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루쉰2011. 2. 2. 19:49



장례식으로 시작해서 장례식으로 끝나는 「고독자」. 화자(선페이)는 두 장례식에서 리엔수를 만난다. 살아있는 리엔수와 죽어있는 리엔수를. 그러나 그의 모습은 시종일관 고독해 보인다.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던 모습과 여윈 얼굴로 가슴팍에 핏자국을 남기고 떠난 모습은 그가 여전히 고독했음을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 리엔수가 ‘나는 고독하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화자와 소설을 읽는 우리는 그가 지독하게 고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냉담한 성격, 실의에 빠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독신주의자, 검은 피부에 작고 마른 체격, 그리고 실패했다고 몇 번이나 울부짖고 있던 그의 서신.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그가 고독한 사람이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그의 고독이 무엇에서 기인했고 그가 왜 거기서 고독을 느끼는지는 알지 못한다. 느낌상, 그가 풍기는 분위기상 그가 고독함을 알 뿐이다. ‘고독’이란 단어로 정의되는 리엔수.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더 알기 위해서는 그의 고독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





표면적 고독


소설은 리엔수 할머니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이질에 걸려 상태가 위급했던 할머니는 리엔수를 찾지만 그가 S시에서 한스산으로 오기 전에 돌아가시고 만다. 마을사람들은 그가 도착하기 전에 모여 회의를 한다. 신당(新黨)인 리엔수가 장례의식을 신식으로 바꾸려고 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회의 끝에 마을사람들은 그에게 옛 전통대로 장례를 치를 것을 요구하기로 한다. 모두들 엄청난 충돌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리엔수는 의외로 담담하게 그 조건을 수락한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대단한 솜씨로 수의를 입혀 마을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이 놀라움은 리엔수가 신당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그가 서양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옛 도리를 무시하고 서구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맞는 말이다. 그가 옛 도리를 무시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한스산에서 유일하게 외지로 유학을 나가 서양식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이 이유만으로 의도치 않게 신당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추측해 보건데 그는 봉건사상을 떠나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위치에 있었다. 자신을 ‘불행한 청년’이나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하면서 그를 찾아오던 지식인 청년들, 글을 발표한 것 때문에 지방의 작은 신문에서 그를 공격한 익명의 인사들, 그리고 이로 인해 당한 해직. 리엔수는 당시 사회를 바꿔 보려했던 혁명가였던 것이다. 그것이 계몽운동과 관련된 것인지 계급과 관련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혁명을 꿈꾸는 지식인이라고 하기에 이 청년은 너무나 무기력해 보인다. 매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고 누군가를 방문하는 일도 없다. 그리고 사람을 냉담하게 대한다. 게다가 결혼도 하지 않아 그 처지가 더 쓸쓸해 보인다. 마치 수많은 좌절을 겪어 더 이상 낼 기운조차 없는 사람 같다.



그도 처음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밝은 청년이었을 것이다. 자유나 평화, 희망을 말하는 청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밝은 이상을 품고 뛰어든 세상은 그에게 좌절만을 안겨주었다. 중국에 신교육운동이 일어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자신의 고향에는 초등학교조차 없다. 마을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신당이라며 괴상한 눈을 하고 쳐다본다. 집 주인네 할머니는 결혼을 하라고 성화다. 지식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결국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이상은 그저 이상일 뿐이었다. 삶을 살아갈수록 늘어나는 것은 실망과 좌절뿐이다. 그래서 마을 어르신들이 장례를 전통의식에 따라 치르라고 요구했을 때에도 그저 ‘다 좋습니다’라고 체념한 듯이 말한 것이 아닐까. 그가 거기서 옛 전통을 따르지 못하겠다고 주장해도 그것이 받아들여지기는커녕 싸움을 일으키거나 마을을 소란스럽게 할 뿐이다. 봉건사상이나 봉건예교를 배척해야한다는 주장은 이 마을 사람들에게 먹히지 않을뿐더러 화를 돋우는 말이다. 리엔수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어르신들의 요구대로 하고 그것도 대단한 솜씨로 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이미 많은 좌절을 겪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의 내면



현실과 이상의 괴리. 거기서 오는 슬픔과 고독. 리엔수의 고독을 이렇게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의 내면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인생에서 좌절과 실망이 계속된다면 사람은 자신의 주위에 방어벽을 치고 세상과 단절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방어벽 안에서 나오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계속 홀로 외로이 존재하고자 한다. 더 이상 상처를 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벽 안 쪽으로 자신을 숨기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보신주의. 밖으로 괜히 나갔다가 넘어지고 다칠까봐 아예 나가지 않는 것이다. 겁쟁이라 불러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만큼 자신을 소중히 여기니까. 세상은 이미 글러먹었다. 내가 나서서 뭘 해 본다 한들 변하지 않는다. 구제불능. 그래서 이렇게 방어벽을 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잘못 생각한 거요. 모두 결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스스로 누에집을 만들어 자신을 그 속에 가두어 놓고 있소. 세상을 좀 밝게 볼 필요가 있어요.”



언뜻 리앤수에게 적절한 충고 같아 보인다. 그는 깜깜한 누에집 속에서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니 말이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누에집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



이건 무슨 의미일까? 내가 담을 쌓기는 했지만 내 의지는 아니었다? 아니면 누에집을 만들기는 했지만 난 그놈의 고독을 전혀 즐기고 있지 않다?



그는 이 말 뒤에 자신의 할머니 이야기를 꺼낸다. 집에서 하루 종일 창밑에 앉아 천천히 바느질을 하던 할머니. 그리고 평생을 말없이 그렇게 살아온 할머니. 리앤수는 할머니의 일생을 이렇게 평한다. ‘스스로 고독을 만들어서 그것을 씹어 삼켜 온 사람의 일생’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니 자연 슬퍼져서 장례식 때 통곡을 하고 말았다. 할머니가 느꼈을 고독과 세상엔 이런 사람들이 많을 것이란 생각에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는 타인의 고독을 읽어낼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누에집 속에서 오로지 자신의 내면만을 바라보고 고독해하는 사람과는 다르게 남의 고독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곧 그가 고독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람은 자신의 속에 있는 것만큼을 남에게서 발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는 고독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만큼의 고독을 남들에게서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리앤수는 사람을 냉담하게 대하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에는 손님들이 드나들었다. 그 대부분은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항상 실의에만 빠져있으란 법은 없어 그에게는 오래 사귄 벗이 없었다. 그에게는 몇 주 찾아오다가 연락이 뜸해지고, 그러다 또 몇 주 찾아오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한동안 나에게 찾아와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고 술로써 그 고통을 함께 잊던 친구가 날 더 이상 찾지 않을 때의 처절함과 쓸쓸함을 그는 잘 알았으리라. 그런데도 그는 손님들을 맞아 주었다. 분명 이 사람도 몇 주 후엔 더 이상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 사람이 떠난 뒤 자신에게 남겨질 쓸쓸함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는 자신만큼 남들의 고독을 잘 이해하고 헤아려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신의 고독을 뒤로하고 남의 고독을 들어줄 수가 있었겠는가.



그는 고독이 주는 쓰라림을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 고통을 알기 때문에 그들과 마주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도 그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것은 자신이 해고를 당해 심경이 편치 않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겨울 공원’에 비유하며 ‘겨울 공원에 가는 사람은 없잖소?’라고 말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는 해고를 당하기 전이나 후나 늘 겨울공원이었다. 음울한 건 마찬가지고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돈이 없어 영양상태가 좋지 못한 것과 가재도구가 줄어든 것이다. 천진난만 했던 아이가 나쁘게 된 것은 환경 탓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겨울 공원이라고 말하는 사람. 리앤수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미워하지 못하는 사람임이 느껴진다. 그래서 화자가 ‘당신은 인간을 너무 나쁘게만 보는 것 같은데’라고 말했을 때 차갑게 웃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누에집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라는 말의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닐까. 누에집들은 그 생김새가 다 다르듯이 고독도 그 모양새가 다 다르다. ‘고독’이라는 단어 속에는 전 인류만큼이나 다양한 고독들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리엔수의 고독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고독은 이런 모양을 하고 있다. 거센 바람이나 파도에 온 몸이 상처를 입어도 다른 돌들을 그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큰 바위. 그의 고독은 찢겨진 상처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보호하고 있는 돌들에게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아, 사람이 죽은 뒤에 한 사람도 그를 위해 울어 주는 이가 없도록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야.”



리앤수는 타인의 고독을 받아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무도 자신을 위해 울지 않게 하려고 한다. 누군가가 죽어 그를 위해 운다는 것은 상실의 아픔이 있다는 것이다. 리앤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아픔조차 남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혼도 하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의 죽음에 가장 슬퍼할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는 마치 세상에서 자신의 모든 흔적을 지우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도 결벽증적으로. 마지막까지 모든 고독의 짐을 자신이 짊어지려한다.






그의 삶



리앤수는 성공했다. 그의 장례식에서 그를 위해 울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형식적인 곡소리만 있을 뿐이었다. 그가 좀 더 살기를 바라던 한 사람도 이미 죽고 없었다. 그는 그의 소원을 이뤘다. 아무에게도 상처를 남기지 않고 떠난 것이다. 마치 성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모진 환경 속에서 자신이 상처를 입어도 두 팔로 남을 감싸 안은 모습. 그리고 그 와중에도 아무런 존재감 없이 조용히 있다 가는 모습.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맞나?)으로 향하는 예수님만큼이나 아름다운 모습이다. 희생과 박애의 정신! 그러나 그는 인간이다.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신이 되려 했다. 희생과 박애는 허울 좋은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잊었다.



리앤수가 가난에서 벗어나 뚜 사단장의 고문이 되어 운이 트이게 되고 난 후 화자에게 서신을 보낸다. 이 마지막 서신에서조차 그는 끝까지 멋있으려한다.



“인생의 변화는 너무도 빠르오! 지난 반년 동안 난 거의 거지나 다름없었소. 아니, 실제로 이미 구걸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소. 그러나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소. 나는 그것을 위해 구걸을 하고, 그것을 위해 추위에 떨고 굶주렸으며, 그것을 위해 고독하게 살았고, 그것을 위해 고통을 받았소. 하지만 멸망만은 원하지 않소. 보시오, 내가 좀더 살기를 원하는 한 사람의 힘은 이렇게 컸소. 그런데 지금은 없소. 이 한 사람마저도 없어졌소. 동시에 나 자신도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느꼈소. 다른 사람은? 역시 자격이 없소. 동시에 난 또 내가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기어코 살아가야 하겠다고 생각하오. 다행히 내가 잘 살아가기를 바라던 사람은 이미 사라졌으니까 그 누구도 마음 아파하지는 않을 것이오. 나는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소.”




언뜻 보면 굉장히 멋있어 보인다. 자신의 굳건한 신념을 지키며 그 신념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모습. 그리고 그가 좀더 살기를 원하던 한 친구가 그에게 엄청난 힘이 되었다는 것도 느껴진다. 그 친구는 아마 리앤수와 비슷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친구가 리앤수란 사람을 알아 볼 수 있었을 것이며 그에게 많은 힘이 되었을 것이다. 친구를 잃고 절망하며 울부짖는 리앤수를 보건데 그 친구는 리앤수의 내면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의 힘은 얼마나 컸던지 리앤수는 구걸도 추위도 고통도 고독도 견뎌냈다. 그러나 그 친구가 죽자 살아갈 의지를 잃었다. 자신은 살아갈 자격이 없지만 그 친구를 죽인 놈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 놈들을 위해서라도 살아가려 한다. 뭔가 이상하다. 희생과 박애의 리앤수가 갑자기 복수의 화신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앞에서 살펴본 내면대로라면 이 순간에 리앤수가 취해야 할 행동은 자살이 더 옳아 보인다. 그런데도 살아가려 한다니.



그가 서신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그의 삶은 항상 누군가를 위한 삶이었다. 자신을 믿어준 친구를 위해 살아가던 삶, 그 친구가 죽고 나서는 그의 적들을 위해 사는 삶, 자신을 찾아오는 실의에 빠진 청년들을 위한 삶. 리앤수는 남들을 위해 자신이 살아왔지 자신을 위해 인생을 살아오지는 않은 것이다. 고독, 희생과 박애, 복수라는 것들도 다 그의 이런 태도 때문에 생겨난 말들이다. 이 단어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전제로 생겨날 수 있는 단어들이다. 그는 자신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생각해 왔고 그렇게 만들어 온 것이다. 그는 분명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왔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말했듯이 멸망만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미 멸망했다. 그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멸망했다. 이 세상을 자기가 스스로 자신의 발로 서서 살아가는 것에는 많은 책임감이 따른다. 리앤수는 이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이 무겁게만 느껴졌고 무의식적으로 피하려 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핑계거리로 고독과 희생정신이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삶의 본위가 되었을 때의 모습은 마치 고귀한 신의 모습을 띄게 된다.



리앤수는 서신에서 ‘실패했소’라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간간이 ‘승리했소’라고 말하기도 한다. 자신이 자신의 삶을 평가하고 논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모든 생을 마감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화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들이 결국 같은 길을 걷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오. 그렇다면 제발 나를 잊어 주기 바라오. 당신이 일전에 나의 생계를 걱정해 준 것에 대해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소. 그러나 이제 나의 일을 잊어 주시오. 나는 이미 좋아졌으니 말이오.”



자신이 누군가의 기억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 리앤수는 이 구절을 쓰면서 마음속으로 얼마나 울었을까. 차가운 말투로 자신을 잊으라고 말하지만 속으로 징징 짜면서 정말 외롭다고 울부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끝까지 쿨한 척 하고 있다.



자신을 고귀한 위치로 끌어올려 스스로의 생을 논하고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리앤수의 모습은 솔직히 오만해 보인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변명할지도 모른다. 나는 정말 고독했고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에 그들이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이런 내가 뭐가 오만하냐고. 그가 고독한 것도 상처를 입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그 고독에 휩싸여 누에집만한 세계에 갇혀 살아갈 뿐이었다. 울고 싶고 친구와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싶고 때론 즐겁게 살고 싶은데 삶이라는 것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한 나머지 고독이란 단어에 갇혀 살아온 것이다.



이 세상에 그토록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았던 그는 이를 남들에게 상처를 주기 싫어서라고 말하지만 사실 자신이 자신의 존재를 그토록 싫어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감도 없고 애착도 없기 때문에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고독과 희생이란 말로 포장했다. 자신의 삶을 살아보지도 않은 사람이 실패했다느니 승리했다느니, 나를 잊으라니 라고 말하는 것은 오만하다. 이 세상에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을 거란 생각이나 나만 왜 이런 고통을 다 당하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삶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다.
 



(* 사진은 영화 '더 로드' 캡쳐 장면입니다. 소설 '고독자'와는 내용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지만 캡쳐를 하면서 왠지 부끄러워지네요. 나는 리엔수를 정말로 이해하기 싫었구나란 생각이 자꾸 들어서요. 반면에 영화 속 주인공에게선 그의 슬픔을 느끼고 말이죠. 시시각각 변하는 저의 마음이 무섭네요.)


Posted by masoume
구구절절2010. 10. 11. 03:10

  루쉰을 공부하면서 제가 가장 부딪치는 문제는 루쉰 글의 의도, 흐름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독해’가 안되다보니 글은 당연히 꼬여버릴 수밖에요. 이런 상태에서 단순한 감이나 이미지만으로 한 주제 아래 여러 글을 묶으니, 글을 쓴 제 자신도 갸우뚱 하게 되더군요. 루쉰의 글은 한 대상, 주제에 대해서도 보여주는 관점이 너무 많아서 어딜 어떻게 가지 쳐서 다듬고 글로 만들어낼지 참 난감합니다.

  루쉰을, 루쉰의 글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글을 쓰려니 너무도 답답하여, 이 ‘구구절절’한 마음을 <구구절절> 란에 올려봅니다. 앞으로 루쉰을 제대로 ‘독해’하기 위해서라도 제 나름의 정리가 계속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런 취지에서 늦었지만, 이번에는 루쉰의 잡문 중에서 제가 관심 있게 읽고 있는 테마의 글들을 정리해 볼까합니다.

  제 눈에 자꾸만 밟히는 테마는 루쉰과 ‘연극’입니다. ‘연극, 배우, 꼭두각시, 관객’. 루쉰의 잡문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들입니다. 한꺼번에 이 소재를 다 다룰 수는 없고, 이번에는 비슷한 소재 속에 나타나는 다른 ‘관점, 시선’에 대해 정리해볼까 합니다. 여러 잡문에서 연극과 관련된 비유들을 등장하고 서로 유사해보이지만, 쉽게 같다고 등호를 매기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서의 ‘관객’이 저기에서의 ‘관객’과는 또 다른 것입니다. 섣불리 묶으려고 하다가 산산이 부서진 제 글을 떠올리며 나름대로 고민해보았습니다. 


  연극이라는 상황을 크게 공간적인 구분으로 나누면, 무대 안과 무대 밖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무대 안, 무대 위에서는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무대의 밖에서 그들의 연극을 구경하는 것이 관객들입니다.

A. 군중-특히 중국의 군중은-은 영원히 연극의 관객입니다. 희생이 무대에 등장하였을 때, 만약 기개가 있다면 그들은 비장극을 본 것이고, 만약 벌벌 떨고 있다면 그들은 골계극을 본 것입니다. 북경의 양고기점 앞에는 항상 몇몇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양가죽을 벗기는 것을 구경하고 있는데, 자못 유쾌해 보입니다. 인간의 희생이 그들에게 주는 유익한 점도 역시 그러한 것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사후에 몇 걸음 채 못가서 그들은 얼마 안 되는 이 유쾌함마저도 잊어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군중에 대해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차라리 그들이 볼 수 있는 연극을 없애버리는 것이 도리어 치료책입니다. 바로 일시적으로 깜짝 놀라게 하는 희생은 필요하지 않고 묵묵하고 끈기 있는 투쟁이 더 낫습니다.

-노라는 떠난 후 어떻게 되었는가, 무덤, p.229-

  A의 경우 군중은 연극의 관객으로 묘사되어있습니다. 이들은 무엇인가 ‘연기’하는 존재가 아니라 철저히 보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입을 벌리고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가 연기하는 연극(그 연극이 비장극든 골계극이든 간에)을 보고 있는 것일 까요? 연극이 있어야 관객이 있는 것이고, 이 말은 어딘가에 ‘배우들’이 있다는 이야기겠지요.

  이 배우들이 누구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각 잡문마다 지칭하는 대상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의 경우 군중들보다는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연기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 나름의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은 루쉰이 비판하는 “무대 위에서의 몸짓과 무대 뒤에서 본심이 다른(<속 즉흥일기>中)”이들입니다. 군중들을 속이는, 진짜가 아닌 ‘연기’하는 이들이 바로 배우들인 것입니다. 연기로 속이는 행위를 어떤 의미에서는 ‘조종’(조종이라는 단어 역시 루쉰의 잡문에 자주 등장합니다.)과 연관시켜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관객과 배우. 연극에 대한 시선을 이 두 가지만으로 설명할 수 있으면 편하련만, 루쉰의 글은 참 ‘불’편합니다. 앞에서 연극을 공간적으로 안과 밖으로 나누었는데,(즉, 무대와 무대 밖) 마당극 같은 경우 무대와 관객석의 경계가 모호하지 않습니까? 루쉰이 말하는 연극이 마당극과 같은 ‘이미지’는 아닙니다만,(일단 쿵덕쿵덕 흥겹지 않으니까요.) 관객이 늘 관객의 역할을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3의 존재들, 배우 같지만 관객 같고, 관객 같지만 배우 같은 아리송한 이들이 등장합니다.

B.1 “극장은 작은 천지요, 천지는 큰 극장이다”라는, 연극무대에 걸어두는 훌륭한 대련으로 전해져오고 있다. 사람들이 본래 모든 일은 한바탕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으니, 진지한 사람이 있으면 그는 곧 바보가 된다. 그러나 이는 결코 적극적인 체면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며 마음속에 불평이 있어도 복수에는 겁을 내서 만사는 연극이라는 사상으로 그것을 포기해버린다. 만사가 연극인 이상 불평도 진짜가 아니며 복수하지 않아도 비겁하지 않은 것이다.

B.2 연극하는 것이라면 무대 앞에서의 자세는 무대 뒤에서의 모습과는 다르다. 단지 관객들은 분명 그것이 연극인줄 알면서도 그럴듯하기만 하면 여전히 그 연극에 기뻐하고 슬퍼할 수 도 있으며, 그래서 그 연극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폭로하기라도 하면 그들은 도리어 흥을 깨는 것이라고 여긴다.

-즉흥일기 속편, 화개집 p.350,351-

  B.1과 B.2는 같은 글에서 발췌한 것인데, 묘사되는 ‘시선’이 약간은 다릅니다. B.1의 경우 자신의 인생을 한낱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현실을 외면하는 이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A에 묘사되는 관객과는 다르죠. A의 관객들은 구경만하는 진정한 ‘관객’인 것에 반해서 B.1의 인물들은 자신들이 마주하는 사건들이 연극 속의 일이라 치부해버리는, 연극 무대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관객이 자신의 일을 연극 속의 일과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요. 관객은 무대를 경계로 연극과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루쉰이 B.1에서 묘사하는 군중은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연극 속에서 행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연극 무대 안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관객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관객 겸 엑스트라라고나 할까요? 그렇지만 A와 B.1을 묶을 수 있는 것은 루쉰이 관객을 묘사하든, 엑스트라(엄밀하게는 배우)를 묘사하든 그 껍데기와는 상관없이 그들은 모두 ‘수동적’인 존재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을 ‘꼭두각시’라고 말할 수 있겠죠. 무대 위에 있지만, 여전히 조종당하니까요. 또한 무대 밖에 있어도 배우들에게 속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말입니다. 속는 다는 점에서 조종당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도 있겠습니다. 

  B.2는 B.1과는 다른 관점이 느껴지는데, 묘사되는 관객의 모습이 A와 동일합니다. 그러니까, 관객과 배우가 확실히 나누어져있다는 것이죠. 발췌한 부분에는 없지만, 이 글에서 배우들은 “국수주의자 또는 도덕가 등이라 일컬어지는 패들”입니다. 이들은 연기를 하고, 관객들은 “분명 그것이 연극인줄 알면서도 그럴듯하기만 하면 여전히 그 연극에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정리해보자면 루쉰이 연극을 보는 초점은 1.관객을 속이는 배우, 2.철저히 구경만하는 관객 3.무대 위에 있지만 수동적인 관객 겸 배우(엑스트라) 정도 되겠습니다. 특히 3의 아리송한 수동적 존재들 때문에 좀 더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나눠놓고 보니, 루쉰이 ‘연극’이라는 비유를 자주 애용했고, 여러 단어에 대해서 일관성 있게 의미를 부여했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비유적’으로 글에서 사용했다는 느낌도 듭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왠지 ‘허무한듸!’를 외치고 싶네요. 그렇지만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간에 지금 저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다음번(다음번이라지만 기약할 수는 없는)에는 좀 더 ‘정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이 진정한 의미의 독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예를 들어 루쉰이 말하는 ‘연극’이란 무엇인가? 그가 묘사한 ‘관객’, ‘배우’들은 어떠한 존재들인가, 혹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가? 등. 루쉰의 용어 사전이라고나 할까요? 아마 ‘미션 임파서블’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그래도, 한 발짝 나아가기 위해 끄적거려 볼 생각입니다.

P.S. 사실 이 글도 다분히 제 ‘느낌과 감’에 의존한 해석일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지적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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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구구절절2010. 10. 4. 21:17


  
   관솔을 여섯 번이나 갈고 난 후에야 쥐는 이미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물에 떴다 가라앉았다 하면서 때때로 물 위로 떠오
르려고 조금씩 허위적거리는 것이었다. 미간척은 다시 매우 불쌍한 느낌이 들었다. 곧 갈대를 꺾어 간신히 쥐를 집어올려 땅바닥에
놓았다. 처음에는 꼼짝도 하지 않던 쥐가, 얼마 후에는 겨우 조금 숨을 쉬었다. 다시 한참 지나서는 네 다리를 움직이고 몸을 뒤집더
니 마치 일어나서 도망가려 하는 것 같았다. 이것이 미간척을 깜짝 놀라게 하여 저도 모르게 왼발을 들어 꽉 밟아버렸다. 찍 하는 외
마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몸을 구부리고 자세히 들여다보니 입가에 붉은 피가 조금 나와 있었는데 아마 죽어버린 모양이었다.
   그는 또 매우 불쌍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자기가 큰 나쁜 짓을 한 것 같아 마음이 매우 괴로웠다. 그는 쭈그리고 앉아서 멍하니
바라보며 일어나지 않았다.
  "척아, 너 무얼하고 있니?" 어느 새 잠에서 깬 어머니가 침상에서 물었다.
  "쥐가……."
  그는 황망히 일어나 몸을 돌리고 한 마디 대답할 뿐이었다.
  "그래. 쥐 때문에 그러는 건 안다. 그런데 너는 무얼하고 있는 거냐? 죽이는 거냐, 그렇지 않으면 살려주는 거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관솔은 다 타버렸다. 그는 묵묵히 어둠 속에서 있었다. 점차 달빛이 밝게 보였다. 



   이 어머니께서 요구하시는 극단적인 단호함은 필시 루쉰의 목소리였을 것이라 장담한다.
   '잔재가 없는 쌈박한 복수!' (영화 광고 카피로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결국 복수하는 자의 입장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방도는 오로지 '단호함' 뿐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상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에 대해서도 무자비함을 의미한다.
   복수를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다 던지는 사람의 이야기는 여태까지 많이 만들어져 왔는데,
   나는 그들 스스로에게 던지는 이런 질문을 더 부각시키는 이야기가 나왔으면 한다.
   "나는 나를 죽이는 거냐, 그렇지 않으면 살려주는 거냐?"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구구절절2010. 10. 2. 02:13

지금, 한해 마지막 날의 깊은 밤, 더구나 벌써 밤이 새고 있다. 이미 나의 생명은 적어도 그 일부분은 이처럼 변변치 못한 글을 쓰는 데 소모되었고, 더구나 그렇게 하여 얻는 것이라곤 언제나 내 영혼이 거칠어지고 군더더기 투성이가 된다는 것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며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애착심조차도 갖고 있다. 외냐하면 그것은 내가 바람부는 모래밭에서 뒹굴면서 살아온 흔적이기 때문이다. 자기도 바람과 모래 속에서 뒹굴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뜻을 알 터이다.
[화개집 머리말 중]


저번주에 선은이가 암송했던 구절이죠
?
처음에 이 구절을 보고 ‘나도 바람과 모래 속에서 뒹굴면서 살고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아....정말........루쉰 좀 이해하고 싶습니다.ㅋㅋ


요새 주위에서 루쉰 어때?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때마다 참 막막해요.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예전에는 루쉰의 허망함과 고독에 매료되어 있었어요. 위의 구절 같은 것에 말이죠.
그런데 요새는 ‘내가 도대체 어디서 고독함을 느낀거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여러 비평가들의 비난을 받은 루쉰이 고독이나 적막함을 느끼지 않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바들바들 고독이나 적막함을 이겨내면서 살아왔다고도 생각하진 않아요.
그는 바람과 모래 때문에 거칠어진 영혼마저 사랑하고 있잖아요?
이 구절에서 그의 고독이 보인다면 그건 움켜쥐고 숨겨야 할 대상은 아닌 것 같아요.
오히려 고독은 루쉰이란 사람, 혹은 그의 삶 자체로 느껴지네요.

근데......거친 영혼을 가진 루쉰에게 씁쓸함이나 가슴절절함이 느껴지기 보다는
갑자기 공포가 느껴지네요.;;;;
악! 하고 소리지를 정도의 공포는 아니고 흠칫 놀랄 정도의 공포랄까....
이 공포는 뭐지?-_-? 밤이라 그런가?
하긴, 거칠어지고 군더더기가 많아진 자신의 영혼, 바람과 모래의 흔적들에 애착심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긴 하죠.

아..........무서운 싸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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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soume
History/루쉰2010. 8. 20. 10:50

 

  두 사람이 사랑하여 하나가 된다. 함께라는 것은 '너'와 '나', 두 개의 단어가 아닌 '우리'라는 하나의 단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혼이라든가 하는 제도 하에서의 얘기만은 아니다. 두 사람이 함께함으로써 생기는 여러가지의 '공유'가 있다. 나는 그 공유가 '우리'라는 단어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말과 육체, 시간과 공간, 사물과 인간 관계가 모두 두 사람 공통의 것이 된다.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는 연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을 공유한다는건 어떤 의미인가? 그로 인해 생기는 고난마저도 공유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많은 연인들이 고난의 공유만큼은 견디지 못하고 다시 혼자가 되곤 한다.

  루쉰의 소설 「죽음을 슬퍼하며」에 나오는 두 사람, 주인공과 쯔쥔에게서도 이러한 관계를 볼 수 있다. 그들은 서로 깊이 사랑하여 당시 사회적 풍조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마저도 무시하고 마침내 함께 살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서로의 고난을 함께하게 되고 그에 대한 책임이 생기게 된다. 그 전에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연애에 머무를 때는(주인공이 살던 '회관의 낡은 방'으로 대변되는 시절) 서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그러나 '삶'을 같이 한다는 것은 결코 행복하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고난은 처음에 방을 구할 때부터 시작해서 마침내 주인공이 실직하게 되면서 더욱 더 심하게 치닫는다. 이것은 누구 한 쪽의 탓이라고 할 수도 없고 둘 중 한 명만 영향을 받을 수도 없는 일이다. 서로간에 책임이 있다는 말은 이런 의미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자연스레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쯔쥔과의 관계가 자신을 얽매고 있다고 말이다. '나는 아직 나의 날갯짓을 망각하기 전에 저 새로운 광활한 하늘을 날고자 했다.(p.402)' 주인공은 거듭해서 이러한 서술을 한다. 이것은 처음에는 해고를 당하고 난 뒤 사무실의 답답한 생활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자신의 재능을 펼쳐보겠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나중에 가면 자신을 얽매는 현실의 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뜻으로 읽힌다. 결국 주인공은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된다. 내가 잘 살기 위해서는 쯔쥔과 결별해야 한다고. 그러나 주인공은 결코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쯔쥔에게 이야기 할 때는 '함께 멸망하는 것을 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새로운 생활을 재건해야 한다(p.411)'고 말한다. 길게 보았을 때 주인공에게는 결별이 더 나은 삶을 가져올 지도 모른다. 그러나 쯔쥔은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운명은 이미 내가 준 진실로 결정되었다. ― 사랑 없는 인간은 사멸하고 만다.(p.417)' 그런 점에서 이러한 서술은 화가 날 정도로 뻔뻔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모든 갈등에서 주인공은 결별을 위한 더욱 확실한 사유를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스스로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기까지 이른다. 그리고 쯔쥔에게 그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한다. 사실 이만큼 확실한 사유는 있을 수가 없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람을 무슨 방법으로 잡아두겠는가? 쯔쥔은 얼마 뒤 집을 떠나고 만다. 이것은 물론 '함께 멸망하지 않으려고' 헤어진다는 주인공의 말보다는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때문에 내린 결정일 것이다. 쯔쥔이 떠나자 주인공은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진실을 말해버렸다면서 후회한다. '내가 허위의 무거운 짐을 짊어질 용기가 없었던 탓으로 도리어 그녀에게 진실의 무거운 짐을 지웠다.(p.416)' 하지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위인가?

  주인공의 말에 따르면 '결별하는 것이 서로가 잘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이 두 가지가 그가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진실이다. 결별이 서로에게 좋다는 것은 사실 어디까지나 주인공의 생각, 즉 주인공의 진실이다. 쯔쥔의 진실은 또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두고 자신이 쯔쥔에게 너무 성급하게 진실을 일깨워 주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자신의 학식에 대한 자만심과 쯔쥔에 대한 무시가 섞여있는 태도이다. '쯔쥔의 공로는 완전히 이 식사에 세워지고 있는 듯했다(p.403)'라는 말에서는 그녀를 무시하는 태도가 극에 달한다. 쯔쥔은 그저 밥 밖에 할 줄 모르고, 밥을 먹으라고 닦달함으로써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존재인 것이다. 주인공이 애초에 쯔쥔을 자신과 동등하게 보지 않는 상태에서 그녀에게 사랑과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치가 맞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가 쯔쥔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어떤가?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진실이니 허위이니를 가리기가 어렵다. 주인공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이 진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연인이든 한 번 쯤은 자신이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잠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인 경우도 있고, 아니면 주인공처럼 거의 확신으로 자리잡는 경우도 있다. 둘 중 어느 쪽도 진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허위'라고 말할 수가 있는가? 어떤 생각이 들었을 때 그것을 그대로 좇아 행동해야만 진실이고, 그 생각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허위라는 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노력 또한 간절하고 커다란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에게 정말 허위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진실을 행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합리화이며 자기 위안이 되기도 한다.

  나는 주인공의 결정 자체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함께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그것이 전부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선택과 그에 따르는 결과는 그 사람의 몫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자신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가를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는 스스로가 비겁자라고 인정하는 체 하지만, 사실은 아직도 비겁자가 되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가 비겁자가 되는 순간은 쯔쥔을 떠나던 때가 아니었다. 그에 대한 궤변을 늘어놓는 순간에 비겁자가 된 것이다. 그가 쯔쥔을 정말로 생각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솔직했어야 했다. 쯔쥔을 어설프게 위하는 식으로 얘기를 하는 것은 죽은 그녀에게 더욱 상처만 주는 일이다. 주인공은 바로 이 글을 씀으로써, 한 때 함께였던 사람에 대한 마지막 예우마저도 무너뜨린 것이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