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은 왜 암흑을 바라보았는가-
♠ 들어가며
루쉰은 종종 자신을 암흑을 쓰는 작가라고 했다. 그는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항상 마음에 묘한 ‘응어리’가 남곤 했다. 물론 읽으면서 감동할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산뜻하거나 상쾌한 것이 아니었으며, 알 수 없는 ‘더러움’ 같은 것이 마음의 한 구석에 남아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 ‘응어리’를 루쉰이라면 암흑이라 불렀을 것이다.
문장의 곳곳에 나타나는 그의 암흑은 나를 싫증나게 하기도 했지만, 또한 흥미를 끌기도 했다. 그 때마다 나는 ‘루쉰은 성격이 나빴을까?’라든지, ‘왜 이런 것을 쓸 필요가 있나?’라든지 머리를 굴리곤 했다. 그의 암흑은 왠지 나를 끌다. 살짝 열린 커튼에서 안을 들여다보듯이, 나는 그의 열린 상처에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루쉰의 암흑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 루쉰의 암흑이란 무엇인가.
1) 내 혼을 부르는 것보다는, 자기가 자기를 부르면 된다. 불러도 그 누가 갈 줄 아는가, 무덤의 진호는 자기가 되라.
2) 돌이 부르고 있는 돌의 스님, 자기가 자기를 부르면 된다. 빨리 집으로 돌아갑시다. 무덤의 진호는 딱 질색이에요.
3) 제멋대로 만드는 중산능, 나(남)에게 상관이 있을 것인가. 혼을 불러도 가지를 않네, 제멋대로 자기가 가면 된다. (하략)
이상 세 수, 어느 한 수를 들어 보아도 불과 20자, 그런데도 거기에는 ‘혁명’정부와의 관계, 혁명가에게 행해진 감정 등 시민의 견해가 남김없이 다 서술되어 있다. (중략) 남이 쓴 것을 읽고 느끼는 것이지만, 지금이 ‘동트기 전’의 어두움이라고 끝까지 믿고 싶은 것 같다. 그러나 시민이 이러한 시민이라면 새벽이건 저녁때이건 혁명자들은 이 일군의 시민을 짊어지고 전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술가>
이 글은 루쉰의 여러 잡감을 실린 三閑集에서부터 발췌한 것이다. 루쉰은 종종 이런식으로 시민쪽의 암혹을 써대면서 혁명세력들을 비판했다. 당시 루쉰이 많은 혁명문학자들에게 심하게 욕을 먹었던 것도 그가 꺼침없이 암흑을 폭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암흑이란 무엇이었을까? 루쉰의 글을 읽고 있으면, 암흑이란 그가 실제로 본 내용을 글로 표현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지 않고 넘어가려고 하는 부분, 안 본 척하면서 피해가려는 부분을 아주 날카롭게 부각시키는 것이 그의 암흑이 아니었을까.
머리 속에서 그린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본 것을 글로 표현하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아니, 실제로 본 바를 인정하거나 인식하는 것이 어렵다고 해야 할까. 우리는 자꾸 자신의 키워드에 맞춰서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과 어긋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하거나 아니면 애초부터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인정하고 싶지 않는 현실, 그것을 폭로하기 때문에 그의 글은 우리에게 ‘응어리’를 남기고 우리가 자기 스스로를 질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나는 ‘재일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 머리속에 일종의 재일의 상을 그린다는 것을 요즘에 알게 되었다. 그 상은 내가 마음대로 만들어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상과 어긋나는 재일을 아예 부정하려고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만을 갖고서는 절대 현실적으로 뭔가를 실현시킬 수 없다. 이하는 당시의 그런 혁명분학자들을 비판한 루쉰의 글이다.
요즈음의 혁명문학가는 극단적으로 암흑을 두려워하여 암흑을 덮어두려 하지만 시민은 대담, 솔직하게 그것을 폭로한다. 한편의 약아빠짐이 딴편의 둔중한 무관심에 부딪친 결과, 혁명문학자는 사회 현상을 도저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서, 마치 까치는 기뻐하지만 올빼미는 싫어하는 노파처럼 미신이 깊어지고 사소한 길조를 발견하여 자기 도취하고 그것으로 시대를 초월한 셈이 된다.
축하하오, 영웅 여러분! 그대는 전진하시라. 내버려진 참된 현대는 뒤에서 그대의 진군을 바라볼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는 공존하는 채이다. 그대가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눈을 감기만 하면 ‘무덤의 진호’는 보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의 ‘최후의 승리’이다.
<주술가>
그런대 그가 그려내는 이런 “암흑”은 가끔 “전염”될 때가 있다. 그 자신도 암흑을 널리 알리는 것에 우려한 적이 있는 것처럼, 나는 그의 문장을 보면 종종 낙심해버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2ne곰에서도 몇번 썼듯이, 나는 일본에 있었을 때 ‘재일의 해방’이나 사회의 변혁을 원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기보다는 지금 상황에 대한 불만, 부당함을 느끼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나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당시 나는 자기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하려고 결심한 것이 아니라, 불만을 쌓고 있기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주변에 있는 활동가들의 말에 감동하고 집회나 시위에 참석하면서 이 사회의 부당함을 외쳤다. 그러한 나의 ‘열의’, ‘정의감’에 루쉰은 퉁(?)하고 돌을 던져 버린다.
만약 혁명의 실제 상태를 모르고 있으면 이 경우에도 역시 간단히 ‘우익’으로 변합니다. 혁명은 괴로운 것이며, 아무래도 더러움이나 피를 머금지 않을 수 없고, 시인이 상상하는 것 같은 재미있는 혹은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혁명이라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으로서 여러 모로 고상하지 않은 성가신 작업이 필요합니다. 시인이 상상하는 것 같은 로맨틱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혁명엔 파괴가 따르지만 그 이상으로 건설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파괴는 통쾌하지만 건설은 성가신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혁명에 대하여 로맨틱한 환상을 품고 있는 사람은 막상 혁명에 접근하여 그 혁명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금세 실망하기 쉽습니다.
<좌익 작가연맹에 대한 의견>
사람은 종종 상황이 한꺼번에 바뀌는 것을, 현재 상태가 ‘혁명’되어 다 좋아지는 것을 바란다. 그러면서 외친다. “혁명을! 자유를!” 그러나 루쉰은 거기에 칼을 댄다(?). 당신은 왜 혁명을 하고 싶은지, 혁명하는 것에 책임을 질 수 있는지 말이다. (그는 특히 당시 지식인들에게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었다.) 나도 이 글을 읽으면서 질문할 수 밖에 없었다. ‘혁명’이라는 말에 내가 품고 있는 이미지란 무엇인가? 나는 파괴가 아니라 건설에 대해 세밀하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라고.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구사회를 증오합니다. 그러나 증오할 뿐미녀 장래에 대한 이상은 지니고 있질 않습니다. 또 열심히 사회 개조를 외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럼 어떤 사회로 개조하고 싶으냐고 물어 보아도 대답은 실현 불가능한 ‘유터피아’일밖에 없습니다. 혹은 또 생활이 몹시 무료하다 못해 무언가 자극물이 필요해져서 대변화를 공상하는 사람도 있읍니다. 이 따위는 실컷 마시고 먹고 한 뒤 입가심으로 고추를 먹고 십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더 내려가면, 본디부터 낡은 타입의 인간이면서도 사회적 실패를 만회하려고 새로운 간판을 내걸고 신흥 세력을 이용하여 유리한 위치를 노리는 자도 있읍니다.
<오늘날의 신문학 개관>
♠ 루쉰은 왜 암흑을 그렸는가
그런데 왜 루쉰은 굳이 암흑을 폭로했는가? 그것은 그가 혁명에 대해서 비판적이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암흑이기 때문에, 출구가 없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나는 게 아닌가. 만약 자기 앞에 ‘광명’과 ‘출구’의 보증서가 놓여 있지 않으면 혁명에 참가하지 못하겠다면, 이것은 혁명가가 아닐 뿐만 아니라 기회주의자마저도 되지 못한다.
<掃共大観>
이것을 보니 루쉰은 거꾸로 이런 암흑을 직시함으로서 근번적인 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인상을 받는다. 한번 혁명해서 통치자가 바뀌었다 한들 시민의 생활에 변화가 없는, 그런 일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닌 혁명. 암흑자체를 치유하려는 혁명을 말이다.
지금까지 말해 왔듯이, 나는 한국에 오기전에는 일본에서의 재일의 상황에 분노를 느끼고 그것에 대해 싸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나에게 가장 울린 루쉰의 글은 <華蓋集>에 나오는 <생각나는대로 11-3 “동포여,동포여!”>였다. 그는 동포들에게 사회개혁을 외치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학생들은 연설을 할 때 흔히 “동포여, 동포여!....”라고 외친다. 그러나 제군은 그것이 어떤 ‘동포’이며 그 ‘동포’들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를 아는가?
알지못할 것이다. 나의 마음까지도 내가 말을 하기 전에는 아마도 모금하러 온 사람이 몰랐을 것이다.
그는 학생들이 실제 ‘동포들’에게 너무 무지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것때문에 아마도 실패할 그들의 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중국을 좋게 하기 위해서는 그 밖에도 해야 할 일이 있다.
이번의 북경에서의 연설회나 모금운동 결과 학생들에게는 여러 사회 층의 사람들과 접척할 기회가 많이 있었다. 그 여러가지 일에 주의를 기울인 사람들 가운데서 누구라도 좋으니까 자기가 본 것, 받아들인 것, 느낀 것을 쓰는 사람이 나오기를 나는 바란다. 좋은 일, 나쁜 일, 감탄할 일, 꼴 사나운 일, 수치스러운 일, 슬픈 일 등 아무것이나 모두 발표하여 도대체 우리에게는 어떤 ‘동포’가 있는가를 모두에게 알리기 바란다.
그것들을 알고 난 다음에야 그 밖의 해야 할 일의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식을 하지 않아야 한다. 가령 동포 따위는 있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처음부터 창조를 다시 하면 된다. 암흑 이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암흑과 싸우면 된다.
즉, 루쉰은 학생들에게 ‘관념적’인 동포상을 증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만나고 본 동포들에게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귄유했던 것이다. 폭로된 동포의 상은 청년들의 머리 속에 있는 기대와는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선동해야 하는 동포들이란 타인의 시체를 보면서 기뻐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掃共大観>참고). 그러나 그러한 “암흑”을 놔 둔 채 혁명을 할 수 없다는 것. 루쉰은 명백하게 폭로된 현실이 자신이 인식한 바와는 어긋나 있어도, 그 암흑과 싸울 수 있는지를 사람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
♠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인간에게는 생활속에서 부딪치는 눈을 가리고 싶을 정도의 찌질한 면이 존재한다. 그것은 인간을 찬가하는 아름다운 시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 것이고, 또 지금까지 많은 운동속에서 무시를 당해 온 것들이다 (나의 경험은 적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운동에는 암흑을 반영한 구호나 목표를 거의 보지 못했다.) “암흑”은 사람을 편하게 해 주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희망과 혁명에 불타 있었던 마음을 식혀 버리고, 삶에 대한 권태감, 포기하는 마음을 불러 이르킨다. 그렇지만 루쉰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직 실제로 뭔가를 해 본 적도 없는데 자기가 쓴 몇문장의 글을 읽고 포기하고 만다니 그 의지야 얼마나 나약한가!라고.
나는 재일의 문제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부딪쳐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옛날에 믿고 있었던 것 – 재일은 어떤 면에서는 결국 일본사회에서부터 똑같은 억압을 받고 있고, 그것을 위해 단결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억압 받는 사람들이 만나고 연대하는 것 – 에 희망을 갖고 있다. 그 결과는 아마도 자신이 실제로 실행해 봐야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일본에 돌아가서 뭔가를 시도해 봐도 그것이 성공할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좋은 점과 나쁜 점, 잘 되는 것과 실망스러운 면이 있을 것이다. 전혀 안 돼서 다 실패하고 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재일을 만나서 직접 던져보고, 사람들속에서 그 생각을 키워가지 않으면 결국 재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을 것 같다. 그것은 자신의 삶속에서 배우는 것이기에.
루쉰의 암흑을 대하는 자세는 혁명이나 운동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자신을 대하는 태도에도 적용시킬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자신을 만나는 것을 무서워한다. 자신의 암흑을 아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자신의 암흑을 알게 되면 예전처럼 자기에 대해 ‘희망’을 계속 가질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를 바뀌고 싶다고 생각할 때는 자신의 암흑이야 말로 알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밝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볼 수 있지만 어두움은 잘 들여다보아야만이 볼 수 있듯이 말이다. 루쉰에게 귀를 기울여 보자.
생각컨대, 희망이란 본시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없고, 없는 것이라 할 수도 없다. 그것은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땅 위에는 길이 없다. 걷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고향>
그는 사람들 앞에 암흑을 폭로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걸음을 끊지는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걸어가는 것을 통해 사람들의 희망이 되려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에게 성실해지려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암흑과 마주 대할 수 있는 것은 의지인 것같다. 지금까지 해 온 것을 끝내고, 뭔가를 새로 시작해 그것을 건설하고, 더욱 좋은 것을 만들어가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 스스로도 일본의 상황, 재일의 처지를 슬퍼하기만 했지, 그것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제대로 모색하지 않았다. “파괴는 통쾌하지만 건설은 성가신 작업”이다. 그것은 나의 ‘정춘의 불 타는 마음’만으로는 실현시키지 못하는 것일거라고 생각한다. 나의 마음도 실제로 재일조선인들과 만나면서 파괴되고 실망을 느낄 것이다. 그것에 이겨낼 수 있는 것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현실속에서 어떤 형태로 만드려고 하는 의지, 이렇게 살고 싶다는 의지밖에 없을 것 같다. 천천히라도 인간의 암흑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의 암흑에 어떻게 마주보는가를 삶의 과제의 하나로 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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