. 그리곤 후련해 한다. 한 대 맞은 것으로 일이 일단락되었으니 말이다. 보통 맞고 나면 더 반항심이나 울분이 생기는데 후련해 하다니. 자존심이 강한 아큐라면 오히려 가슴속에 남들보다 큰 앙갚음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크기가 남들보다 큰지 작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나름의 울분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그는 이런 울분을 가끔 정신적 승리법으로 푼다. 자식이 애비를 때리는 거라는 생각도 하고 이 생각이 먹히지 않을 정도로 울분이 심한 날은 제 손으로 제 얼굴을 세게 몇 번 때린다. 맞은 것은 ‘나’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누군가를 때렸다는 것으로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그의 생각이나 기분을 읽어내려 했던 내 시도는 철저히 무너진다. 이런 정신적 승리법을 만들어 낸 그의 사고를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다. 짜오 나으리나 가짜 양반, 미장 사람들이 아큐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그를 마을의 하찮은 녀석, 어중이떠중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고 평소에도 그의 존재를 크게 인식하고 있지 않다. 소설 속 그의 행적을 봤을 때 충분히 독특한 사람임에도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큐정전>의 서문만 봐도 그렇다. 작가가 그에 대해 확신하고 있는 것은 ‘아’자 하나뿐, 아무런 정보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 그는 너무나 복잡한 사람이다. 혁명당원의 목이 댕강 잘리는 것을 보고서도 ‘혁명이란 것도 괜찮구나’라고 생각하는 그의 사고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혁명을 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들, 예를 들면 짜오 나으리네 가구나 재산들과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녀석들에 대한 복수가 그를 유쾌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 때문에 그가 혁명에 가담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거인 나으리의 두려움, 미장 사람들의 두려운 눈빛이 그를 신명나게 했다. 마을의 존경받는 어르신조차도 두려워하는 혁명과 반란에 마을사람들도 덩달아 두려워 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아큐는 혁명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는데도 변발을 위로 올리고 ‘반란이다!’를 크게 외치고 다닌다. 그가 멍청하고 상황파악 능력이 모자라서 그랬을까? 아무리 그렇다하더라도 사람들의 두려운 눈빛이 그에게 주는 유쾌함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바보면 다 혁명하는 자인가.

                                                                                                                                   <왜 영구가 떠오르는 걸까...?>



아큐가 종잡을 수 없는 생각과 성격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있다. 그는 그 스스로가 너무 잘났다. 이는 그의 자존심이 세다는 말인 동시에 남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게다가 들을 마음도 없어 보인다. 무인도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사람처럼 아큐는 그의 기분이나 감정, 이것들의 해소와 자신이 보고 듣는 모든 것에 대한 해석들을 스스로 해결한다. 위에서도 말하지 않았는가. 정신적 승리법이나 혁명에 대해 느끼는 신명 등. 그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그를 위해 충고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아큐에게 무게감 있게 살아가라고 충고해준다. 아큐의 반응은? 귓등으로 듣지도 않고 자신에게 충고를 해준 그 사람을 욕할 것이다. 아니면 귀를 한번 후비고는 멍한 표정으로 자리를 뜰 것이다. 아큐는 남의 말에 휘둘릴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돈이 없어 며칠을 굶고, 옷이나 집이 없어도 충분히 살아간다.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그는 그만큼 강하다. 여기서 강하다는 것은 의지가 굳거나 생활력이 강하다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어떤 표현을 써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삶에 단단히 붙어있다는 느낌이랄까. 이런 강함.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강함. 그만큼 그는 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일 테다. 여기서부터 아큐에 대한 이해, <아큐정전>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지 않을까.


Posted by masoume
History/루쉰2010. 8. 8. 17:07

<2NE곰-납함 에세이>


현실을 살아가기



명혜원


 

박수근作

아아, 이것이 20년 동안 한시도 잊지 못한 고향의 모습이란 말인가? 내가 알고 있는 고향은 전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내 고향은 훨씬 더 좋았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며, 그 좋은 점을 말로 표현하려하면, 금새 그 모습은 사라지고 말은 잃어버린다. 역시 이런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나 자신을 위로하였다. ‘본래 고향이란 이런 것이다. 진보도 없는 대신, 내가 느끼는 바와 같은 적막함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나 자신의 심경이 달라진 탓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번의 내 귀향은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라고.




 루쉰의 소설 '고향' 속 20년만에 고향을 찾은 주인공의 심경묘사이다. 이사를 위해 고향을

박수근作
찾았을 때 그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기억하던 고향의 모습과 너무나도 다른 쓸쓸하고 황폐한 마을이 생기를 잃은 채 가로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자신이 20년 동안 그리워하던 고향이 정말 맞는지 가슴에 슬픔이 솟아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과거 고향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그리며 좋은 점을 말해 보려 하면 그 모습은 순식간에 지워지고, 표현하고자 했던 말도 없어져 버리고 만다. 그가 알던 고향의 아름다움이란 그가 그려낸 막연한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고향’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것만 같은 막연한 공간으로서의 이미지가 있기도 하고, 지친 나를 포용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푸근함도 존재하는 듯하다. 고향에서의 추억은 아련하나 즐거운 감정을 만들어내 되새기고 은미하며 현재를 즐겁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준다.

 하지만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두고 만나지 않는 것이 나았다는 말이 있듯이 시간이 흘러 마주하게 된 고향은 그가 막연히 그리던 아름다움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특히 추억 속 자신의 작은 영웅인 룬투는 모진세월을 견디며 ‘등신 같은 인간’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순수하던 어린시절 주고받은 우정은 그들에게 남아 있지 않다. 룬투와 그의 사이에는 이제 그를 ‘나으리’라고 부르는 벽이 생겨나 있었다. 고향의 아름다운 이미지와 더불어 어린시절 추억까지 깨어져 버린 것이다.



옛 집은 차츰 나로부터 멀어져 갔다. 고향의 산천도 차츰 나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내 둘레에 보이지 않는 높은 벽이 쳐져 나 혼자 그 속에 남겨진 듯한 생각이 들어 울적해질 뿐이었다. 수박밭의 은목걸이를 한 어린 영웅의 모습은 다시 없이 선명하였었는데, 이제는 갑자기 희미해져버렸다. 이 또한 견딜 수 없이 슬픈 일이었다.


 

박수근作
오랫동안 타지 생활을 하던 그가 마음한편에 두었던 기억하고 싶던 추억이 사라졌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슬픔이었을 것이다. 이제 막연히 아름답다 칭하며 떠올릴 마음의 안식처가 사라져버렸다는 점과, 자신이 그리던 아름답던 추억이 단지 과거의 기억일 뿐이었다는 점이 그를 슬픔으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깨닫게 된다. 자신은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고, 룬투는 룬투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흔히 현재의 상황이 싫어지면 과거를 떠올리며 추억하게 된다. 대학생 때는 ‘고등학교 때가 좋았지’, 고등학교 때는 ‘중학교 때가 좋았지’, 중학교 때는 ‘초등학교 때가 좋았지’ 등 현재의 상황과 과거 좋았던 일부를 비교하며 돌아가고 싶은 추억으로 만들어 떠올리며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를 버텨나갈 수 있는 일종의 희망이 된다. 즉 추억이라는 희망은 사람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그러나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가공된 이미지속 추억에 너무 의존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들을 직접 마주했을 때 크나큰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평생 추억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기란 불가능 하다. 추억이란 것은 우리가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어느 순간 생겨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추억과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가? 결론은 2가지다. 희망적 추억을 만들고 그것을 직접 대면하지 않은 체, 평생 추억을 그리며 살아가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추억이 추억일 뿐임을 인식하고 너무 큰 기대와 희망을 가지지 않고 마주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조카와 룬투의 자식이 잠깐의 만남으로 서로를

타향도 정이들면 고향이라지
그리워하는 정이 생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그들은 자신과 룬투와 같은 단절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그러기 위해선 이들이 기존과 는 다른 전혀 새로운 길을 가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곧 이러한 바람조차 희망임을 직시하며 위와 같은 말을 하게 된다.

 우리가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막연히 그리게 되는 추억 또한 희망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땅위의 길과도 같은 희망. 우리가 걸어갈 수, 실천 할 수 있어야만 희망은 만들어 질 수 있게 된다. 고향에 대한 추억이, 추억에 대한 이상이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절망이 되어버린 것은 고향과 추억에 대한 이상이 과거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추억에 의지하며 현재를 부정하고 살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자신의 희망과 현실이 마주했을 때의 간극으로 절망하며 패배감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과거를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희망만을 의지한 체 살아가는 사람들도 아니고,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루쉰2010. 8. 5. 11:45

  무릇 우매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멀쩡하고 건강하더라도 하잘것없는 본보기의 재료나 관객이 될 수 밖에 없으며, 병으로 죽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불행하다고 여길 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첫 번째 중요한 일은 그들의 정신을 고치는 데 있다. 당시 나는 정신을 고치는 데 있어 최선으로 당연히 문예를 들어야 한다고 여겼다.

  루쉰은 그의 첫번째 소설집 『납함』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납함』에는 그가 말하는 '우매한 국민'에 대한 소설이 여럿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루쉰의 이러한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라면 아마도 「풍파」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풍파」는 신해 혁명 직후의 어느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뱃사공 칠근은 혁명의 바람을 따라 변발을 과감히 잘라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황제가 복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이미 변발을 잘라버린 칠근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더구나 마을 근방 최고의 식자인 자오치도 변발이 없으면 큰 화를 당할거라며 으름장을 놓자 칠근과 그의 가족들은 절망에 빠진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자 황제의 등극 소문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황제가 등극하지 않았나보다 생각하고 다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이 소설은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걸까? 여기에서의 '우매한 국민'이라면 단연 칠근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다. 그들은 바깥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아예 무관심하지는 않다. 하지만 어설프게 아는 것이 오히려 더욱 독이 된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칠근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하기를
 
"황제께서 등극하셨대"라고 했다.
  칠근의 처가 잠시 멍청히 있더니, 갑자기 크게 깨닫기라도 한 듯이 말했다.
  "참 잘됐네요. 그러면 또 대사령(大赦令)이 내리지 않겠어요!"
  칠근은 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변발이 없잖아."
  "황제께서 변발이 있어야 한대요?"
  "황제께서는 변발을 요구하거든."
  "당신 어떻게 알아요?"
  칠근의 처는 조급해져서 다그쳐 물었다.
  "함형주점 사람들이 모두 있어야 한댔어."
  칠근의 처는 이때 직감적으로 사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함형주점이라면 소식이 정통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작품을 모두 읽고 나면 황제의 등극이 실제로 고려되기는 했던 일인지 의심이 든다. 만일 실제로 등극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대사령이 내려지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은 변발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함형주점에서 들려오는 소식이라면, 학식이 있는 자오치 어른의 말이라면, 책에 쓰여져 있다고 하면 모두 맞는 말인줄만 안다. 이런 관계는 상당히 위험하다. 어느 한쪽의 견해나 잘못된 정보 따위를 틀림없는 사실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러한 지식적 권력에 대항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루쉰의 말처럼 문예로 그들의 정신을 고쳐주어야 할까?

이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계몽'이다. 계몽이라면 지식인으로서 응당 행해야할 역할이지만 '정신을 고쳐주겠다'는 식의 접근 방법은 곤란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위에서 아래로' 가르치는 수직적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이 마을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일깨워 준다고 한다면 그건 그들이 '주체적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어야 한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지식이란 정세를 아는 것, 즉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똑바로 아는 일이다. 그러나 물론 이들이 그걸 제대로 알고 싶지가 않아서 모르는 것은 아니다. 생활 환경 자체가 세상사를 파악하기에 어렵기 때문이다. TV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이 구석진 시골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이 무슨 수로 나랏일을 알겠는가? 그러다보니 기껏해야 함형주점에서 근거 없는 소문을 주워듣는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떤가? TV도, 인터넷도 있는 지금에는 우리가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면서 살고 있는가?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있는 나랏일들도 어쨌거나 언론을 한 번 거쳐서 나온 정보다. 게다가 서로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전하는 말이 다르니 우리가 언론을 통해 정세를 객관적으로 본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들이나 「풍파」에 나오는 마을 사람들이나 크게 다른 처지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지 소설 속 인물들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지식적 권력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내가 여기에서 그 모든 방법을 거론할 수는 없다. 물론 알지도 못한다. 다만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가지 방법을 말할 것인데, 그건 자신의 의견과 타인의 의견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일이다.「풍파」의 내용으로 이야기하자면 그것이 칠근 자신의 생각인지, 아니면 함형주점 사람들의 생각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또 책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책에서 읽은 얘기라고 무조건 자신의 의견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먼저 사람들이, 혹은 책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면 자신이 그 의견에 동의하는지, 아니면 다른 의견이 있는지 그 입장이 확실히 서게 된다.「풍파」의 인물들이 못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그들은 변발이라는게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서 변발을 자르느냐 보존하느냐를 곧 자신들의 입장으로 삼으니(자오치라는 인물도 포함하여) 껍데기 밖에 없는 지식이 통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우리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정말 나의 의견일까? 아니면 어디에서 들은 얘기를 나의 의견으로 삼은걸까? 만약 후자라면, 그러한 의견은 어떤 생각에서 나온 의견일까? 그리고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하는가? 이러한 질문이 있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지식'이라고 할만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특정한 매체가 가진 지식적 권력을 자연스럽게 분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루쉰2010. 8. 3. 23:35

2NE곰 10.7.17 루쉰 『납함』

“그게 그것”, 냉소와 찌찔함 사이


“그게 그것”, 어떻게 세상이 변하니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며 변화시킬 수 있다. 아니다, 바꾸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쉽게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것이 있다. 소설 단오절의 주인공 팡쉬엔춰는 “그게 그것”이라는 말로 양쪽 의견에 대한 확답을 교묘하게 피해간다. 세상은 변하지만 실제로 달라지는 것은 크게 없으며, 다 같고 그게 그것이다. 평범해 보이는 생각이지만, 이러한 틀로 세상을 보면 모든 현상이 쉽게 이해가 된다. 이해를 넘어서 넓은 아량까지 생긴다. 옛 투사들의 변절을 보고, 어제의 청년이 오늘의 어른이 되듯이,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으며, 부당한 행동을 보고도 내가 만약 그 상황이었다면 ‘역지사지(易地思之)’해보고 그럴 수도 있으리라 넘어간다. 팡쉬엔춰는 그가 마주하는 상황마다 “그게 그것”이라는 한마디로 가볍게 비껴간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대적해야할 ‘적’이 없다. 사람, 인간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기에, 악도 적도 없는 것이다.
  그게 그것이기에 격변하는 사회에서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세상 돌아가는 것을 고고하게 관조하고 있다. 그에게는 인간의 사상이나 행동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팡쉬엔춰의 태도는 한마디로, ‘냉소’이다. 체념이라고 하기에는 그의 태도가 그 스스로에게 너무나 큰 편안함을 준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박혀있는 이 한마디에 위안을 받는다. 팡쉬엔춰의 처세는 찌질하나, 사실 그의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다. 사회가 변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변발이 짧은 머리로 바뀌는 것? 그것도 변화임에는 틀림없지만, 사회의 겉모습이 바뀐다고 해서 그 사회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겉모습이 바뀌는 것도 쉽지 않지만, 소위 인간의 한계라고 부를 수 있는, 사회를 이루는 인간들이 가지는 본능적인, 본질적인 것은 늘 쉽게 부숴지지 않는 ‘철방’과 같은 존재로 남아 있다. 인간에게 그래서 변혁은 그리 쉽게 이루어 지지 않는다. “역사는 반복된다.” 거창하게 역사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팡쉬엔춰가 보기에도 사회 속 인간들의 모습은 모두 비슷하다. 학생들이 욕하는 관료는 그 이전에 학생이었다. 역할과 자리는 그대로고 사람만 바뀔 뿐이다. 사실 냉소적인 팡쉬엔춰가 아니더라도,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그게 그것”이 꼭 과장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그 찌질리즘

 
다 그게 그거다, 라는 무심한 말이 어떻게든 사회가 변화할 것이라고 믿는, 믿어야하는 투사들에게는 그들을 적막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한마디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쉽게 이러한 변화에 대한 체념과 냉소를 부정할 수는 없다. 사실 그들 자신도 무언가 변하리라 확신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팡쉬엔춰의 비판 아닌 비판이 설득력이 있을 정도로 그들이 마주한 시대상황은 암울했다. 그렇기에 소설 속에서 팡쉬엔춰의 생각을 서술하는 루쉰은 이에 대한 어떠한 평가나 비판을 하지 않는다. 루쉰 자신도 ‘철방’이 깰 수 있을까 고민하는 판이니 말이다. “산다는 게 그런 거지”라고 말하는 팡쉬엔춰에게 그렇게 쉽게 “닥쳐”라고 하지 않는다. “그게 그거”라는 이 무심한 사람의 명연설을 소설의 앞부분에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뒷부분으로 갈수록 드러나는 팡쉬엔춰의 궁상스러움이다. 결국 그가 보여주는 사회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는 나태함 이외에 다른 말을 덧붙이기 어렵다. 사회에 대한 어떠한 비판의식 없이 한마디로 귀찮아서, 특별히 무언가에 반대하는 행위 없이 편안히 먹고 살 정도의 돈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저 찌질해서 이중적이라고도 할 수 없는 팡쉬엔춰의 삶이야말로 ‘에게 그거’이다.


  에게 그거, 찌질한 삶. 어느 시대에나 찌질한 삶은 있을 수 있으며 단지 그 찌질함의 표현이 달라질 뿐이다. 어떤 이는 찌질함의 정의를 ‘보는 순간 때려주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 것’이라 했다. 팡쉬엔춰가 말하는 것처럼 ‘그게 그거’인 시대를 살아가는 자, 그의 찌질함은 어느 순간에서 ‘구타유발자’인가? 그의 일상을 살펴보면 그 찌질함의 속내가 보인다. 그의 찌질함의 원천인 ‘그게 그거’ 요법은 일상 속에서 점점 우스꽝스럽고 한심한 모습으로 뒤틀려간다. 그는 외부세계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냉소적인 시선으로 본다. 이러한 냉소는 얼핏 보면 심지어 지식인스러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이 팡쉬엔춰 자신의 삶, 일상으로 들어오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즉, 팡쉬엔춰가 말하는 ‘그게 그거’의 고상함에 대한 변명의 여지가 점점 줄어든다.
  "“보라구. 그래도 교원들이 급료를 요구하는 걸 천박한 짓이라고 할 수 있겠소. 그런 놈들은 사람이 밥을 먹어야 하고, 밥은 쌀로 지어야 하고, 쌀은 돈으로 사야 한다는 이런 아주 기본적인 일조차도 모르는......” “맞아요. 돈도 없이 어떻게 쌀을 사며, 쌀도 없이 어떻게 밥을 끓여 먹는담......” 그의 두 볼이 부어올랐다. 부인의 대답이 바로 자기의 의견과 ‘그게 그것’이어서 남의 말에 부화뇌동하는 꼴이 된 것 같아 화가 난 것이다.(「단오절」 p.185)"
  아내의 말로 그가 비난하던 교원들이나 자신이 결국 “그게 그것”이라는 것이 드러났을 때, 그의 두 불은 부어오른다. 화가 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이론대로라면, 그는 ‘쿨하게’ 교원들과 그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교원들이나 팡쉬엔춰 자신이나 당연히 ‘그게 그거’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그의 찌질함은 지극히 감정적인 자기 방어, 합리화이다. 사실 그 이면은 그가 가지고 있는 자존심, 감정의 문제인 것이다. 그의 찌질함, 순전히 ‘그게 그거’는 어쩌면 지식인의 ‘정신 승리법’이기도 하다.

결론은 버킹검[각주:1], 태도의 문제

 
그런데 변명의 여지도, 옹호할 부분도 그다지 많지 않은 팡쉬엔춰라는 인간상을 비웃게 되면서도, 왠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진다. 앞서 말했듯 작가는 팡쉬엔춰에 대해서 직접적인 평가를 내리는 대신 그저 보여준다. 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는 고품격 궁상스러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팡쉬엔춰 식 궁상스러움이 그 시대 지식인들이 알게 모르게 갖고 있던 의식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변혁을 소리 높여 이야기 하지만, 사실 그들 자신들의 모습부터도 바꿀 수 있는 것인지. 세상, 인간에 대한 회의와 절망은 말끔하게 걷어내기 쉽지 않다. 지식인이라는 자존심, 그 때문에 오는 궁상스러움에 대한 방어기제가 팡쉬엔춰와 같은 ‘정신승리법’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게 그것”이라는 틀 안에 자신을 가두고, 스스로를 사회와 격리시켜 버린다. 갇혀있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나름의 ‘승리’이든 간에 적어도 우리는 팡쉬웬춰가 찌질하다는 것을 안다. 변화에 대해서, 쉽게 그 가능성과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 사실을 아는 것과 일상 또한 “그게 그것”인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세상의 틀을 깰 수 있을까?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을 수 있을까? 이 소설 속에서 루쉰은 절실하지만 진부한, 누구도 확신하여 대답할 수 없는 문제에 대답하려 애쓰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결론은 버킹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태도이다. 아니, 태도일 수밖에 없다. 세상이 변한다고 믿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믿든 간에 말이다. 자신에게 이미 운명이 정해져있든, 정해져있지 않든 간에 결국 오늘 하루를 눈뜨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진정 ‘운명’이다. 변화를 희망하는 이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희망은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우리가 희망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들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소박한 의지와 의도이다. 그 소박함도 없이는 하루를 살아가기가 어려운 시대가 바로 루쉰이 살아갔던 시대였을 것이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한 절망은 일단 접어둔 듯하다. 대신 루쉰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거창한 혁명도 투쟁도 아닌 오늘하루를 살아갈 의지, 태도이다. 물론 그 태도가 최소한 ‘에게 이거’는 아닐 뿐이다.


  1. "결론은 버킹검"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정말로) 의류 CF광고 멘트입니다. 필자는 한 소설에서 이 구절을 매우 인상깊게보고 에세이에 인용했으나, 안타깝게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실제 있는 광고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등등 많은 이들의 논란을 잠재우고자 버킹검 CF 주소를 올립니다. mms://media.adic.co.kr/tv/wmv300/200004/V6A01051.wmv [본문으로]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