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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8.08 현실을 살아가기 1
  2. 2010.08.05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들 2
History/루쉰2010. 8. 8. 17:07

<2NE곰-납함 에세이>


현실을 살아가기



명혜원


 

박수근作

아아, 이것이 20년 동안 한시도 잊지 못한 고향의 모습이란 말인가? 내가 알고 있는 고향은 전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내 고향은 훨씬 더 좋았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며, 그 좋은 점을 말로 표현하려하면, 금새 그 모습은 사라지고 말은 잃어버린다. 역시 이런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나 자신을 위로하였다. ‘본래 고향이란 이런 것이다. 진보도 없는 대신, 내가 느끼는 바와 같은 적막함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나 자신의 심경이 달라진 탓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번의 내 귀향은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라고.




 루쉰의 소설 '고향' 속 20년만에 고향을 찾은 주인공의 심경묘사이다. 이사를 위해 고향을

박수근作
찾았을 때 그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기억하던 고향의 모습과 너무나도 다른 쓸쓸하고 황폐한 마을이 생기를 잃은 채 가로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자신이 20년 동안 그리워하던 고향이 정말 맞는지 가슴에 슬픔이 솟아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과거 고향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그리며 좋은 점을 말해 보려 하면 그 모습은 순식간에 지워지고, 표현하고자 했던 말도 없어져 버리고 만다. 그가 알던 고향의 아름다움이란 그가 그려낸 막연한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고향’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것만 같은 막연한 공간으로서의 이미지가 있기도 하고, 지친 나를 포용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푸근함도 존재하는 듯하다. 고향에서의 추억은 아련하나 즐거운 감정을 만들어내 되새기고 은미하며 현재를 즐겁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준다.

 하지만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두고 만나지 않는 것이 나았다는 말이 있듯이 시간이 흘러 마주하게 된 고향은 그가 막연히 그리던 아름다움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특히 추억 속 자신의 작은 영웅인 룬투는 모진세월을 견디며 ‘등신 같은 인간’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순수하던 어린시절 주고받은 우정은 그들에게 남아 있지 않다. 룬투와 그의 사이에는 이제 그를 ‘나으리’라고 부르는 벽이 생겨나 있었다. 고향의 아름다운 이미지와 더불어 어린시절 추억까지 깨어져 버린 것이다.



옛 집은 차츰 나로부터 멀어져 갔다. 고향의 산천도 차츰 나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내 둘레에 보이지 않는 높은 벽이 쳐져 나 혼자 그 속에 남겨진 듯한 생각이 들어 울적해질 뿐이었다. 수박밭의 은목걸이를 한 어린 영웅의 모습은 다시 없이 선명하였었는데, 이제는 갑자기 희미해져버렸다. 이 또한 견딜 수 없이 슬픈 일이었다.


 

박수근作
오랫동안 타지 생활을 하던 그가 마음한편에 두었던 기억하고 싶던 추억이 사라졌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슬픔이었을 것이다. 이제 막연히 아름답다 칭하며 떠올릴 마음의 안식처가 사라져버렸다는 점과, 자신이 그리던 아름답던 추억이 단지 과거의 기억일 뿐이었다는 점이 그를 슬픔으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깨닫게 된다. 자신은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고, 룬투는 룬투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흔히 현재의 상황이 싫어지면 과거를 떠올리며 추억하게 된다. 대학생 때는 ‘고등학교 때가 좋았지’, 고등학교 때는 ‘중학교 때가 좋았지’, 중학교 때는 ‘초등학교 때가 좋았지’ 등 현재의 상황과 과거 좋았던 일부를 비교하며 돌아가고 싶은 추억으로 만들어 떠올리며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를 버텨나갈 수 있는 일종의 희망이 된다. 즉 추억이라는 희망은 사람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그러나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가공된 이미지속 추억에 너무 의존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들을 직접 마주했을 때 크나큰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평생 추억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기란 불가능 하다. 추억이란 것은 우리가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어느 순간 생겨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추억과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가? 결론은 2가지다. 희망적 추억을 만들고 그것을 직접 대면하지 않은 체, 평생 추억을 그리며 살아가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추억이 추억일 뿐임을 인식하고 너무 큰 기대와 희망을 가지지 않고 마주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조카와 룬투의 자식이 잠깐의 만남으로 서로를

타향도 정이들면 고향이라지
그리워하는 정이 생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그들은 자신과 룬투와 같은 단절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그러기 위해선 이들이 기존과 는 다른 전혀 새로운 길을 가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곧 이러한 바람조차 희망임을 직시하며 위와 같은 말을 하게 된다.

 우리가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막연히 그리게 되는 추억 또한 희망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땅위의 길과도 같은 희망. 우리가 걸어갈 수, 실천 할 수 있어야만 희망은 만들어 질 수 있게 된다. 고향에 대한 추억이, 추억에 대한 이상이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절망이 되어버린 것은 고향과 추억에 대한 이상이 과거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추억에 의지하며 현재를 부정하고 살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자신의 희망과 현실이 마주했을 때의 간극으로 절망하며 패배감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과거를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희망만을 의지한 체 살아가는 사람들도 아니고,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루쉰2010. 8. 5. 11:45

  무릇 우매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멀쩡하고 건강하더라도 하잘것없는 본보기의 재료나 관객이 될 수 밖에 없으며, 병으로 죽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불행하다고 여길 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첫 번째 중요한 일은 그들의 정신을 고치는 데 있다. 당시 나는 정신을 고치는 데 있어 최선으로 당연히 문예를 들어야 한다고 여겼다.

  루쉰은 그의 첫번째 소설집 『납함』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납함』에는 그가 말하는 '우매한 국민'에 대한 소설이 여럿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루쉰의 이러한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라면 아마도 「풍파」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풍파」는 신해 혁명 직후의 어느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뱃사공 칠근은 혁명의 바람을 따라 변발을 과감히 잘라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황제가 복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이미 변발을 잘라버린 칠근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더구나 마을 근방 최고의 식자인 자오치도 변발이 없으면 큰 화를 당할거라며 으름장을 놓자 칠근과 그의 가족들은 절망에 빠진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자 황제의 등극 소문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황제가 등극하지 않았나보다 생각하고 다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이 소설은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걸까? 여기에서의 '우매한 국민'이라면 단연 칠근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다. 그들은 바깥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아예 무관심하지는 않다. 하지만 어설프게 아는 것이 오히려 더욱 독이 된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칠근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하기를
 
"황제께서 등극하셨대"라고 했다.
  칠근의 처가 잠시 멍청히 있더니, 갑자기 크게 깨닫기라도 한 듯이 말했다.
  "참 잘됐네요. 그러면 또 대사령(大赦令)이 내리지 않겠어요!"
  칠근은 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변발이 없잖아."
  "황제께서 변발이 있어야 한대요?"
  "황제께서는 변발을 요구하거든."
  "당신 어떻게 알아요?"
  칠근의 처는 조급해져서 다그쳐 물었다.
  "함형주점 사람들이 모두 있어야 한댔어."
  칠근의 처는 이때 직감적으로 사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함형주점이라면 소식이 정통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작품을 모두 읽고 나면 황제의 등극이 실제로 고려되기는 했던 일인지 의심이 든다. 만일 실제로 등극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대사령이 내려지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은 변발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함형주점에서 들려오는 소식이라면, 학식이 있는 자오치 어른의 말이라면, 책에 쓰여져 있다고 하면 모두 맞는 말인줄만 안다. 이런 관계는 상당히 위험하다. 어느 한쪽의 견해나 잘못된 정보 따위를 틀림없는 사실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러한 지식적 권력에 대항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루쉰의 말처럼 문예로 그들의 정신을 고쳐주어야 할까?

이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계몽'이다. 계몽이라면 지식인으로서 응당 행해야할 역할이지만 '정신을 고쳐주겠다'는 식의 접근 방법은 곤란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위에서 아래로' 가르치는 수직적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이 마을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일깨워 준다고 한다면 그건 그들이 '주체적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어야 한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지식이란 정세를 아는 것, 즉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똑바로 아는 일이다. 그러나 물론 이들이 그걸 제대로 알고 싶지가 않아서 모르는 것은 아니다. 생활 환경 자체가 세상사를 파악하기에 어렵기 때문이다. TV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이 구석진 시골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이 무슨 수로 나랏일을 알겠는가? 그러다보니 기껏해야 함형주점에서 근거 없는 소문을 주워듣는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떤가? TV도, 인터넷도 있는 지금에는 우리가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면서 살고 있는가?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있는 나랏일들도 어쨌거나 언론을 한 번 거쳐서 나온 정보다. 게다가 서로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전하는 말이 다르니 우리가 언론을 통해 정세를 객관적으로 본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들이나 「풍파」에 나오는 마을 사람들이나 크게 다른 처지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지 소설 속 인물들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지식적 권력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내가 여기에서 그 모든 방법을 거론할 수는 없다. 물론 알지도 못한다. 다만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가지 방법을 말할 것인데, 그건 자신의 의견과 타인의 의견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일이다.「풍파」의 내용으로 이야기하자면 그것이 칠근 자신의 생각인지, 아니면 함형주점 사람들의 생각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또 책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책에서 읽은 얘기라고 무조건 자신의 의견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먼저 사람들이, 혹은 책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면 자신이 그 의견에 동의하는지, 아니면 다른 의견이 있는지 그 입장이 확실히 서게 된다.「풍파」의 인물들이 못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그들은 변발이라는게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서 변발을 자르느냐 보존하느냐를 곧 자신들의 입장으로 삼으니(자오치라는 인물도 포함하여) 껍데기 밖에 없는 지식이 통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우리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정말 나의 의견일까? 아니면 어디에서 들은 얘기를 나의 의견으로 삼은걸까? 만약 후자라면, 그러한 의견은 어떤 생각에서 나온 의견일까? 그리고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하는가? 이러한 질문이 있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지식'이라고 할만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특정한 매체가 가진 지식적 권력을 자연스럽게 분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