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루쉰2010. 8. 3. 23:35

2NE곰 10.7.17 루쉰 『납함』

“그게 그것”, 냉소와 찌찔함 사이


“그게 그것”, 어떻게 세상이 변하니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며 변화시킬 수 있다. 아니다, 바꾸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쉽게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것이 있다. 소설 단오절의 주인공 팡쉬엔춰는 “그게 그것”이라는 말로 양쪽 의견에 대한 확답을 교묘하게 피해간다. 세상은 변하지만 실제로 달라지는 것은 크게 없으며, 다 같고 그게 그것이다. 평범해 보이는 생각이지만, 이러한 틀로 세상을 보면 모든 현상이 쉽게 이해가 된다. 이해를 넘어서 넓은 아량까지 생긴다. 옛 투사들의 변절을 보고, 어제의 청년이 오늘의 어른이 되듯이,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으며, 부당한 행동을 보고도 내가 만약 그 상황이었다면 ‘역지사지(易地思之)’해보고 그럴 수도 있으리라 넘어간다. 팡쉬엔춰는 그가 마주하는 상황마다 “그게 그것”이라는 한마디로 가볍게 비껴간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대적해야할 ‘적’이 없다. 사람, 인간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기에, 악도 적도 없는 것이다.
  그게 그것이기에 격변하는 사회에서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세상 돌아가는 것을 고고하게 관조하고 있다. 그에게는 인간의 사상이나 행동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팡쉬엔춰의 태도는 한마디로, ‘냉소’이다. 체념이라고 하기에는 그의 태도가 그 스스로에게 너무나 큰 편안함을 준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박혀있는 이 한마디에 위안을 받는다. 팡쉬엔춰의 처세는 찌질하나, 사실 그의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다. 사회가 변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변발이 짧은 머리로 바뀌는 것? 그것도 변화임에는 틀림없지만, 사회의 겉모습이 바뀐다고 해서 그 사회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겉모습이 바뀌는 것도 쉽지 않지만, 소위 인간의 한계라고 부를 수 있는, 사회를 이루는 인간들이 가지는 본능적인, 본질적인 것은 늘 쉽게 부숴지지 않는 ‘철방’과 같은 존재로 남아 있다. 인간에게 그래서 변혁은 그리 쉽게 이루어 지지 않는다. “역사는 반복된다.” 거창하게 역사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팡쉬엔춰가 보기에도 사회 속 인간들의 모습은 모두 비슷하다. 학생들이 욕하는 관료는 그 이전에 학생이었다. 역할과 자리는 그대로고 사람만 바뀔 뿐이다. 사실 냉소적인 팡쉬엔춰가 아니더라도,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그게 그것”이 꼭 과장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그 찌질리즘

 
다 그게 그거다, 라는 무심한 말이 어떻게든 사회가 변화할 것이라고 믿는, 믿어야하는 투사들에게는 그들을 적막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한마디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쉽게 이러한 변화에 대한 체념과 냉소를 부정할 수는 없다. 사실 그들 자신도 무언가 변하리라 확신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팡쉬엔춰의 비판 아닌 비판이 설득력이 있을 정도로 그들이 마주한 시대상황은 암울했다. 그렇기에 소설 속에서 팡쉬엔춰의 생각을 서술하는 루쉰은 이에 대한 어떠한 평가나 비판을 하지 않는다. 루쉰 자신도 ‘철방’이 깰 수 있을까 고민하는 판이니 말이다. “산다는 게 그런 거지”라고 말하는 팡쉬엔춰에게 그렇게 쉽게 “닥쳐”라고 하지 않는다. “그게 그거”라는 이 무심한 사람의 명연설을 소설의 앞부분에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뒷부분으로 갈수록 드러나는 팡쉬엔춰의 궁상스러움이다. 결국 그가 보여주는 사회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는 나태함 이외에 다른 말을 덧붙이기 어렵다. 사회에 대한 어떠한 비판의식 없이 한마디로 귀찮아서, 특별히 무언가에 반대하는 행위 없이 편안히 먹고 살 정도의 돈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저 찌질해서 이중적이라고도 할 수 없는 팡쉬엔춰의 삶이야말로 ‘에게 그거’이다.


  에게 그거, 찌질한 삶. 어느 시대에나 찌질한 삶은 있을 수 있으며 단지 그 찌질함의 표현이 달라질 뿐이다. 어떤 이는 찌질함의 정의를 ‘보는 순간 때려주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 것’이라 했다. 팡쉬엔춰가 말하는 것처럼 ‘그게 그거’인 시대를 살아가는 자, 그의 찌질함은 어느 순간에서 ‘구타유발자’인가? 그의 일상을 살펴보면 그 찌질함의 속내가 보인다. 그의 찌질함의 원천인 ‘그게 그거’ 요법은 일상 속에서 점점 우스꽝스럽고 한심한 모습으로 뒤틀려간다. 그는 외부세계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냉소적인 시선으로 본다. 이러한 냉소는 얼핏 보면 심지어 지식인스러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이 팡쉬엔춰 자신의 삶, 일상으로 들어오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즉, 팡쉬엔춰가 말하는 ‘그게 그거’의 고상함에 대한 변명의 여지가 점점 줄어든다.
  "“보라구. 그래도 교원들이 급료를 요구하는 걸 천박한 짓이라고 할 수 있겠소. 그런 놈들은 사람이 밥을 먹어야 하고, 밥은 쌀로 지어야 하고, 쌀은 돈으로 사야 한다는 이런 아주 기본적인 일조차도 모르는......” “맞아요. 돈도 없이 어떻게 쌀을 사며, 쌀도 없이 어떻게 밥을 끓여 먹는담......” 그의 두 볼이 부어올랐다. 부인의 대답이 바로 자기의 의견과 ‘그게 그것’이어서 남의 말에 부화뇌동하는 꼴이 된 것 같아 화가 난 것이다.(「단오절」 p.185)"
  아내의 말로 그가 비난하던 교원들이나 자신이 결국 “그게 그것”이라는 것이 드러났을 때, 그의 두 불은 부어오른다. 화가 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이론대로라면, 그는 ‘쿨하게’ 교원들과 그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교원들이나 팡쉬엔춰 자신이나 당연히 ‘그게 그거’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그의 찌질함은 지극히 감정적인 자기 방어, 합리화이다. 사실 그 이면은 그가 가지고 있는 자존심, 감정의 문제인 것이다. 그의 찌질함, 순전히 ‘그게 그거’는 어쩌면 지식인의 ‘정신 승리법’이기도 하다.

결론은 버킹검[각주:1], 태도의 문제

 
그런데 변명의 여지도, 옹호할 부분도 그다지 많지 않은 팡쉬엔춰라는 인간상을 비웃게 되면서도, 왠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진다. 앞서 말했듯 작가는 팡쉬엔춰에 대해서 직접적인 평가를 내리는 대신 그저 보여준다. 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는 고품격 궁상스러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팡쉬엔춰 식 궁상스러움이 그 시대 지식인들이 알게 모르게 갖고 있던 의식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변혁을 소리 높여 이야기 하지만, 사실 그들 자신들의 모습부터도 바꿀 수 있는 것인지. 세상, 인간에 대한 회의와 절망은 말끔하게 걷어내기 쉽지 않다. 지식인이라는 자존심, 그 때문에 오는 궁상스러움에 대한 방어기제가 팡쉬엔춰와 같은 ‘정신승리법’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게 그것”이라는 틀 안에 자신을 가두고, 스스로를 사회와 격리시켜 버린다. 갇혀있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나름의 ‘승리’이든 간에 적어도 우리는 팡쉬웬춰가 찌질하다는 것을 안다. 변화에 대해서, 쉽게 그 가능성과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 사실을 아는 것과 일상 또한 “그게 그것”인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세상의 틀을 깰 수 있을까?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을 수 있을까? 이 소설 속에서 루쉰은 절실하지만 진부한, 누구도 확신하여 대답할 수 없는 문제에 대답하려 애쓰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결론은 버킹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태도이다. 아니, 태도일 수밖에 없다. 세상이 변한다고 믿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믿든 간에 말이다. 자신에게 이미 운명이 정해져있든, 정해져있지 않든 간에 결국 오늘 하루를 눈뜨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진정 ‘운명’이다. 변화를 희망하는 이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희망은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우리가 희망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들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소박한 의지와 의도이다. 그 소박함도 없이는 하루를 살아가기가 어려운 시대가 바로 루쉰이 살아갔던 시대였을 것이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한 절망은 일단 접어둔 듯하다. 대신 루쉰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거창한 혁명도 투쟁도 아닌 오늘하루를 살아갈 의지, 태도이다. 물론 그 태도가 최소한 ‘에게 이거’는 아닐 뿐이다.


  1. "결론은 버킹검"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정말로) 의류 CF광고 멘트입니다. 필자는 한 소설에서 이 구절을 매우 인상깊게보고 에세이에 인용했으나, 안타깝게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실제 있는 광고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등등 많은 이들의 논란을 잠재우고자 버킹검 CF 주소를 올립니다. mms://media.adic.co.kr/tv/wmv300/200004/V6A01051.wmv [본문으로]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