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애니곰'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7.26 삶 : 무게의 진실 1
  2. 2010.08.05 '가족'이라는 이름의 표상을 뒤집는 카프카 1
에세이/생명연습2011. 7. 26. 00:28

2NE곰 정말, 마지막 에세이
밀란 쿤데라 『농담』

삶 : 무게의 진실


삶, 능동과 피동

나는 살아갑니다. 어제를, 오늘을, 내일을 살아갑니다.

‘살아간다’라는 표현에는 주어인 내가 능동적으로 행위하고 있다는, 약간의 자신감이 숨어있다. 삶에 대한 오만함이랄까. 때로 우리는 삶에서 우리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굳센 의지로 인생을 개척해나간다거나 하는. 그러나 많은 경우 이것은 쉽게 배반당한다.

물론 살아간다는 것이 능동의 의미가 있다고 해서, 삶이라는 것이 ‘살아간다’와 ‘살아진다’의 능동, 피동 한쪽으로만 경계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나이에 삶이란 것에 쓰려니 피식 웃음이 나오지만, “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지”라는 노래 제목처럼 우리는 나이에 상관없이 늘 각자의 삶을 살아가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무엇이다, 어떠하다고 말하기에는 여전히 민망하기는 하다. 각설하고, 능동과 피동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면 삶에서 많은 경우 우리는 능동보다는 피동의 상황에 더 자주 놓이게 된다. 삶에게 ‘~함을 당하는(피동)’ 철저한 약자들. 만약 그 삶이 역사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자신의 권력을 과시한다면 그 가혹함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루드빅은 자신이 엽서에 써보낸 농담 한 마디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 속에 던져진다. 단지 그가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갑자기 마주하게 된 현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이다. 물론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선택지를 결정할 권리는 없다. 선택지는 이미 결정되어있다. “존재 자체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던” 루드빅도 결국에는 군대 생활에 익숙해진다. 익숙해진다는 것 또한 그의 ‘선택’임은 물론이다. 어쨌거나 그의 의지가 반영된. 그렇게 그는 살아간다.


무게를 둘러싼 의혹들

[곽호철 作.]


삶의 무게를 달 수 있다면, 어떤 이의 삶은 무겁고 또 어떤 이의 삶은 가볍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삶의 태도의 문제일까 아니면 삶 자체의 문제일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생을 그가 짊어진 십자가, 고난의 무게만큼 무겁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쓸데없는 지난 며칠간을 내 인생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이 내게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내 인생의 일들 전부가 엽서의 농담과 더불어 생겨났던 것인데? 나는 실수로 생겨난 일들이 이유와 필연성에 의해 생겨난 일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느끼며 전율했다.
                                                                                                                          『농담』,p391


루드빅의 삶은 그 자신의 말처럼 “엽서의 농담과 더불어” 생겨났다. 농담은 그저 농담일 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농담이 만들어낸 인생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삶은 늘 살아가는 자체로 실재할 뿐이고, 루드빅의 말처럼 실제적이다. 무게로 생각하면 그만큼 충분히 무겁다는 이야기이다. 충분히,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딱 그 만큼.

또 다른 이는 삶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꿈이라고 믿기에는 그 고통이 처절해서 버거운 하루하루에 대해서. 그렇다면 고통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삶은 무거운 것일까.

오늘 아침, 이 얇은 초록색 책이 다시 생각나 창고의 트렁크에서 꺼내왔다. 한 장 한 장 넘겨가다가 거친 필체의 메모를 발견했다. ‘세상은 환(幻)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라고 보르헤스가 구술한 문장 바로 아래였다.

그 꿈이 어떻게 이토록 생생한가. 피가 흐르고 뜨거운 눈물이 솟는가. 
                                                                                                               한강, 「희랍어 시간」

세상은 환(幻)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 사는 게 꿈일지라도 그 꿈속에서 사는 인간의 감각은 생생하다. 이 말을 한 보르헤스도 인생을 하루하루 살아내는, 이러한 점에서는 다른 사람들과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였을 것이다. “피가 흐르고 뜨거운 눈물이 솟는다”고 말하는 이도 마찬가지이다. 그 인생의 디테일이 꿈이든 지옥이든 천국이든 간에, 삶은 모두 동등한 무게를 갖는다. 루드빅이 소설 속에서보다 훨씬 더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그의 삶의 무게가 바뀌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한 사람이 그의 인생을 가벼이 본다고 해서, 혹은 반대로 진지하게 본다고 해서 삶을 재는 무게저울의 눈금이 더 기울지는 않는다. 결국 농담이든 진담이든 간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삶들은 늘 삶이라는 만큼의 무게로 떡 버티고 있다.


그리하여, 수수께끼

이제 루드빅은 거대한 농담과도 같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생각한다. 인생이 그에게 마주하게 했던 모든 일들에 대해서.

개인적인 이야기들, 그런 일들은 그저 일어나고 지나가는 데 그치지 않고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기도 한 것일까? 나는 아주 회의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약간의 비합리적인 미신이 내게 남아 있는데, 내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그 자체 이상의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어떤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묘한 믿음이 그런 것이다. 삶은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우리에게 말을 하고 점진적으로 어떤 비밀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믿음, 삶은 해독해야 할 수수께끼로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믿음, 우리가 겪는 일들은 동시에 우리 삶의 신화를 형성하며 또한 이 신화는 진실과 불가사의의 열쇠를 모두 지니고 있다는 믿음. 그것은 환상일 뿐일까? 그럴 수도 있다, 틀림없이 그럴 것 같기까지 하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해독>해야만 하는 이런 욕구를 억누를 수가 없다.
                                                                                                                    『농담』, p233,234

삶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반응해야할 것, 선택해야할 것들을 부과한다. 우리가 삶에 대응한 방식 혹은 그 결과가 ‘우리’를 만든다. 루드빅의 말을 빌려오자면 “신화”. 그렇다면 반대로 삶이 우리에게 무수히 보여주는 사건들에는 그 자체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루드빅이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상징”이다. 삶이 우리를 살아내게 하면서 우리에게 조금씩 흘려주는 비밀은 무엇일까.

삶이 해독할 수수께끼라면, 그것은 영원히 풀어야할 퍼즐과 같을 것이다. 영원히 풀어야한다는 것은 결국 영원히 풀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맞춰야할 퍼즐조각의 수는 우리가 1분 1초를 살아가는 만큼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고, 퍼즐을 맞추는 사람조차 퍼즐이 완성될 모습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퍼즐, 혹은 수수께끼가 원래부터 답이 없다고 해서, 이 퍼즐을 맞추는 행위가 ‘무겁다고’해서 그만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굳이 그만둔다면 나야 할 말은 없지만. 우리, 이 피동적인 인간들은 같은 무게이지만 각자의 고유한 퍼즐을 가졌다. 그 퍼즐을 나도 너도 해독하지 못할 수도, 흔한 괴담의 결말처럼 원래부터 (해독할)그런 것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뭐,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다. 왜냐면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이 퍼즐을 풀어야하는 별 볼 일 없는 사명에 놓여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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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카프카2010. 8. 5. 11:00
 

<2ne곰-카프카 파이널 에세이>


'가족'이라는 이름의 표상을 뒤집는 카프카

- '변신'을 통해 살펴본 가족의 모습 -


 명혜원


 가족이란 이름의 표상
 

페르난도 보테로 作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가족간의 관계는 다른 어떠한 관계보다 앞서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TV광고나 드라마 소설책에서 가족의 표상을 만나게 된다. 가족하면 떠오르는 것은 투닥투닥 다투기는 하나 서로를 아끼며 위해 주는 마음은 의심할 수 없고, 가족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름답고도 당연한 미덕인 이미지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역할, 어머니는 어머니의 역할, 자식은 자식의 역할을 담당하며 서로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나간다. 우리가 접하게 되는 대부분의 드라마나 소설속 가족의 이야기는 이러한 가족의 이미지와 조금이라도 어긋나게 되면 발생한다. 자식이 자식의 역할을 하지 않을 때, 아버지가 아버지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가족의 단합을 위한 개개인의 희생 없이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결국 대부분의 드라마는 가족의 갈등을 지나 서로를 위해주는 진심을 알고 행복하게 막을 내리게 된다. 24년을 살면서 항상 교육받고 주입되어진 가족의 모습은 이러한 터라 나에게도 가족의 이미지는 배려가 중시되는 애정의 관계였다. 가족은 동등하고 평등한 위치로 자신의 역할을 완수 할 때만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생각.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표상 속 가족의 모습이라면 우리가 보지 않으려고 외면했던 가족의 이면을 카프카는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


 경제적 상황에 따른 가족의 변화

 그레고르 짐자의 가족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그가 벌레로 변해 버린 후 다양한 변화를 한다.


'그러면 여동생이 돈벌이를 해야 할까? 그 애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밖에 안 된 어린애로 지금까지 즐겨하던 생활 방식이란 옷이나 잘입고, 늦잠 자고, 집안일을 도와주고, 몇 가지 간단한 유흥에나 끼고 바이올린을 켠다든지 하는 일이었다.' (136p)


그레고르 짐자의 여동생, 그레테의 모습은 요즘 학생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부모님의 보호아래 학교공부, 친구들과의 간단한 유흥, 취미생활 등을 하게 된다. 17곱살이면 보호받아야 하고 생계를 위한 일을 해야 하기엔 너무 어려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대부분에 생각이다.

페르난도 보테로 作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도 이러한 의식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그가 생각했던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라고 생각했던 그레테는 오빠가 벌레로 변해버리고 난 후 많은 변화를 하게 된다. 처음 벌레로 변한 오빠를 발견한 후 울기만 했던 그레테. 그 후 부모님을 대신해 오빠를 돌보는 일을 자연스럽게 담당하게 된 그녀는 오빠를 돌보는 일에 대해서는 자신만이 할 수 있고,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자신만이 할 수 있다고 믿는 이일에 누군가 개입을 하려 하면 그녀는 경계를 하며 거부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의존적이며 울기만 하던 그녀가 가족의 누구보다 잘 알고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생겨서인지 점점 활기를 띈 성격이 되어간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17살 어린 소녀가 이제는 판매원으로 취직해 일을 하고 보수를 받는다. 거기에 더 나은 직장을 위해 밤마다 공부하게까지 된 것이다.

 감성적이고 감정적으로 상황을 마주하던 그레테는 사라지고 없다. 벌레가 된 오빠를 보며 안타까움과 슬픔, 애정을 주던 그레테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생기고 가족경제에 보탬이 되는 일을 시작함과 동시에 벌레를 오빠로 생각하는 것, 그 벌레에 가족이 메여있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는 말을 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 되어있었다.

 가족이란 안전한 울타리와 그속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던, 나약했던 그레테가 자신의 삶을 살기위해 일하면서 강해지는 모습을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사람들이 종종 나에게 하는 '넌 고생을 해봐야 단단해 질 수 있어'라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생계를 위해 일을 하게 되면 힘은 들지만 사람이 단단해질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의견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다는 것. 가족들간의 관계에서도 더 이상 보호받기위한 어리광을 부리지 않게 된다는 것을 그레테가 보여준 모습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그의 아버지 또한 많은 변화를 하는 인물 중 한명이다.


' 실생활비는 벌어야만 했다. 아버지는 아직 건강하긴 하지만 나이가 들었고, 벌써 오 년째 일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아무튼 아버지에게서 너무 많은 부담을 바랄 수는 없었다. 어려운 실패의 삶을 보내다가 처음으로 휴식하게 된 지난 오 년 동안에 아버지는 살이 많이 쪄서 둔해지셨다.'(136p)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하기전 기억하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기에 자신이 돌보고 부양해야 한다고만 믿었던 아버지. 가족들간의 관계에서도 그다지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보기 어려웠던 아버지는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해 자신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껴서인지 점점 변하기 시작한다.


' 실은 그는 변화된 상황에 대응할 준비를 했어야 했다. 그렇더라도, 그렇더라도 저 사람이 아버지일까? 전에 그레고르가 업무 여행에 나간 때면 피곤에 지쳐서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던 바로 그 사람일까? 저녁에 귀가할 때면 잠옷 바람으로 안락 의자에 앉아 나를 맞아주던 사람,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해서 반갑다는 표시로 손만 쳐들던 사람, 일 년에 두세 번 일요일 또는 큰 명절에 드물게도 함께 산책을 갈 때면 워낙 느리게 걷는 그레고르와 어머니 사이에 서서 낡은 외투를 몸에 두른 채 언제나 조심조심 지팡이를 내디디며 더욱 천천히 가던 사람, 무슨 말을 할 때면 거의 언제나 발걸음을 멈추고 옆에 가는 사람들을 자기한테로 불러모으던 그 사람일까? 그런데 이제 그 사람이 꼿꼿하게 서 있으면서 은행 급사처럼 금단추가 달린 푸른 제복을 입고, 상의의 높고 빳빳한 칼라 위에는 억센 이중 덕이 나와 있고, 숱이 많은 눈썹 아래에는 검은 눈이 생생하고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147p)'


 

페르난도 보테로 作

 그레고르의 기억속 아버지의 모습은 도저히 자신을 대신해 일할 수 있는 분이 아니었다.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자신이 아버지를 부양해야만 하면 그는 자신이 벌어준 돈에 의해 노년을 편안하게 보내시는 것이 그의 행복이며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경제적 상황을 책임져야하는 아버지의 상황을 좋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는 일을 시작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생기를 찾았다. 심지어는 집에서도 회사 제복을 벗기 싫어하는 것, 마치 항상 일을 할 태세로 제복을 입고 잠자리에 드는 것 등을 보면 자신의 상황을 행복해하는 것 같아 보인다.

 가족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도 매우 극진하다. 굳이 부축을 거부하는 아버지를 침실까지 양모녀가 팔짱을 끼고 부축해가는 모습이며, 아버지의 쇼파에 계속 앉아 있겠다는 고집을 달래는 어머니의 태도는 매우 인상적이다. 어버지는 이런 상황을 즐기는듯하게 묘사되는데 여동생과 어머니의 아버지를 위하는 공손한 태도가 그를 '이게 인생이군, 이게 내 말년의 휴식이구먼'이라는 말까지 하게 만든다.

 몸이 편안한 것보다 가족에게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이를 인정받았을 때 더 행복해하며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우리시대 아버지들의 이미지와 겹쳐졌다. 가족을 위해 일을 하고 그로인해 가족들에게 자신의 권의를 인정받고 큰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아버지들의 모습이. 그레고르에게 가족의 생계를 맡기고 있을 당시 기운없어 보이던 노인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그의 당당함이 가족관계에서 경제적 역할이 한사람에게 미치는 경제적 요인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다.



' 세상이 가난한 사함들에게 시키는 온갖 일을 식구들은 최대한으로 해냈다. 아버지는 말단 행원들에게 아침 식사를 날라다 주었으며, 어머니는 모르는 사람들의 내의를 만드느라 헌신했고, 여동생은 고객의 명령에 따라 판매대 뒤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식구들의 힘으로는 더 이상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151p)

 

 그레고르 짐자의 가족들은 경제적 버팀목인 그가 사라지자 역설적이게도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가족을 위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경제적으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자신감 넘치고 자기주장을 확실히 하게끔 만들어준 것이다.

 이와 동시에 경제적인 힘이 생긴 아버지의 모습 변화는 우리에게 더욱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경제적인면이 가족관계에서도 권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그중 한가지이다. 이는 현대 사회속 대부분의 가정에서도 아버지가 가장 큰 힘을 가지는 이유는 가족의 경제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있어서라고 연결지어볼 수 있다. 가족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때 가족의 행복이 유지된다는 말은 어쩌면 가족 속 권력관계를 깨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행복이 지켜 질 수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사랑과 믿음이 우리가 그리는 가족의 표상이었다면, 그속에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지만 표상에 가려져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경제측면에 따른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있었다. 카프카는 경제적 상황 변화에 따른 가족구성원의 변화를 통해 우리에게 사랑과 배려, 희생이라는 가족의 표상속 다른 이면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페르난도 보테로 作

 물론 가족이라는 표상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족은 우리가 그리는 이미지처럼 서로를 아껴주고 위해주는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가족도 작은 사회이기에 권력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권력관계에 휘둘려 나약해지지 않기 위해선 경제적인 독립이 가능해야만 가능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가족간의 진정한 배려와 사랑이 존재하기 위해선 경제적 독립이 우선시되어야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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