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카프카2010. 8. 5. 11:00
 

<2ne곰-카프카 파이널 에세이>


'가족'이라는 이름의 표상을 뒤집는 카프카

- '변신'을 통해 살펴본 가족의 모습 -


 명혜원


 가족이란 이름의 표상
 

페르난도 보테로 作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가족간의 관계는 다른 어떠한 관계보다 앞서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TV광고나 드라마 소설책에서 가족의 표상을 만나게 된다. 가족하면 떠오르는 것은 투닥투닥 다투기는 하나 서로를 아끼며 위해 주는 마음은 의심할 수 없고, 가족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름답고도 당연한 미덕인 이미지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역할, 어머니는 어머니의 역할, 자식은 자식의 역할을 담당하며 서로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나간다. 우리가 접하게 되는 대부분의 드라마나 소설속 가족의 이야기는 이러한 가족의 이미지와 조금이라도 어긋나게 되면 발생한다. 자식이 자식의 역할을 하지 않을 때, 아버지가 아버지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가족의 단합을 위한 개개인의 희생 없이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결국 대부분의 드라마는 가족의 갈등을 지나 서로를 위해주는 진심을 알고 행복하게 막을 내리게 된다. 24년을 살면서 항상 교육받고 주입되어진 가족의 모습은 이러한 터라 나에게도 가족의 이미지는 배려가 중시되는 애정의 관계였다. 가족은 동등하고 평등한 위치로 자신의 역할을 완수 할 때만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생각.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표상 속 가족의 모습이라면 우리가 보지 않으려고 외면했던 가족의 이면을 카프카는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


 경제적 상황에 따른 가족의 변화

 그레고르 짐자의 가족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그가 벌레로 변해 버린 후 다양한 변화를 한다.


'그러면 여동생이 돈벌이를 해야 할까? 그 애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밖에 안 된 어린애로 지금까지 즐겨하던 생활 방식이란 옷이나 잘입고, 늦잠 자고, 집안일을 도와주고, 몇 가지 간단한 유흥에나 끼고 바이올린을 켠다든지 하는 일이었다.' (136p)


그레고르 짐자의 여동생, 그레테의 모습은 요즘 학생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부모님의 보호아래 학교공부, 친구들과의 간단한 유흥, 취미생활 등을 하게 된다. 17곱살이면 보호받아야 하고 생계를 위한 일을 해야 하기엔 너무 어려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대부분에 생각이다.

페르난도 보테로 作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도 이러한 의식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그가 생각했던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라고 생각했던 그레테는 오빠가 벌레로 변해버리고 난 후 많은 변화를 하게 된다. 처음 벌레로 변한 오빠를 발견한 후 울기만 했던 그레테. 그 후 부모님을 대신해 오빠를 돌보는 일을 자연스럽게 담당하게 된 그녀는 오빠를 돌보는 일에 대해서는 자신만이 할 수 있고,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자신만이 할 수 있다고 믿는 이일에 누군가 개입을 하려 하면 그녀는 경계를 하며 거부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의존적이며 울기만 하던 그녀가 가족의 누구보다 잘 알고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생겨서인지 점점 활기를 띈 성격이 되어간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17살 어린 소녀가 이제는 판매원으로 취직해 일을 하고 보수를 받는다. 거기에 더 나은 직장을 위해 밤마다 공부하게까지 된 것이다.

 감성적이고 감정적으로 상황을 마주하던 그레테는 사라지고 없다. 벌레가 된 오빠를 보며 안타까움과 슬픔, 애정을 주던 그레테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생기고 가족경제에 보탬이 되는 일을 시작함과 동시에 벌레를 오빠로 생각하는 것, 그 벌레에 가족이 메여있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는 말을 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 되어있었다.

 가족이란 안전한 울타리와 그속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던, 나약했던 그레테가 자신의 삶을 살기위해 일하면서 강해지는 모습을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사람들이 종종 나에게 하는 '넌 고생을 해봐야 단단해 질 수 있어'라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생계를 위해 일을 하게 되면 힘은 들지만 사람이 단단해질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의견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다는 것. 가족들간의 관계에서도 더 이상 보호받기위한 어리광을 부리지 않게 된다는 것을 그레테가 보여준 모습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그의 아버지 또한 많은 변화를 하는 인물 중 한명이다.


' 실생활비는 벌어야만 했다. 아버지는 아직 건강하긴 하지만 나이가 들었고, 벌써 오 년째 일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아무튼 아버지에게서 너무 많은 부담을 바랄 수는 없었다. 어려운 실패의 삶을 보내다가 처음으로 휴식하게 된 지난 오 년 동안에 아버지는 살이 많이 쪄서 둔해지셨다.'(136p)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하기전 기억하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기에 자신이 돌보고 부양해야 한다고만 믿었던 아버지. 가족들간의 관계에서도 그다지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보기 어려웠던 아버지는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해 자신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껴서인지 점점 변하기 시작한다.


' 실은 그는 변화된 상황에 대응할 준비를 했어야 했다. 그렇더라도, 그렇더라도 저 사람이 아버지일까? 전에 그레고르가 업무 여행에 나간 때면 피곤에 지쳐서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던 바로 그 사람일까? 저녁에 귀가할 때면 잠옷 바람으로 안락 의자에 앉아 나를 맞아주던 사람,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해서 반갑다는 표시로 손만 쳐들던 사람, 일 년에 두세 번 일요일 또는 큰 명절에 드물게도 함께 산책을 갈 때면 워낙 느리게 걷는 그레고르와 어머니 사이에 서서 낡은 외투를 몸에 두른 채 언제나 조심조심 지팡이를 내디디며 더욱 천천히 가던 사람, 무슨 말을 할 때면 거의 언제나 발걸음을 멈추고 옆에 가는 사람들을 자기한테로 불러모으던 그 사람일까? 그런데 이제 그 사람이 꼿꼿하게 서 있으면서 은행 급사처럼 금단추가 달린 푸른 제복을 입고, 상의의 높고 빳빳한 칼라 위에는 억센 이중 덕이 나와 있고, 숱이 많은 눈썹 아래에는 검은 눈이 생생하고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147p)'


 

페르난도 보테로 作

 그레고르의 기억속 아버지의 모습은 도저히 자신을 대신해 일할 수 있는 분이 아니었다.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자신이 아버지를 부양해야만 하면 그는 자신이 벌어준 돈에 의해 노년을 편안하게 보내시는 것이 그의 행복이며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경제적 상황을 책임져야하는 아버지의 상황을 좋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는 일을 시작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생기를 찾았다. 심지어는 집에서도 회사 제복을 벗기 싫어하는 것, 마치 항상 일을 할 태세로 제복을 입고 잠자리에 드는 것 등을 보면 자신의 상황을 행복해하는 것 같아 보인다.

 가족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도 매우 극진하다. 굳이 부축을 거부하는 아버지를 침실까지 양모녀가 팔짱을 끼고 부축해가는 모습이며, 아버지의 쇼파에 계속 앉아 있겠다는 고집을 달래는 어머니의 태도는 매우 인상적이다. 어버지는 이런 상황을 즐기는듯하게 묘사되는데 여동생과 어머니의 아버지를 위하는 공손한 태도가 그를 '이게 인생이군, 이게 내 말년의 휴식이구먼'이라는 말까지 하게 만든다.

 몸이 편안한 것보다 가족에게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이를 인정받았을 때 더 행복해하며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우리시대 아버지들의 이미지와 겹쳐졌다. 가족을 위해 일을 하고 그로인해 가족들에게 자신의 권의를 인정받고 큰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아버지들의 모습이. 그레고르에게 가족의 생계를 맡기고 있을 당시 기운없어 보이던 노인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그의 당당함이 가족관계에서 경제적 역할이 한사람에게 미치는 경제적 요인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다.



' 세상이 가난한 사함들에게 시키는 온갖 일을 식구들은 최대한으로 해냈다. 아버지는 말단 행원들에게 아침 식사를 날라다 주었으며, 어머니는 모르는 사람들의 내의를 만드느라 헌신했고, 여동생은 고객의 명령에 따라 판매대 뒤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식구들의 힘으로는 더 이상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151p)

 

 그레고르 짐자의 가족들은 경제적 버팀목인 그가 사라지자 역설적이게도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가족을 위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경제적으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자신감 넘치고 자기주장을 확실히 하게끔 만들어준 것이다.

 이와 동시에 경제적인 힘이 생긴 아버지의 모습 변화는 우리에게 더욱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경제적인면이 가족관계에서도 권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그중 한가지이다. 이는 현대 사회속 대부분의 가정에서도 아버지가 가장 큰 힘을 가지는 이유는 가족의 경제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있어서라고 연결지어볼 수 있다. 가족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때 가족의 행복이 유지된다는 말은 어쩌면 가족 속 권력관계를 깨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행복이 지켜 질 수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사랑과 믿음이 우리가 그리는 가족의 표상이었다면, 그속에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지만 표상에 가려져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경제측면에 따른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있었다. 카프카는 경제적 상황 변화에 따른 가족구성원의 변화를 통해 우리에게 사랑과 배려, 희생이라는 가족의 표상속 다른 이면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페르난도 보테로 作

 물론 가족이라는 표상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족은 우리가 그리는 이미지처럼 서로를 아껴주고 위해주는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가족도 작은 사회이기에 권력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권력관계에 휘둘려 나약해지지 않기 위해선 경제적인 독립이 가능해야만 가능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가족간의 진정한 배려와 사랑이 존재하기 위해선 경제적 독립이 우선시되어야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History > 카프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 개의 감옥, 갇혀진 욕망 그 너머  (0) 2010.08.03
실종자, 카알 로스만  (0) 2010.08.03
카프카 <실종자> 에세이  (0) 2010.08.0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카프카2010. 8. 3. 18:20

2NE곰 카프카 파이널 에세이

세 개의 감옥, 갇혀진 욕망 그 너머


카프카의 단편, 욕망의 국카스텐(guckkasten)

“내 잡문에 씌어진 것은 언제나 코이며, 입이며, 털이다. 하지만 그것을 합치면 하나의 형상인 전체로 될 것이다”[각주:1]
  루쉰의 잡문처럼 카프카의 단편은 짧지만 강렬한 이미지들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메시지가 아닌 ‘이미지’인 것은, 명확하게 메시지로 표현하기엔 카프카가 보여주는 세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카프카의 단편이 모호한 허상만 담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루쉰이 자신의 잡문에 대해 평했듯, 카프카의 단편들도 각기 떨어져있을 때는 “코이며, 입이며 털”이기에 전체를 파악하기 쉽지 않은 것뿐이다. 물론 가끔씩은 코, 입, 털조차도 구분해내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난해함 속에서도 재미있는 것은 그 단편의 조각들이 국카스텐, 즉 만화경 안의 알갱이처럼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며 다채로운 무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만화경 안을 들여다보듯 카프카의 단편들을 찬찬히 보면 색다른 무늬들을 포착할 수 있다.  
  몇 번을 흔들어 포착해낸 하나의 코드. 불완전한 알갱이들의 이산과 집합이 만들어낸 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가 바로 ‘욕망’이다. 카프카는 그의 소설에서 끊임없이 ‘욕망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편입의 욕망, 탈주의 욕망, 권력의 욕망. 그의 소설들은 욕망에 대한 각기 다른 단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욕망의 단상 또한 보는 각도에 따라서, 모여든 알갱이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때문에 좀 더 명확한 상을 보기위해 알갱이를 선별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선택 된 카프카의 단편이, 「어느 단식 광대」,「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이다. 욕망의 국카스텐인 두 단편 소설에는 각기 다른 세 개의 감옥이 등장한다. 감옥 속에 갇혀져 있는 무엇. 그것은 바로 욕망이다. 세 욕망은 서로 다른 표현, 소통 방법을 가진 채 창살 안에 ‘갇혀져’ 있다.

광대와 표범, 철창 안에 갇힌 욕망


  세 개의 감옥을 흔들어 볼 수 있는 그 각도들은 무엇일까. 욕망은 말 그대로 무엇인가를 바라고, 또 원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욕망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욕망의 대상을 ‘어떻게’ 욕망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런데 ‘무엇’과 ‘어떻게’ 사이에는 선후관계가 없다. 오히려 ‘무엇’은 동시에 ‘어떻게’이며, ‘어떻게’는 그 자체로 ‘무엇’이다. 즉, 욕망은 표현되는 그 방식으로 정의된다. 욕망의 방식이 중요한 만큼 그 욕망과 시대의 관계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대와 욕망이 만나는 지점에서 욕망이 발현되고, 그 방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시대의 욕망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욕망에 큰 영향을 끼친다. 시대와 욕망은 서로가 서로를 얽어매어 욕망의 시대, 시대의 욕망을 만들어낸다.
  여기 시대의 욕망을 재현해주는 한 광대가 있다. 광대는 시대의 욕망을 배설, 대리해주는 존재이다. 광대의 유희를 보며 사람들은 자기 안에 갖고 있는 욕망을 배설해내고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단식광대 또한 극한의 단식을 통해 관객들에게 탄성을 자아낸다. 관객들은 자신들은 할 수 없는 단식, 절제의 행위를 극한으로 밀고나가는 광대를 보며 희열을 느낀다. 단식 광대는 철창 안에서 단식이라는 광대놀음으로 시대의 욕망, 시대의 광대가 된다. 그런데 단식광대의 유희가 벌어지는 장소는 다름 아닌 철창 안이다. 감옥 안에 갇혀있는 광대를 사람들은 저 멀리서 신기한 듯 구경 한다. 철창을 경계로 광대는 일반인과는 다른 사람으로 격리되며, 이로 인해 단식행위는 더 대단한 것이 된다. 단식광대, 개인의 단식에 대한 욕망은 감옥이 씌워짐으로써 하나의 표상, 상징이 되어버리고, 그 상태로 사회, 군중에 의해 소비된다.
  그런데 시대의 욕망이라는 것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이제 단식에 열광하는 ‘단식을 위한 시대’도 지났다. 절제의 극한을 찬양하는 것은 더 이상 시대의 코드와 맞지 않는다. 욕구를 인내하는 것이 하나의 해방구, 카타르시스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욕구의 무한 증식만이 열광의 대상이 된다. 결국 단식 광대는 시대에 의해 버려져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감옥 안에서 홀로 굻어죽은 채 말이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단식의 끝을 보았으니 죽기 전 단식광대는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단식 광대의 생명이 끊어진 그 철창 안으로 새로운 욕망, 새끼 표범이 넣어진다. 표범은 자신이 철창 안에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생명력이 넘쳐 보인다. 그 무엇도 먹지 않았던 단식광대와 달리, 새끼 표범은 철창 우리 안에서 마음껏 고기를 물어뜯는다. 표범은 시대가 원하는 욕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상이다. 사람들은 이 새로운 ‘욕망 덩어리’가 보여주는 욕망의 그르렁거림에 열광하며, 표범 우리 앞을 떠날 줄 모른다. 그러나 사실 관중이 열망하는 것은 표범의 생명력이 아니라 철창 안에 가두어진 야생의 욕망이다. 표범 우리의 철문이 열리면, 그 누구도 표범에 열광하지 못할 것이다. 공포에 질려 도망가기 바쁠 것이다. 단식광대의 철창처럼 표범의 감옥 또한 그를 군중과 격리시키고 하나의 ‘소비되는 욕망’으로 박제화 시킨다. 표범도 언제 단식 광대처럼 버려질지 모르는 운명이다. 결국 단식광대도, 표범도 박제된 광대, 욕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감옥 밖으로 나온 원숭이, 인간세계 안에 스스로를 가두다

 
이번에는 앞의 두 존재들과 달리 감옥에서 벗어나 출구를 찾은 한 수인(囚人)이 있다. 그는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감옥의 문을 열었으며, 스스로 만족할 만한 지위를 얻었다. 자유로운 그, 그는 다름 아닌 원숭이이다. 원숭이는 말한다. “저는 자유를 원치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의 출구만을 원했습니다. 그 출구가 하나의 착각일지라도 말입니다.” [각주:2]감옥에 갇힌 원숭이는 ‘출구’를 욕망했고 출구를 위해 원숭이이길 포기했다. 말하자면, 이 원숭이는 출구를 ‘학습한’ 셈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다른 길은 없었다고 말한다. 인간을 모방하고 인간세계로 편입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길이자 욕망인 것이다. 그는 악수를 배우고, 술을 마시고, 담배피우며, 심지어 인간의 언어로 말을 한다. 그래서 결국 그는 그가 원하던 대로 유럽인의 ‘평균 교양’에 도달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원숭이는 참 당돌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원숭이는 이러한 반응을 예측하기라도 했던 듯이, 자신의 노력에 대한 평가절하는 사양한다고 말한다. 다른 인간의 판단은 원치 않는다며 말이다. 원숭이 말대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했으며, 그만한 대가를 얻었다. 이것에 만족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착각일지도 모르는 자유지만 나는 행복하다, 만족한다. 원숭이는 그를 가두고 있던 작은 감옥 속에서 벗어나는 훌륭하게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는 작은 철창 보다 훨씬 거대하여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세계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꼴이 된다. 원숭이도 결국 단식광대나 표범처럼 갇힌 존재이다. 인간세계로 편입되고 싶은 욕망, 그것은 원숭이에게는 생존의 열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욕망을 모방한다. 인간세계의 욕망에 자신의 모든 욕망을 동일화 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모방이 그에게는 또 다른 하나의 ‘감옥’이다. 물론 그는 보이지 않는 감옥 속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그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사회의 욕망을 모방해야한다. 새로운 와인이 나오면, 그 와인의 이름을 외워야하고, 다른 유행이 오면 또 그 유행에 맞춰가기 급급해야한다. 이런 것들을 족쇄가 아닌 축복으로 여긴다면야 더 이상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개의 감옥들. 감옥에 갇힌 것이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혹은 그 안에서 행복하든 불행하든 간에 결국에는 ‘감옥’이다. 그 공간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동일한 속성을 지닌 곳이라는 얘기다. 단식광대와 표범의 욕망이 발현되는 지점은 판이하지만 갇힌 욕망이라는 동일한 성격을 지니듯, 원숭이의 자유로운(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 세계도 똑같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사람들에게 그는 특이한 원숭이, 구경거리의 대상일 뿐이다. 이렇듯 감옥, 철창은 욕망의 주체들을 소외시키고 한낱 ‘대상’으로 격하시킨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욕망을 소외시키는 주체, 시대와 사회를 언급할 수밖에 없어진다.

욕망과 시대라는 허상, 상상력의 곡선

시대는 욕망을 지배하고, 욕망은 또한 그 시대를 지배한다. 각 시대, 사회 마다 내세우는 특정한 가치들이 있다. 중세의 신, 조선시대의 유교 논리 등, 이러한 가치들은 그 시대 사람들의 욕망에 하나의 틀이 되어준다. 사람들은 그 틀을 따라 자신들의 욕망을 배출해낸다. 그런데 이 배출은 사실 진정한 욕망의 배설이라고 할 수 없다. 앞서 말했듯 배설되는 것은 각 개인들의 욕망이 아니다. 자신들의 욕망이라고 믿고 있지만, 단지 시대와 사회가 정해준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주체는 소외되고 그 자리에 욕망만 남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실 시대의 욕망이라는 것도 허상에 불구하다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욕망의 종류는 달라지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인간의 <정당해>와, 가진 건 돈뿐이야 하는 인간의 <에헴>과, 어때 나 이쁘지 하는 인간의 <흥>은 시간만 다를 뿐 같은 성질의 관념이야.”[각주:3]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현실’의 가치 관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욕망의 본질은 같다. 시대는 욕망의 종류를 정의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노선을 강요 한다. 그 노선은 어쩌면 시대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욕망의 본질을 구성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시 한 번 욕망의 탄생과 맞닿아 있다. 한 사회의 주류적 욕망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사회, 경제, 문화적인 다양한 요인이 관여한다. 그러나 어떠한 시대적 욕망이 탄생하던 간에 이 욕망이 굴러가는 힘은 간단하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바로 끊임없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것’. 단순화시키기에는 뭐하지만, 자신보다 좀 더 나은 존재를 부러워하고, 그만큼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사실 여기에서 ‘좀 더 나은 존재’라는 것도 단지 시대의 욕망에 조금 더 충실한 사람을 의미할 뿐이다.) 이것이 시대의 욕망을 작동시키는 원리이다. 이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계속되는 한 시대의 욕망은 그 커진 힘으로 자신과 배치되는 욕망들을 삼켜버린다. 이쯤 되면 “1년에 한 번씩 예수가 온다 한들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각주:4] 정도의 궁상스러움과 회의가 밀려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역사의 반복과 순환처럼, 시대의 욕망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불쌍한 존재의 한계일까?
  사실 허상을 깨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것이 허상임을 깨닫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그 허상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시대의 욕망에서 한 발짝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시대의 욕망이 허상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상상력. 당대의 욕망이 아닌 ‘그 너머’의 욕망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그래서 사실 갇혀있다는 것은, 욕망하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 자체가 금지되는 것, 새로운 것이 있다는,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상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차원에 있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이 진정으로 감옥이며, 보이지 않는 창살이다. 그러나 이렇듯 당대의 상상력이 아닌, 자신만의 상상력을 갖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시대의 욕망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허우적거리며 불행해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어제보다 한 번 더 자위하는 세상”[각주:5], 수인(囚人)의 자격

“기적이 그런 거라면, 하고 내가 말했다. 왜 이렇듯 다들 불행한 거죠? 그게 인간이야, 하며 요한은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팡이로 바다를 갈라 보여준다 한들 내일 아침이면 또 다른 기적을 원하는 게 인간이지. 끝없이 자위를 해야 하고 끝없이 손을 씻어야 하는 게 인간이야. 그리고 또, 자위를 너무 하면 몸에 해롭지 않나요 걱정하는 게 인간이지. 그러고 돌아서면 자위도 안하는 척, 하는 게 인간이야. 휴지는 휴지대로 진창 써놓고 뭐야 휴지가 떨어졌잖아, 하는 게 인간이라구.”[각주:6]
  저는 기적을 믿어요. 티 없이 맑은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저 어색한 미소로 작게 끄덕여줄 수밖에. 그렇다고 인간이란 원래 그런 거야,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이런 말에 완전히 동의할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긍정과 체념 사이를 곁눈질 하다가 어정쩡하게 경계선에 서있다. 그러기에 소설 속 원숭이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감히’ 감옥에 있는 것을 쉽게 조롱할 수는 없다. 또한 난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감옥에서 벗어나자고 말할 자신도 없다. 비난할 자격이 있는 자, 수인(囚人)이 아닌 자 그 누구일까. 우리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어떠한 방식과 형식으로든 ‘욕망이라는 감옥’의 죄수라는 것이다. 카프카가 감옥의 이미지를 반복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족쇄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카프카는 앞서 말했듯 국카스텐이다. 만화경은 자신이 보여준 현란한 무늬에 대해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단지 그가 보여주는 모양들이 그의 메시지이다.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각자가 조각들을 해석해보고, 그 모양에 이름붙일 뿐이다.
  이름붙이는 행위에 그 어떠한 ‘자격’이 필요한가. 굳이 말하자면 그 자격을 ‘수인(囚人)의 자격’이라고, 그러니 우리, 죄수들은 충분한 조건이 된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또한 죄수로서 자신이 갇혀있는 감옥에 대해 기꺼이 궁시렁거리는 것이 권리이자 의무라고도 해두고 싶다. 그것이 무기력감이든 상상력의 곡선이든, 그러나 죄수라는 한계가 있기에 너머가 있는 것이고, 너머가 있기에 또한 한계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철창 ‘너머’를 보는 것은 죄수의 본능이다. 본능은 긍정과 체념, 어떤 판단보다도 우선에 있는 것이다. 그 본능을 “어제보다 한 번 더 자위하는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 발휘할지는 각자의 욕망이다.


  1. 루쉰, 「준풍월담 후기」중 [본문으로]
  2. 카프카 전집,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p.267 [본문으로]
  3.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p.227 [본문으로]
  4.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221 [본문으로]
  5.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221 [본문으로]
  6.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225 [본문으로]

'History > 카프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족'이라는 이름의 표상을 뒤집는 카프카  (1) 2010.08.05
실종자, 카알 로스만  (0) 2010.08.03
카프카 <실종자> 에세이  (0) 2010.08.02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카프카2010. 8. 2. 18:46

~자립과 권력~

                                                 

l         코도화 된 권력

이제 안전하지 않겠냐?” 라고 말하고 있는 우리에게 호령이 떨어진다. “ 모두들 밖에 나가서 줄을 서라!” 나는 호령이 죽음의 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는 숨을 죽이고 뒷문에서 혼자 도망간다. 멀리서부터 전차가 오는 것이 보인다. 여기는 수용소다. 총을 가진 군인들이 사람들을 재촉하고 있다. 건물에서 나온 사람들은 수용소에서 착용해야 제복을 입고 줄로 서도록 재촉 당하고 있다. 파수꾼도 지금부터 시작되는 공격을 보려고 히쭉거리면서 자기 일을 잊고 있다. 지금밖에 도망갈 기회는 없다! 나는 오직 혼자, 어떻게든 자리에서 달아난다. 뒤에서 총소리가 울리고 있다….

초등학교 입학에서 10대가 끝날 때까지, 나는 자주 같은 주제의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나는무서운 사람들에게 쫓기고 있었다. 무리는 나를 죽이려고 하고, 나는 때로는 숨고, 때로는 뛰면서 항상 겨우 살아남았다. 가끔은 편도 있었지만, 나는 항상 혼자 살아남곤 했다. 보통 위험에서 벗어난 순간에 눈을 떴지만, 심장은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처럼 크게 고동을 쳤고, 땀이 흐르며 몸이 굳어져 있는 것을 느꼈다. 꿈속에서 나는 종종 나치에 쫓기기도 했다.

나의 부모님은 사회운동을 하는 분이었다. 그리고 나에게 재일조선인이 일본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일인지를 자주 얘기하곤 하셨다. 가끔 재일조선인에 대한 폭언이나 폭력사건이 일어났으면 나에게 전해 주셨다. 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서움에 떨곤 했다. 일본이름이 없이 한국이름으로 사는 나는재일조선인이라는 것을 한눈에 있는 존재였고, 그것을 무서워했다. 어느 TV에서 나치에 대한 다큐를 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나에게 강하게 따가왔다. 광폭한 나치의 돌격대, 열광하는 독일의보통사람들, 수용소에서 펼쳐지는 학대와 살인…. 그것을 보면서 전쟁중에 일어난 일본 광동대지진이 떠올랐다. 당시 치안유지를 위해 군부가 퍼뜨린재일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던지고 있다 소문 때문에 많은 재일조선인이 학살됐다. 조선인 사냥 선두의 사람은, 군부와 일본 민중으로 만들어진 자경대였다. 자신의 주체 없어진 민중이야 말로 가장 무서웠다. “ 전쟁이 일어날 거야. 만약에 그렇게 되면 우리 가족이 먼저 죽임을 당할 거야! 어떻게 도망갈 있을까?” 머릿속에서 필사적으로 생각하곤 했다

  그런 나에게 ‘권력’이라는 것이 오랫동안 큰 협위이자 테마였다. 그런데 당시의 나에게 ‘권력’이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나의 일상과는 전혀 먼 곳에 있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왕이나 경찰, 혹은 역사에 등장하는 나쁜 통치자들이 나의 권력의 상징이었는데, 그들은 나와 동떨어진 어딘가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나의 일상이라고 하면, 마치 안개가 낀 듯이 희미했다. ‘인권’이나 ‘자유’, ‘평등’이라는 말을, 혹은 ‘권력’ 이나 ‘폭력’, ‘부정’이라는 말은 잘 들었다. 나는 그 단어들에 고도화되어 기계적으로 분노했다. 나는 ‘때가 오면’ 언제든지 정의를 위해 권력과 싸울 수 있고, 또한 권력에 대항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나에게 ‘폭력’이란 무엇이었을까. ‘폭력’은 확실히 있었다. 그것도 바로 나의 눈앞에. 그러나 신기하게도 일상에서 벌어지는 개인간의 폭력을 ‘폭력’으로써 인식하지는 않았다. 일상의 일은 ‘다른’이야기였다. 나에게 권력이나 정의는 내가 판단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그것은 완전히 코드화되어있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가 부당하다고 지정한 것, 정의라고 외친 것에 불가했다. 역설적이지만, 나에게 있어서 이른바 ‘권력’ 에 저항한다는 것이 점점 다른 사람이 외친 ‘정의’의 범위안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게 되어갔다.

 

l         권력이란 무엇인가? 카프카의 <소송>

일상속의 권력...카프카의 <소송> 은 한 명의 평범한 은행원이 재판에 말려들게 되는 모습을 그리면서 권력에 대한 하나의 시점을 보여준다. 주인공 K는 어느 날 갑자기 감시인에게 체포되었으며, 자신에 대한 소송이 시작되었다고 듣는다. 이 체포는 K 에게 전혀 영운을 알 수 없는 것이었지만, 감시인은 어쨌든 “상급기관에서..자세한 정보를 입수한(P14)” 뒤에 결정된 “틀림없는 체포(P14)라고 한다. 여기서 감시인은 스스로 판단해서 K를 체포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법률, 즉 어떤 매뉴얼에 따라 권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자기의 신분증명서를 제시하면서 무죄를 주장하는 K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말단 직원이라서 신분증명서 같은 것은 제대로 줄도 모르고 당신 문제에 대해서는 그저 매일 시간씩 당신을 지키면서 보수나 받을 뿐입니다(P14) .”민주주의 국가는 국민이 골라낸 의원이 법률을 통해 통치하는 사회다. 거기에서는 더 이상 ‘왕’ 은 없다. 대신, 법률이라는 매뉴얼이 우리를 끊임없이 통제하고 있다. 법률에는 우리가 하면 안 되는 것과 해도 되는 것, 그리고 해야만 하는 것이 적혀 있다. 그리고 그것을 안 지킨 사람들에게는 형이 내려진다. 현재, 우리에게는 자신의 행동이 ‘죄’ 인지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 그것은 법률이라는 이름의 권력에게 빼앗겨 버렸다. 우리는 벌을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끊임없이 ‘매뉴얼’ 에 비취어 봐야만 한다. 매뉴얼을 지시하는 것은 이제 법률뿐만이 아니다. 시험의 해답, 드라마나 광고들은 우리의 행동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제시한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있어야만 하는 모습을 끊임없이 제시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느 날 갑자기 알게 된다. 항상 답이 제시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자기의 판단이 아닌, 내가 책임을 져서 한 것이 아닌 행동만 하다보니까, 이제 자기 스스로의 의지로 판단하기가 무섭다는 것. 이제 무엇이 맛있는지, 무엇이 행복인지, 무엇이 위험한지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대신 말해주지 않으면 너무나도 불안해진다는 것을. 그것이야말로 지금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 아닐까. <소송> 에는 권력에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빼앗긴 사람들의 모습이 잔혹하게 그려진다. 법률을 어기고 소송을 받게 된 사람들은 모두 불안 때문에 정신이 팔려버린다. 그들은 변호사에게 자신의 행운을 맡기지만, 불안은 줄어들기는 커녕 더 한층 비참한 처지가 된다. K처럼 소송을 하게 된 블로크는 그 처지를 나타내고 있다.

― “어제 말인데” 변호사가 말했다. “내 친구인 제3 판사에게 갔었는데 화제가 점차 자네 문제로 돌아간 거야.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알고 싶은가? ” “아, 제발 말씀해주세요.” 변호사가 얼른 대답하지 않자 블로크는 다시 간청을 하고 무릎이라도 꿇듯이 몸을 구부렸다…… K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K는 놀라 이 혼란스러운 인간을 그저 멍하니 응시할 뿐이었다…그러 하여금 이리저리 몰리게 하고 친구와 적을 구별 못하게 만든 것은 소송 때문일까?..... “남에게 신경 쓰지 말게.” 변호사가 말했다.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나 하게.” “그렇습니다.” 블로크는 자기 스스로를 격려라도 하듯 이렇게 말하고 슬쩍 곁눈질해 보면서 바짝 침대 곁에 가서 무릎을 끓고 앉았다. “변호사님 저는 무릎을 끓었습니다.” 그가 말했다……(변호사) “…(블로크는) 쉬지 않고 (서류를) 읽었나?” “거의 쉬지 않았어요.” 레니가 대답했다. “단지 한 번만 마실 물을 청했었지요, 그래서 통풍창으로 한 잔 주었지요. 여덟 시에 그를 나오라고 해서 먹을 것을 주었습니다.” 블로크는 지금 자기에 대한 칭찬이 얘기되고 있으니 잘 들어두라는 듯이 K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는 이제 꽤 희망을 가진 듯 보다 자유럽게 움직이면서 무릎을 꿇은 채 이리저리 몸을 흔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변호사의 다음 말에 그의 겁에 질린 표정이 더욱 역력했다. “넌 그를 칭찬하지만” 변호사가 말했다. “바로 그게 나로 하여금 말하기 곤란하게 만드는 거야. 판사는 블로크 자신에 대해서나 그의 소송에 대해서나 유리하게 말한 적이 없어. (P205~210)

여기서 블로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블록은 이상 자신의 통제하에 있지 않다. 그의 몸은 이제 완전히 권력의 힘아래 있으며, 그에게 속하지 않는다.

 

l         사람은 양떼와는 다르다

산다는 것은 선택을 스스로가 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선택하는 것과 책임을 지는 것은 항상 같이 간다. 전술한대로 현재 사람들은 자기가 판단하는 , 자기가 책임을 지는 것을 무서워한다. 그것은산다 것을 무서워하고 있다고 말할 없을까. 판단은 권력이 한다. 그리고 권력의 핵심은 보이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자기의 재판의 핵심에 있는 사람을 만나려고 해도 만났던 K처럼, 우리는 중앙에서 전체 권력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을 수가 없다. 책임의 부재. 이것이 민주주의 사회 아래서의 권력의 특징이다. “ 같군.” 이렇게 외치면서 K 마지막에 순간에서도 권력의 책임의 부재를 목격한다.

―한 남자가 프록코트를 열더니 조끼에 꼭 끼게 맨 혁대에 달린 칼집에서 양쪽으로 날이 선 길고 얄팍한 푸줏간 칼을 꺼내 높이 쳐들어 날을 달빛에 비춰보았다. 또다시 불쾌한 인사치레 말이 시작되었다. 한 사람이 K 너머로 다른 사람에게 칼을 넘겨주더니, 그 다른 사람은 다시 K 너머로 그 칼을 되돌려주었다. K는 자기 위로 손에서 손으로 오가는 칼을 스스로 잡아 자기를 찌르는 것이 자기의 의무일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아직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목을 돌려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그는 스스로를 완전히 입증해 보일 수도 없었고, 당국으로부터 모든 일을 제거할 수도 없었다. 이러한 마지막 과오에 대한 책임은 그런 행동에 필요한 힘의 여분을 포기한 자가 겨야 할 것이다. (P246)

 

전에 나에게는 권력은 아주 먼 곳에 있었다. 그리고 세계에는 ‘나쁜 권력’ 관 ‘그 피해자’ 밖에 없었다. 그 정이은 맞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자신의 판단을 포기하고 그것을 누군가에게 맡겨 버리는 한, 나에게 권력이 작동된다. 그런 의미로 일상에서 매 순간 마주치는 선택의 순간이야말로 내가 관여하고 있는 권력의 장이다. 예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나는 약자이기 전에 한 명의 인간이었다. 권력에게 선택을 맡기는 그 순간에도, 선택하고, 행동하고 있는 사람은 다름아니라 나 자신이었다.

인도의 혁명가, 비노바바베는 권력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모든 일에서 정부의 도움에 의지하는 , 그리고 마치 정부가 신이기라도 끊임없이 호소해 대는 , 세계는 정부라는 짐으로부터 해방될 없을 것이다.

사람은 양떼와는 다르다. 당신들 스스로가 자기 일을 혼자 힘으로 해낼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내가 나에 대한 통제권을 갖는 일, 이것에서부터 혁명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