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큐'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0.08.10 아큐를 이해하기 3
  2. 2010.08.02 나는 아큐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아야 한다
History/루쉰2010. 8. 10. 14:07

납함에 있는 소설 속 주인공들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인물은 아큐이다.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그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큐는 이런 사람이구나 하다가도 갑자기 방향을 틀어 전혀 다른 행동이 나타난다. 혹은 아예 그의 생각을 읽어버릴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아큐는 자신의 부스럼을 놀리는 동네 건달들에게 몇 번 덤볐다가 항상 벽에 머리를 짓찧게 된다. 그래도 절대로 자신의 부스럼에 대한 놀림을 넘기지는 않는다. 아큐를 일반적인 바보나 맹추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몇 번 호되게 당한이후로 놀림을 받아도 그저 속으로 분해할 뿐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맞는 것이 두려우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건달들에게 힘이 통하지 않자 매섭게 째려보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대단한 자존심이다. 이랬던 그가 얼마 안가서 건달들에게 머리채를 잡히자 자신은 벌레라며 빨리 놓으라고 한다. 그 대단한 자존심이라면 오히려 머리채가 뜯겨져 나가도 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네가 어떻게 나의 친척일 수가 있냐고 화를 내며 따귀를 때리는 짜오 나으리 앞에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것은 그가 당한 폭력의 수준 차이 때문인 것일까?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 맞는 것이 더 아프고, 덜 아프고를 떠나서 맞는 것 자체를 싫어할 텐데 아큐는 폭력을 자처하고 있다. 매에 맞기 전에 변명을 하기보다 매에 맞고 난 후 변명을 하는 것이 그다. 그리곤 후련해 한다. 한 대 맞은 것으로 일이 일단락되었으니 말이다. 보통 맞고 나면 더 반항심이나 울분이 생기는데 후련해 하다니. 자존심이 강한 아큐라면 오히려 가슴속에 남들보다 큰 앙갚음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크기가 남들보다 큰지 작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나름의 울분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그는 이런 울분을 가끔 정신적 승리법으로 푼다. 자식이 애비를 때리는 거라는 생각도 하고 이 생각이 먹히지 않을 정도로 울분이 심한 날은 제 손으로 제 얼굴을 세게 몇 번 때린다. 맞은 것은 ‘나’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누군가를 때렸다는 것으로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그의 생각이나 기분을 읽어내려 했던 내 시도는 철저히 무너진다. 이런 정신적 승리법을 만들어 낸 그의 사고를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다. 짜오 나으리나 가짜 양반, 미장 사람들이 아큐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그를 마을의 하찮은 녀석, 어중이떠중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고 평소에도 그의 존재를 크게 인식하고 있지 않다. 소설 속 그의 행적을 봤을 때 충분히 독특한 사람임에도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큐정전>의 서문만 봐도 그렇다. 작가가 그에 대해 확신하고 있는 것은 ‘아’자 하나뿐, 아무런 정보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 그는 너무나 복잡한 사람이다. 혁명당원의 목이 댕강 잘리는 것을 보고서도 ‘혁명이란 것도 괜찮구나’라고 생각하는 그의 사고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혁명을 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들, 예를 들면 짜오 나으리네 가구나 재산들과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녀석들에 대한 복수가 그를 유쾌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 때문에 그가 혁명에 가담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거인 나으리의 두려움, 미장 사람들의 두려운 눈빛이 그를 신명나게 했다. 마을의 존경받는 어르신조차도 두려워하는 혁명과 반란에 마을사람들도 덩달아 두려워 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아큐는 혁명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는데도 변발을 위로 올리고 ‘반란이다!’를 크게 외치고 다닌다. 그가 멍청하고 상황파악 능력이 모자라서 그랬을까? 아무리 그렇다하더라도 사람들의 두려운 눈빛이 그에게 주는 유쾌함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바보면 다 혁명하는 자인가.

                                                                                                                                   <왜 영구가 떠오르는 걸까...?>



아큐가 종잡을 수 없는 생각과 성격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있다. 그는 그 스스로가 너무 잘났다. 이는 그의 자존심이 세다는 말인 동시에 남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게다가 들을 마음도 없어 보인다. 무인도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사람처럼 아큐는 그의 기분이나 감정, 이것들의 해소와 자신이 보고 듣는 모든 것에 대한 해석들을 스스로 해결한다. 위에서도 말하지 않았는가. 정신적 승리법이나 혁명에 대해 느끼는 신명 등. 그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그를 위해 충고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아큐에게 무게감 있게 살아가라고 충고해준다. 아큐의 반응은? 귓등으로 듣지도 않고 자신에게 충고를 해준 그 사람을 욕할 것이다. 아니면 귀를 한번 후비고는 멍한 표정으로 자리를 뜰 것이다. 아큐는 남의 말에 휘둘릴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돈이 없어 며칠을 굶고, 옷이나 집이 없어도 충분히 살아간다.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그는 그만큼 강하다. 여기서 강하다는 것은 의지가 굳거나 생활력이 강하다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어떤 표현을 써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삶에 단단히 붙어있다는 느낌이랄까. 이런 강함.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강함. 그만큼 그는 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일 테다. 여기서부터 아큐에 대한 이해, <아큐정전>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지 않을까.


Posted by masoume
History/루쉰2010. 8. 2. 00:13
**서울신문에 게재한 원고입니다.

[고전 톡톡 다시 읽기] <18> 루쉰 ‘아Q정전’

아큐는 곧 우리네 모습

중국 근대 문학가 루쉰(迅)은 ‘아Q정전’을 일간지 ‘천바오’(晨報)에 1921년 12월4일부터 1922년 2월12일까지 주 1회 또는 격주로 연재했다. 첫 편이 발표된 직후부터 많은 사람들이 다음엔 자기가 당하는 차례가 아닐까, 하고 전전긍긍했다. 아큐에 대한 이야기가 자신에 대한 빈정거림이라고 생각하고선 신문 기고자들을 닥치는 대로 아큐의 작가라고 의심했다고 한다. 루쉰이 작자임이 밝혀진 이후에는 아큐 이야기가 자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다니는 사람 또한 많았다. 아큐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했다. 날품팔이꾼 아큐는 이름, 고향도 알려진 바 없으며 일정한 직업도 없다. 뭐 하나 똑부러지게 해내는 것도 없다. 몰골도 형편없다. 그런데 이 볼품없는 사내, 자존심만은 강하다.

▲ 1935년 판화가 리화가 그린 작품 ‘중국이여 절규하라’.

●아큐의 정신승리법


문제
는 자존심이 특정한 장소와 시점에서 발현된다는 것이다. 그의 자존심은 강자 앞에서는 자취를 감춘다. 강자 앞에서 무력하다. 모욕을 당해도 자존심을 쉽게 드러내지 못한다. 싸울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노와 치욕만은 어쩔 수 없다. 이런 욕망의 배출구를 찾아야 한다. 어디에서? 그는 자신보다 더 약한 자들에게서 이를 찾는다. 가령 노예도 폭군이 될 수 있다. 그에게 자식과 부인이 있는 한에서 말이다. 그렇지만 아큐는 마을에서 가장 무력한 부류에 속하며 가족조차 없다. 따라서 자신보다 약한 자를 쉽게 찾을 수 없다. 대략난감한 상황이다. 이 때는 스스로를 공격한다.

“그는 곧 패배를 승리로 전환시켰다. 그는 오른손을 들어 힘껏 자기 뺨을 두세 차례 연거푸 때렸다. 얼얼하게 아팠다. 때린 후에 그는 마음이 평안해지기 시작했는데, 마치 때린 것같이 몹시 만족하여 의기양양 드러누웠다. 그는 푹 잠들었다.”

스스로를 때리면서, 때린 ‘나’와 맞는 ‘나’로 나를 분리한다. 그리고 때린 ‘나’를 기억하고, 맞았던 ‘나’를 망각한다. 이때 분노와 굴욕감은 다른 곳으로 향한다. 자신은 폭력을 당한 존재가 아니라 행사한 존재라는 환상을 통해. 아큐는 자신이 당한 분노와 굴욕감을 자각하지 않는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는 존재이며, 이런 고양감 속에서 분노와 굴욕감을 소멸시켰기 때문이다.

아큐는 말한다. 자신도 주인이라고. 그러므로 아큐는 늘 즐거울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놓인 상황에 자신만의 의미를 부여하고 만족한다. 루쉰은 이를 ‘정신승리법’이라고 부른다. 결국 바뀌는 것은 없다. 아큐는 단 한 번도 ‘패배’를 경험하지 못한다.


●즐거운 환상 vs 썰렁한 일상


우리는 자신이 부정될 때 존재의 변신을 꾀한다. 그러나 아큐는 이런 체험의 현장으로 뛰어들지 않는다. 루쉰이 아큐를 노예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예들은 본능적으로 자기 해체를 거부한다. 이들은 오직 눈앞의 환상만을 붙잡으려 할 뿐, 패배라는 쓰디쓴 일상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일상 속에서 괴로움이나 불안과 대면한다. 이 불안과 괴로움을 통해 나를 구성하는 표면인 습속에 대해 회의하게 된다. 이 때야말로 무엇인가를 배우게 된다. 즉 습속을 날카롭게 재단하는 힘, 그리고 습속으로부터 자유로운 공간이 있음을 체험하게 된다. 그럼에도 자유를 향한 절연(絶緣)이 그리 쉽지만은 않다.

노예는 정해진 길로 가길 원하지 낯선 길로 향하기를 바라지 않는다. 결국 이들은 습속을 거부하지 못하며 자유 또한 체험하지 못한다. 아니 노예들은 습속과 억압을 욕망하지 자유를 욕망하지 않는다. 이들은 한사코 자유를 거부한다. 루쉰은 ‘허(虛)를 실(實)로 오판’한 것에서 환멸의 비애가 생겨난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이 환멸 앞에서 몸을 돌려 단단해 보이는 것으로 되돌아간다.

가령 아큐는 패배에 직면할 때, 환멸의 비애를 다른 환상으로 치환한다. 그러나 단단해 보여도, 즐거워 보여도 ‘허’(虛)는 ‘허’(虛)다. 아큐가 계속 미끄러져 간 것도, 이 환멸의 비애를 애써 부정하기 때문이다. 그는 환상 이후에 오는 실재의 삶, 즉 썰렁한 일상을 견디지 못했다. 아니 견디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썰렁한 일상은 회피된다. 아큐는 애써 밝은 빛 속에 있다고 자위하지만 그가 있는 곳은 자신이 서 있는 곳조차 알 수 없는 깊은 어둠, 무명의 세계다.


●행인-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자!

 
그런데 루쉰은 이런 아큐의 어둠을 지켜볼 뿐 대안을 쉽게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아큐의 욕망을 그대로 보여줄 뿐이었다. 사실 사람들은 허위와 환멸을 붙잡고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이런 허(虛)한 세계는 아큐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일부이기도 하다. 우리 자신의 무명(無明)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한 우리 역시 아큐다. 무상함, 그리고 어둠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인정할 때 우리는 겸허해진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황량한 일상을 환상 없이 만날 수 있다. 

루쉰은 사람들이 이런 허위나 환상, 명분에 걸려서 넘어지지 않기를 희망했다. 왜냐하면 자기를 기만하지 않는 인간만이 황량하고 썰렁한 일상 속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허(虛)가 삶의 조건임을 인정하는 이들은 자신이 별로 의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삶의 무상함과 가변성을 알고 있기에 조심스럽게 상황에 한 발을 앞으로 내민다.

따라서 자신이 별로 의지가 되지 않음을 아는 사람들이야말로 도리어 계속 길을 걸어 갈 수 있다. 자신에 대한 환상이 없기 때문에 한 발 한 발 내딛게 된다.

썰렁한 일상 속, 그 길이 보이지 않은 삶 속에서라도 빛을 찾아내면 된다. 칠흑 같은 어둠이라 해서 빛이 없는 게 아니다. “희미한 빛, 어두컴컴한 빛, 편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어둠, 아주 캄캄한 어둠” 처럼 어둠 속에서도 빛은 존재한다. 빛과 어둠이라는 말의 환상에 빠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최진호 수유+너머 남산 연구원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