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루쉰2010. 8. 19. 02:59

2NE곰  루쉰 소설집 『방황』

루쉰, 오 마이 라이팅!(Oh, my 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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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골 서늘한 일상의 ‘침공’

  한 작가가 ‘행복한 가정’이라는 주제로 소설을 쓴다. 그 소설에는 매우 세련된 부부 한 쌍이 등장한다. 작가는 고상하고 우아한 주인공들의 삶을 하나하나 구상해본다. 그런데 소설 구상이 쉽지만은 않다. 안타깝게도 그의 구상은 단지 상상, 가정뿐이기 때문이다. 그가 쓰고자 했던 행복한 가정은 처음부터 ‘가정’에서 시작된다.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도시 조차 정할 수 없다. 그저 A시이다. 당시 중국의 도시 중에서는 ‘현실적’으로 작가가 구상하는 행복한 가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은 한 번도 읽지 않은 책이지만, 교수들이 좋게 평가했다는 이유만으로 주인공들에게 『이상적인 남편』을 읽히고, 진귀한 요리를 먹게 한다. "My dear, please." 느끼한 영어로 서로에게 뱀장어를 권하는 부부라니.
  소설은 어찌어찌 진행된다고 해도 더 큰 문제가 그를 괴롭힌다. 그것은 바로 소설 속 행복한 가정과는 정반대인 그의 일상, 현실이다. 소설을 구상해나가면서 일상의 언어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장작 스물다섯 근, 오오는 이십오. 떨어진 장작을 사는 일이 그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돈다. 그러나 일상이 글 속으로 ‘침투’하려 할수록, 오히려 소설은 작가의 일상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즉, 그는 그의 일상을 하나하나 지워나가며 글을 구상해나가는 것이다. 그는 그의 일상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가령 책장 옆 배추더미라든지, 늘 열려있는 서재 문과는 정반대의 ‘행복한’ 세계를 소설 속에서 구현해낸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침투는 ‘침공’으로 바뀌어 그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그는 자신이 쓰려는 ‘행복한 가정’과 배치되는 자신의 현실을 마주 할 때마다, 허리에 바늘이 박히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 스릴러 영화에 나오는 살인마처럼 일상은 그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아내가 아이를 때리는 ‘찰싹’소리,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를 현실세계로 돌아오게 만든다. 결국 그는 자신의 현실과 소설 사이의 괴리를 참지 못하고 원고지를 찢어버리고는 그것으로 아이의 눈물과 콧물을 닦아 준다.

현실은 시궁창, 글쓰기 그리고 루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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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보면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손으로는 젖과 꿀이 흐르고 무지개가 뜨는 낙원을 그릴 때가 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러하다. 내 손으로 쳐내려간 활자들이지만, 나의 일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러려니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가끔은 짜증이 밀려오기도 한다. 영어발음 굴려가며 맛있게 먹을 뱀장어를 집어 올렸는데, 뭣도 아닌 현실이 내 허리를 콕콕 찌르고, 순간 놀라 뱀장어를 떨어뜨린다. 떨어진 뱀장어가 능글맞게 웃으며, 네 현실이나 돌아보라 한다. 내가 그려내는 글 속의 세계는 위풍당당하게 미래와 희망을 이야기하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뚜벅 뚜벅 나아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의 일상은 여전히 글과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사실 글과는 달리 나는 전혀 나아가고 있지 못하며, 그렇다고 희망적이 되고 싶은지 그 조차도 잘 모르겠다. 내 글 속에는 희망으로 향하는 너무나 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들이 등장하지만, 정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은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차라리 글을 쓰지 않는다면 좀 더 마음이 편해질까? 더 이상 그 평행선, 뱀장어의 비웃는 얼굴을 떠올릴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루쉰의 소설, 잡문을 읽다보면, 현실 속 자신과 그의 글 사이에서 고민하는 루쉰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는 변화와 희망을 얘기하지만, 동시에 누구보다도 회의하고 절망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그런 그의 글을 “가면 속 외침”이라고 한다. 나는 나의 또 다른 글에서 루쉰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괴리, 모순을 직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의 인생을 직시한다는 것, 그 비참함을 안고 한 시대를 살아낸 ‘인간 루쉰’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내가 루쉰을 이렇게 받아들여 글을 쓰는 것과 나의 일상 사이에는 무엇이 놓여 있는 것인가. 루쉰을 위대하다고 ‘쓰는 나’는 오히려 루쉰을 쓰는 행위를 통해서 그를 밀어냈던 것은 아닐까. 루쉰이라는 화살이 내 일상, 현실에 닿지 못하도록 글을 방패삼아 막아내며 말이다.
  소설「행복한 가정」속에서 원고를 찢어버린 작가의 눈앞에 “여섯 포기의 배추더미”가 우뚝 서있다. 루쉰이 직시했던 것은 바로 이 우뚝 서있는(아마 우뚝 서있어 피할 수 없는) 일상이었을 것이다. 오, 마이 루쉰. 오, 마이 라이팅! 아직은 나지막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언젠가 나 또한 원고지를 구겨버리고 ‘무언가’를 마주해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미 그 배추더미의 실체를 어느 정도 마주해버렸다. 시궁창인 현실과 쉽게 바뀌지 않는 시궁창의 그 끈질긴 관성. 지금 이 순간에도 무의식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타이핑했다 지우고를 반복하는 나의 글, 나의 현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시궁창의 관성에 지배당하기 전에 희망찬 ‘그럼에도’가 아닌 ‘오, 마이’의 절규로 끝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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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