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에세이에서 ‘노신은 어떻게 저리 당당하게 싸울 수 있는 것인가’를 궁금해 했었다. 당당하게 싸울 수 있다는 것, 그것은 그 문제는 물론이고 더 나아가 자신의 삶에 대해 떳떳하다는 의미일 것이므로. 하지만 그가 써댄 글만큼이나 그가 벌이는 논쟁을 마땅찮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오랫동안 창작물의 출판이 없고, 러시아의 검은 빵의 번역이 조금 있는 이외에는 잡감문만 쓰고 있다. 잡감문은 겨우 일천 자, 붓을 쥐면 곧 이루어진다.…노신 씨는 이쪽도 마음에 들지 않으며, 저쪽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어쩐지 노신 씨는 이 노파를 닮은 것 같다. 아침부터 밤까지 풍자니 야유니 하며 무책임한 잡감만 토로하고 있는 점이. 그럼 도대체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228)” 이렇게 노신을 추악한 노파에 비유하는 신랄한 글이 있는가 하면, “「아Q전」을 능가할 만한 위대한 저작을 몇 권은 더 쓰셔야 하지 않(229)”느냐는 조언도 있다. 실제로 「준풍월담」에 수록된 장자와 문선에 관한 논쟁을 보다보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말꼬리를 잡는 것처럼도 느껴지고 말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건 내 머릿속 이미지와 실제가 달라서였던 것 같다. 노신이 벌이는 논쟁은 전혀 멋있지 않았던 것이다.
노신은 왜 비꼬고, 욕하고, 실례를 범하면서까지 논쟁하는 글을 썼을까? 노신이라고 장자나 문선이 나쁘다는 것은 아닐 게다. 다만 장자를 권하는 사람들과 또 그 권유로 장자를 읽은 사람들이 지금 그들이 사는 세상과 그 세상 속에서 고통 받는 이들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에 비난을 퍼부었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욕한다고 세상은 갑자기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그 때 그곳에서 할 수 있는 일은 그렇게 그 작은 사건들을 집어내 흔들어 보이는 것이였던 게다. 노신은 이렇게 말한다.
시간은 하루하루 지나간다. 거기에 따라서 크고 작은 가지각색의 사건도 지나가버리고, 이윽고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다. 더구나 사건은 뿔뿔이 흩어져 있기 때문에 나 개인으로서도 느끼지 못한 것, 알지 못했던 것이 얼마나 있는지 모른다. 그저 여기에 모은 수십편에 관하여 말하면, … 규모는 작지만 하나의 모습을 그리지 않았나 생각한다. (236)
어딘가에 있을 아름다운 문학이나 훌륭한 옛글이 아니라 바로 자기 발밑의 암흑을 보는 일, 그것이 노신이 하고자 한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노신의 그런 태도가 잘 반영된 글이 「진이재 부인의 경우」라고 생각한다. 자살한 부인은 성은 공이고 이름은 윤하이며 신보관 영어 번역원 진리재의 아내였다. 그런데 남편인 진리재가 1934년 2월 25일 상해에서 병으로 죽자 무석에 있는 그녀의 시아버지는 며느리에게 고향으로 돌아오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아들 딸의 교육을 이유로 돌아가지 않았고 시아버지로부터 여러 차례 독촉을 받다가 5월 5일 두 아들, 그리고 딸과 함께 자살한다. 지금이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 사건이 다른 누구도 아닌 죽은 공윤하의 아우에 의해“아내는 남편을 따라 죽으며, 자식은 어머니를 따라 죽고……”라는 미담을 포장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당시 중국의 분위기가 짐작될 만하다. 노신은 “이와 같은 가정에서 자라고, 그 훈도를 받은 몸으로 어찌 약자가 되질 않고 베길 것인가(242)”라며, “남의 자살을 책잡는 자는 책잡는 일과 동시에 남을 자살로 내모는 환경에 도전하여 이를 공격하지 않으면 안 된다(243)”고 쓰고 있다. 자살한 개인에 대해서만 책잡을 것이 아니라 그 자살자의 외침에 귀를 기울여 그 약자를 죽음으로 내몬 암흑에 대해 한 발의 화살이라도 쏘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신은 “‘이것을 보아도 느낌이 있고, 저것을 보아도 느낌이 있어’서 끊임없이 잡문을 쓸 수 밖에(229)” 없었던 게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불쾌하다고 해도 말이다. 논쟁을 벌이고 글을 쓴다는 것은 착하기만 해서는 할 수 없다. ‘옳고 나쁨이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서로 다른 것이다’라는 말만 해서는 논쟁도 되지 않고 화살도 되지 않는다. 노신은 미움을 받으면서도 화살을 쏘았다. 내가 그에게 배울 점이다.
(*11월 13일 투애니곰 세미나에서 읽었던 글입니다.
노신이 어떤 식으로 논쟁을 벌였던가, 그의 논쟁 태도는 어떤 경향, 일관성을 가지는지 좀 더 써줘야 함에도 스윽 넘어간 부분이 있었어요. 미처 고치지 못한 원본이지만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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