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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용택2011. 5. 25. 00:56

  


이 글을 어떻게 써볼까 한참을 고민했다.

  한참 된 것 같은데 겨우 작년의 일이다. 당시 상황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내가 좋아하던 한 아이가 있었
고 마찬가지로 그 아이를 좋아하던 내 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나와 내 친구를 둘 다 사랑한다고
했다. 이건 양다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우리 셋은 서로의 감정에 대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영화 「몽상가들」에 나오는 그들처럼 쿨한 관계가 되지도 못했다. 무지하게 애매하고 치졸한 관계였다.

  어느 날 그 아이가 가출을 했다. 대책없이 나와버려서 갈 곳도 없었다. 그래서 한 동안 내 친구의 자취방
에서 살았다. 그 때 나는 진작에 자취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둘이 한 집에서 사는 꼴을 보고 있기가 참으
로 괴로웠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동거하는 남녀간에 있을 수 있는 어떤 성적인 접촉도 없었다고 한다. 참다행스럽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화도 났다. 그 아이가 "00는 나한테 그런 짓을 하지 않더라"고 말할 때는, 마치 "그게 너와 걔의 차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만의 이야기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인지라, 깊이 얘기하기가 좀 그렇긴 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전
의 이야기도 할 필요가 있겠다. 사실 그 관계 속에서의 '나쁜 놈'이라면 바로 나였다. 나는 진작에 내 친구
가 그 아이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그 사이에서 사랑의 전령사 역할을 해주겠답시고 그 아이와
자주 만남을 가지다가 다른 마음이 생겨버린 것이었다. 생각해보면 잘 되어가던 둘 사이에 나타난 난데없
는 훼방꾼이나 다름 없었다. 나는 당연히 내 친구에게 죄책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
게 된 친구가 도리어 나한테 "미안하다"고 말했을 때, 그 죄책감은 증오로 바뀌어버렸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나오는 표도르 빠블로비치 까라마조프는 이렇게 말했다. "어째서 당신은 
그를 그토록 증오하시오?"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지요. 사실 그는 내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내가 그에게 양심에 꺼리는 짓을 했지요. 그런데 그런 짓을 하고 나자 곧바로 그가 증오스러워지기 시작하더군요."

   왜 내가 표도르 빠블로비치라는 인물로부터 이런 글을 쓰게 되었는지 어느 정도 알 것도 같다. 우리는 일
면 비슷한 구석이 있다.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인 계기인 '수도원 저녁식사' 사건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표도르 빠블로비치는 이미 자신의 일행과 수도원 사람들에게 대단한 실례를 범한 뒤였다. 그리고나서 그는
자중의 의미로 저녁식사에 불참했다. 하지만 그는 수도원을 떠나다 말고 돌아서서 다시 저녁식사 자리에 
나타난다. 그들에게도 자기 자신에게도 결코 좋을 것이 없을 것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표도르 빠블로비
치는 뻔뻔하게 그 자리에 나타난다. 결국 모든 것은 엉망이 되고 안 좋게 끝나버린다. 그는 분명히 그 상황
이 완전하게 망가지기를 바랬기에 그런 돌발행동을 했을 것이다.

 

 


  다시 아까의 얘기로 돌아온다. 그 아이가 내 친구의 집에서 살고 있던 어느 날 밤의 일이다. 나는 그 아이
와 함께 밤까지 바깥에서 같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밤이 되자 다시 그 아이를 친구네 집으로 들여 보내
야 했다. 죽기 보다 싫은 일이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아이는 그 집으로 들어갔고 나는 바깥에 혼자 남았
다. 이제 나도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안양에서 인천까지는 2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 나는 갑자기 그 시간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엄청나게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졸음과 피로가 쏟아졌고 도저히 2시간 30분이나 버텨서 집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그리고, 더불어 지금쯤 친구의 자취방 안에서 벌어지고 있을 상황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분명히 내 친구
에게 나와 같이 있었다는 사실을 숨길 터였다. 그러면 내 친구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둘은 
시시한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밤새 키득거리겠지. 그런데 내가 2시간 30분이나 들여서 집까지 돌아가야 한
다고? 차라리 그 두 사람의 '즐거운 시간'에 갑자기 내가 끼어들어버리면 어떻게 될까? 그 아이는 내가 분명히 집으로 돌아가는 중이라고 생각할테고, 내 친구는 아예 나에 대해서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텐데 말
이다.

  그 때 들었던 여러 가지 생각을 모두 나열하자면, 우선 통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도저히 해결책을 찾
을 수 없는 상황에서 판을 뒤집어 엎어버리는 일이나 마찬가지이기도 했다. 또, 정말 순수하게 궁금한 마음
도 있었다. 내가 거기에 등장하면 그 다음 상황이 어떻게 될지 정말로 궁금했던 것이다. 아무튼 이런 이유들로 나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친구의 자취방으로 갔다. 그리고 대뜸 재워달라고 말한 뒤 대답도 듣지 않고
바닥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두 사람 모두 아연실색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어디를 가더라도 저는 누구보다도 비굴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며, 또 모두가 저를 어릿광대 취급을 하
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디 정말로 어릿광대짓을 해 보이지, 너희들이야말로 모두 나보다 더 어리
석고 더 비굴한 놈들이잖아!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 "이제 명예는 회복할 수 없어. 그러니 부끄러워
할 것 없이 놈들에게 다시 한번 침을 뱉어 줘여지. 놈들에게 수치심을 느낄 것 없어. 그래, 그렇게 하자고!"

  그 후의 일은 자세히 얘기할 이유가 없지만, 내가 완전히 처참한 꼴이 되어 끝났다고는 말해둬야겠다. 내가 자초한 일이기도 했고, 원한 일이기도 했다. 내가 다시 그런 짓을 할 수 있는(하게 되는) 날이 올지는 모
르겠다. 분명한 건, 더 이상 회복할 수 있는 게 없을 때에만 그런 무모한 용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표도르 
빠블로비치의 경우엔 그것이 이미 오래전에 상실한 '명예'였다. 나의 경우에 그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
겠지만, 막다른 길에서 보여준 최후의 발악이었음은 사실이다. 사람은 자신이 극도로 싫어하는 상황이 되
면, 스스로를 우스운 꼴로 만들어서라도 차라리 그 상황을 '기형적'으로 바꾸게 되는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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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