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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생명연습2011. 7. 26. 00:28

2NE곰 정말, 마지막 에세이
밀란 쿤데라 『농담』

삶 : 무게의 진실


삶, 능동과 피동

나는 살아갑니다. 어제를, 오늘을, 내일을 살아갑니다.

‘살아간다’라는 표현에는 주어인 내가 능동적으로 행위하고 있다는, 약간의 자신감이 숨어있다. 삶에 대한 오만함이랄까. 때로 우리는 삶에서 우리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굳센 의지로 인생을 개척해나간다거나 하는. 그러나 많은 경우 이것은 쉽게 배반당한다.

물론 살아간다는 것이 능동의 의미가 있다고 해서, 삶이라는 것이 ‘살아간다’와 ‘살아진다’의 능동, 피동 한쪽으로만 경계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나이에 삶이란 것에 쓰려니 피식 웃음이 나오지만, “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지”라는 노래 제목처럼 우리는 나이에 상관없이 늘 각자의 삶을 살아가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무엇이다, 어떠하다고 말하기에는 여전히 민망하기는 하다. 각설하고, 능동과 피동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면 삶에서 많은 경우 우리는 능동보다는 피동의 상황에 더 자주 놓이게 된다. 삶에게 ‘~함을 당하는(피동)’ 철저한 약자들. 만약 그 삶이 역사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자신의 권력을 과시한다면 그 가혹함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루드빅은 자신이 엽서에 써보낸 농담 한 마디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 속에 던져진다. 단지 그가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갑자기 마주하게 된 현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이다. 물론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선택지를 결정할 권리는 없다. 선택지는 이미 결정되어있다. “존재 자체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던” 루드빅도 결국에는 군대 생활에 익숙해진다. 익숙해진다는 것 또한 그의 ‘선택’임은 물론이다. 어쨌거나 그의 의지가 반영된. 그렇게 그는 살아간다.


무게를 둘러싼 의혹들

[곽호철 作.]


삶의 무게를 달 수 있다면, 어떤 이의 삶은 무겁고 또 어떤 이의 삶은 가볍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삶의 태도의 문제일까 아니면 삶 자체의 문제일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생을 그가 짊어진 십자가, 고난의 무게만큼 무겁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쓸데없는 지난 며칠간을 내 인생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이 내게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내 인생의 일들 전부가 엽서의 농담과 더불어 생겨났던 것인데? 나는 실수로 생겨난 일들이 이유와 필연성에 의해 생겨난 일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느끼며 전율했다.
                                                                                                                          『농담』,p391


루드빅의 삶은 그 자신의 말처럼 “엽서의 농담과 더불어” 생겨났다. 농담은 그저 농담일 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농담이 만들어낸 인생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삶은 늘 살아가는 자체로 실재할 뿐이고, 루드빅의 말처럼 실제적이다. 무게로 생각하면 그만큼 충분히 무겁다는 이야기이다. 충분히,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딱 그 만큼.

또 다른 이는 삶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꿈이라고 믿기에는 그 고통이 처절해서 버거운 하루하루에 대해서. 그렇다면 고통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삶은 무거운 것일까.

오늘 아침, 이 얇은 초록색 책이 다시 생각나 창고의 트렁크에서 꺼내왔다. 한 장 한 장 넘겨가다가 거친 필체의 메모를 발견했다. ‘세상은 환(幻)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라고 보르헤스가 구술한 문장 바로 아래였다.

그 꿈이 어떻게 이토록 생생한가. 피가 흐르고 뜨거운 눈물이 솟는가. 
                                                                                                               한강, 「희랍어 시간」

세상은 환(幻)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 사는 게 꿈일지라도 그 꿈속에서 사는 인간의 감각은 생생하다. 이 말을 한 보르헤스도 인생을 하루하루 살아내는, 이러한 점에서는 다른 사람들과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였을 것이다. “피가 흐르고 뜨거운 눈물이 솟는다”고 말하는 이도 마찬가지이다. 그 인생의 디테일이 꿈이든 지옥이든 천국이든 간에, 삶은 모두 동등한 무게를 갖는다. 루드빅이 소설 속에서보다 훨씬 더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그의 삶의 무게가 바뀌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한 사람이 그의 인생을 가벼이 본다고 해서, 혹은 반대로 진지하게 본다고 해서 삶을 재는 무게저울의 눈금이 더 기울지는 않는다. 결국 농담이든 진담이든 간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삶들은 늘 삶이라는 만큼의 무게로 떡 버티고 있다.


그리하여, 수수께끼

이제 루드빅은 거대한 농담과도 같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생각한다. 인생이 그에게 마주하게 했던 모든 일들에 대해서.

개인적인 이야기들, 그런 일들은 그저 일어나고 지나가는 데 그치지 않고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기도 한 것일까? 나는 아주 회의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약간의 비합리적인 미신이 내게 남아 있는데, 내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그 자체 이상의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어떤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묘한 믿음이 그런 것이다. 삶은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우리에게 말을 하고 점진적으로 어떤 비밀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믿음, 삶은 해독해야 할 수수께끼로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믿음, 우리가 겪는 일들은 동시에 우리 삶의 신화를 형성하며 또한 이 신화는 진실과 불가사의의 열쇠를 모두 지니고 있다는 믿음. 그것은 환상일 뿐일까? 그럴 수도 있다, 틀림없이 그럴 것 같기까지 하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해독>해야만 하는 이런 욕구를 억누를 수가 없다.
                                                                                                                    『농담』, p233,234

삶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반응해야할 것, 선택해야할 것들을 부과한다. 우리가 삶에 대응한 방식 혹은 그 결과가 ‘우리’를 만든다. 루드빅의 말을 빌려오자면 “신화”. 그렇다면 반대로 삶이 우리에게 무수히 보여주는 사건들에는 그 자체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루드빅이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상징”이다. 삶이 우리를 살아내게 하면서 우리에게 조금씩 흘려주는 비밀은 무엇일까.

삶이 해독할 수수께끼라면, 그것은 영원히 풀어야할 퍼즐과 같을 것이다. 영원히 풀어야한다는 것은 결국 영원히 풀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맞춰야할 퍼즐조각의 수는 우리가 1분 1초를 살아가는 만큼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고, 퍼즐을 맞추는 사람조차 퍼즐이 완성될 모습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퍼즐, 혹은 수수께끼가 원래부터 답이 없다고 해서, 이 퍼즐을 맞추는 행위가 ‘무겁다고’해서 그만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굳이 그만둔다면 나야 할 말은 없지만. 우리, 이 피동적인 인간들은 같은 무게이지만 각자의 고유한 퍼즐을 가졌다. 그 퍼즐을 나도 너도 해독하지 못할 수도, 흔한 괴담의 결말처럼 원래부터 (해독할)그런 것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뭐,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다. 왜냐면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이 퍼즐을 풀어야하는 별 볼 일 없는 사명에 놓여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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