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여름_2013. 3. 31. 23:56

또다시 봄이 왔다. 4년 전 설레던 마음으로 서울행 기차를 탈 때의 봄, 2년 전 추운 겨울 끝에 그토록 간절히 기다리며 맞았던 봄. 계절은 똑같이 봄인데 그때만큼 설레거나 기쁘지는 않은 것 같다. 봄은 봄인데 뭔가 밍밍한 이게 봄인가 싶은 그런 기분이다. 예전엔 꽃잎만 날려도 마음이 콩닥콩닥 뛰고 그랬던 것 같은데, 이젠 내가 봄의 에너지를 못 따라가는 건가! 오랜만에 예전 사진들을 보았다. 옛날 내 모습을 보면 늘 이상한 기분이 된다. 내가 저랬었나 싶기도 하고 다른 사람 같기도 하고. 서울에 있을 때의 내 모습을 보면 특히 그렇다. 매주 꼬박꼬박 기차를 타고 부산에서 서울로 여러분을 만나러 갔던 그때의 마음이 지금 생각해보니 얼마나 무모한 열정이었던가를 새삼 깨닫는다. 솔직히 그땐 그 얘기에 나이 많은 분들이 왜 놀라는지도 잘 몰랐었다. 그만큼 나도 순수한 열망이나 동경을 많이 잊어버린 건지도. 하지만 사실 내 청춘은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데 말이다. 망설이고 방황하고 자연인인 내가 아닌 뭔가가 되어야 한다면 그게 ‘뭐’인지 아직 잘 모르겠는, 그런 상태. 달라진 게 있다면 스물 한 살 그때는 무엇도 아닌 스스로를 내심으로는 자랑스러워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스스로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는 점일까. 자신의 젊음을 담보로 선택의 시간을 대출한 청춘(靑春)이 봄에 감탄할 수 있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졸업을 유보하고 결혼을 유보하고. 사회 진출 시기건 결혼 시기건 남녀 불문 몇 년 씩은 뒤로 미뤄진 걸 체감하게 된다. 그래도 일단은 취업준비란 걸 하고 있고 나름 매일의 목표를 갖고 열심히 살고는 있으니 이렇게 살다보면 뭐라도 되긴 될텐데, 그게 과연 내가 원하던 인생의 모습일지에 대한 자신은 없다. 그렇게 공허함은 깊어져 간다….

 

올해도 어김없이 봄이... 사진은 3년 전 남산에서

 

9와 숫자들(이하 9숫)의 <유예>는 이렇게 떠밀리듯 살아가고 있는 청춘을 노래하고 있는 앨범이다. 달달하고 말랑한 것과는 거리가 먼, 인생 본편이 아닌 번외편 같은, 현재의 행복은 먼 훗날로 계속 밀려나는 그런 끝없는 유예의 시간들. “아프니까 청춘이었지”라고 추억할 수 있는 시간은 오지 않고 그냥 계속 아프기만 한 시간들. 그런 솔직한 마음이 9숫의 노래에는 녹아 있다.

 

 

조약돌, 종달새, 찢기고 구겨진 흔적만 남은 공책, 화자가 표현하는 현재 자신의 모습이다. 보잘 것 없고 비루하지만 어느 노래가사에서인가처럼 그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완전함은 결코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 부족함을 견디지 못해 자꾸 밖으로 도는 모습은 익숙한 너와 나의 과거-혹은 현재- 아니던가. 이제 그는 그런 여정에 지친 듯 보인다. “빨강, 파랑, 노랑, 초록 중 하나의 색만이 허락된다면 아무도 보지 못하게 모두 검게 칠해버릴 거”라는 말에서는 소통하는 것 자체에 피로해져 자포자기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어디까지 유예되었을까? 우리 꿈들은.

 

 

 

혹시나 인생이 잘 풀리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면 ‘눈물바람’을 들어보길 권한다. “언제부턴가 내 등 뒤론 자꾸 시린 바람이 따라붙어 / 도망쳐봐도 이미 내 눈은 / 함빡히도 젖어 있었네”라며 되풀이되는 후렴구를 따라하다 보면 마치 혼자 방안에서 펑펑 울고 났을 때 같은, 그런 카타르시스가 느껴질 것이다.

 

개인적으로 9숫의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영화로 치자면 신파나 로맨틱 코미디 같은, 과잉 연출된 것이 아닌 일상의 정서를 느끼게 해준다는 점이다. 위에 소개한 두 곡은 청춘의 내면심리를 다룬 곡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사랑 노래에서는 보통 기름기가 들어가기 쉬운데 9숫은 굉장히 담담하게 노래해서 참 좋았다. 예를 들면 이런 식.

 

부끄러운 내 말들에도 밝은 웃음으로 대답해주는 사람

어리숙한 내 몸짓에도 듬직한 손으로 내 볼을 만져준 사람

비가 와도 내겐 우산이 없어 흠뻑 젖은 채로 혼자 걷던 어느 날엔가

힘을 내어 고개를 들었을 때 별로 예쁘지도 않고 그저 평범한 사람이지만

내 눈에는 그대만 보였네 거대한 인파 속에서 나만이 아는 빛으로 반짝이던

그대만 믿었네 이 거친 세상 속에서 난 오직 그대만 좋았네

-9와 숫자들, ‘그대만 보였네’

 

정말 예쁘지 않은가. 잘 세팅된 드라마 촬영장에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내 옆에서 벌어질 수 있는 현실적이면서도 아름다운 사랑 노래라는 점에서 난 이 곡이 참 좋다. 9숫도 그걸 노렸는지 '그대만 보였네'는 이번 앨범 타이틀곡이기도 하다.

 

<유예>는 1집 <9와 숫자들> 이후 무려 3년 만에 나온 음반이다. 인터뷰에 따르면 낮에는 다른 일을 하고 겸업으로 음악을 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한 가지 색만을 택해야 한다면 모두 검게 칠해버리기”의 현실적인 방법은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꿈을 꾸는 것일까? 어떻게 풀어나가느냐는 각자의 몫이겠지만 어쨌거나 꿈꾸기를 멈추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단기적인 목표가 있어도 큰 그림이 없다면 떠밀리듯 사는 인생과 다름없으니까. 좀 더 열심히 아등바등 일하면서 떠밀려나가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그래서 요즘 매일 매일의 일과 속에서 틈틈이 버킷리스트 작업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아직 시작을 못했다. 다같이 블로그에 버킷리스트 올리기! 이렇게 정하면 좀 빨라지려나 하하. 정윤미양 결혼식 축하를 위한 봄노래도 알아보고 있는 중이라는 소식을 전하며, 음반 가이드를 빙자한 3월 하소연을 마친다.

Posted by Journey.
에세이/여름_2011. 5. 22. 23:58

 

신념을 지키는 사람

―비록 보잘 것 없는 들풀밖에 거두어들이지 못한다 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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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혁명, 반우파투쟁… 소설 『사람아 아, 사람아!』 관통하고 있는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이다. 그렇다. 이 소설은 공산주의 체제하에서의 1950년대~1980년대 중국을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다. 처음 내 눈에 들어온 것은 그런 체제 하에서 혁명이 너무나 비인간적인 것이 되어 버리는 것, 개개인의 삶보다 좌파이냐 우파이냐 라는 노선의 문제가 앞서버리는 당시의 현실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개인은 어디까지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고. 나는 두 주인공 손 유에와 호 젠후, 그리고 중국 공산당의 관계에 나와 어떤 조직의 모습을 투영하였다. 그들은 왜 대학생 시절로부터 20여년 지나 불혹의 나이가 될 때까지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했는가. 왜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지 못했는가. 그들에게서 조직에 의해 억압된 개인의 모습을 자꾸만 찾고 있었다.

그런데 글을 고치려고 책을 다시 보다가 깨달았다. 손 유에와 호 젠후가 20여년 동안이나 서로 사랑하면서도 결합하지 못한 것은, 조직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애초에 (호 젠후는 모르겠지만) 손 유에는 ‘개인의 자유’를 주장했던 적도 없다는 것을.

  



1

손 유에. 올해 나이 마흔. C시 대학 총지부 서기. 그리고 중학생 된 딸아이의 엄마.

다른 지역으로 발령 나 별거 생활을 하던 남편 자오 젠호안은 그녀가 보시파로 공격을 받는 와중에 이혼을 요구하고 새 가정을 꾸렸다. 이 이혼과 맞물려 그가 존경하고 따르던 지도자 시 류의 낯 뜨거운 애정 행각이 발각된다. 엎친 데 덮친 격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목에 걸린 ‘시 류의 첩’이라는 표 따위는 무섭지 않았다. 언젠가 틀림없이 은총의 비가 내려서, 내가 뒤집어쓴 더러운 물을 씻어 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부터 완전히 자신을 잃고 말았다. 더러운 물에 기름이 섞여 있었으리라고야!”(31쪽)

 

그녀가 믿었던 것들이 이렇게 하나 둘 씩 무너져갔던 것이다. 가정도, 당도 모두. 그녀는 자신의 믿음이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딸의 이름을 호안호안에서 유감이라는 뜻을 가진 한한으로 바꾸어 버린다. 그녀는 여전히 당원이지만 그때의 열정은 이미 없다. 그녀의 눈빛은 이제 생기를 잃었고, 딸을 키워야한다는 의무감만이 그녀를 살아가게 하고 있다.

 

그때 그녀에게 한 남자가 나타난다. 호 젠후. 그는 그녀의 대학 동기이자, 그녀를 몹시도 사모했었던 이다. 대학 시절, 손 유에 역시 호 젠후에게 몹시 끌렸지만 그녀는 남자친구였던 자오 젠호안을 배신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 호 젠후는 반우파로 몰려 제적 처분을 당했고 그들은 더욱 결합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20여년의 세월이 지나 그들은 재회한다. 호 젠후가 복권되어 C시의 대학으로 돌아오자, 손 유에는 대학 총지부 서기이자 간부로서 그를 마주하게 된 것이다.





2

두 남녀 주인공과 그들의 관계에 대해 간단히 써보았다. 여기까지만 보면, 꽤 그럴듯한 드라마나 영화 하나 만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카피는 ‘내 생애 마지막으로 찾아온 사랑’ 정도가 좋겠고.

여기서 잠깐, 문제가 있다. 우리의 여주인공이 그렇게 사랑을 덥석 무는 캐릭터가 아니라는 점이다. 손 유에는 원칙주의자다. 그런 점에서는 그녀는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다. 여전히 그녀는 결벽증적인 잣대를 가지고 있다. 아직 재혼을 안 한 것만 해도 그렇다. 사실 10여년이 넘는 공백이 있으므로 남자를 만나려면 호 젠후 전에도 얼마든지 만났을 것이다. 그러나 손 유에는 서로 적당히 맞춰 갈 상대, 생활의 필요에 따른 남편은 됐다고 말한다. 스스로를 기꺼이 희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아줌마, 나이 마흔 맞나 싶다. 설마, 아직도 운명의 상대 타령하는 거??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에게도 엄격한 잣대를 들이민다. 애초에 호 젠후에게 끌렸음에도 자오 젠호안과 결혼한 것 역시 소꿉친구이자 연인을 배신할 수 없다는 것, 당 조직에 반하는 반우파 인사와 결합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사랑보다는 믿음, 책임을 더 중시하는 사람인 것이다. 조직에 대한 태도에서도 이런 기질은 드러난다. 소설 말미에 손 유에는 호 젠후의 <마르크스주의와 휴머니즘> 출판 문제로 당 위원회와 갈등을 겪는데, 그것은 당 위원회에 대한 부정도 타도도 아닌 스스로가 당 위원회의 일원이라는 인식에 바탕을 둔 반응이다. 당위원회의 결정이 권력남용으로 흐르고 있다, 당의 방침과 정책을 이런 식으로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 한 발언인 것. 남녀 간의 사사로운 정 때문에서가 아니라고 스스로 자문하고 난 후에야 그녀는 반론을 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손 유에가 당으로부터의 자유를 추구했다거나, 정치적 활동 때문에 호 젠후와 결합을 하지 못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정치적, 사회적 입장 때문에 호 젠후와 결합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에 따른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3

이렇게 마음의 소리를 따르기 보다는 내면의 기준에 맞춰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민한 후에 결정을 하는 타입의 사람이다 보니, “실제 주위에 이런 사람 있으면 엄청 피곤할 것 같다”, “짜증난다”는 반응들이 많았다. 다양한 인물들의 시점으로 그려지는 소설임에도 한결같이 손 유에에 대해서 감탄하거나 외경의 심리를 갖는 것으로 그려지는, 과한 여주인공 취급은 충분히 짜증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녀의 속앓이와 원한에 대해 ‘답답하고 짜증나고 유치하다’고 쉽게 비난할 수 있는 것일까?

손 유에는 분명 융통성이 부족하다. 그래서 10여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나간 과거를 놓지 못한다. 현실에 적응하고 새 가정을 꾸리라는 주위의 충고를 듣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동시에 그녀의 대단한 점이다. 그녀는 현실이 힘들고 고달플지언정, 신념을 놓지 않았다. 그 믿음에 스스로가 배신을 당했으면서도 타협하지 않았다. 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자신도 잘 몰랐지만, 어쨌든 그녀는 계속 걸었다. 물론 그것은 손 유에 자신을 자꾸만 회의에 빠지게 만드는 길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나는 어떤 것에 갑자기 정신적인 지주, 대들보를 뽑혀 버리고 만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쟈 호유(홍루몽의 주인공)가 부적인 통령 보옥을 잃어 버렸을 때처럼 마음의 기둥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어…. 불안과 초조 속에서 여기 저기 찾아 헤맸어. 그러나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거나 뭔가 눈에 띄어도 영력이 없는 단순한 돌멩이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어.”(224쪽)

 

그녀가 찾고자 한 ‘통령보옥’은 뭘까. 나는 그녀의 믿음을 어떤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그럼으로써 어떤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비전, 거대한 약속 자체에 대한, 그런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아닐까 한다. 현실에 대해 ‘어쩔 수 없다’고 말하고, 안주하고, 그래서 ‘세상은 다 그렇다, 안 바뀐다’고 말하고 포기해 버리는 것과는 분명 다른 방식이다.

 

물론 손 유에가 답답해 죽겠다는 반응도 충분히 이해는 된다. 그녀의 방식은 요즘 쳐주는 ‘솔직함’과는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이다. 슈 홍종이 마음에 들지도 않으면서 그 아들 신발은 왜 만들어주고 있으며, 정말 사랑하면서 호 젠후에게 왜 사랑한단 말도 못하는지. 좀체 자기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다가 이어질 듯 말 듯 한 상황에서 그녀는 이렇게 고백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하고 결합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말아.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나는 스스로를 속이고 싶지 않아. 사랑하고 있어.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 꿈속에서 얼마나 당신을 불렀던가. 머릿속에서 당신과 같이 생활하는 장면을 얼마나 그려 보았던가. 하지만 그럴 때면 꼭 또 하나의 장면이 떠올라. 사람들의 오해와 조소 속에 내가 과거의 심판을 받고 있는 장면이…….”(295쪽)

 

그래서 자신 앞에는 “독신의 길밖에 없노라”고, “만일 내세가 있다면…”이라고 말하는 손 유에를 보고 있자면, 더는 가식이라고 욕할 수가 없다. 그녀는 속으로는 생활을 중시하면서 겉으로만 고고한 체 한 게 아니라, 정말로 정신의 길만을 취해버린 것이다. 아 가엾은 사람, 바보 같은 사람.

 



4

“승리는 고통까지 갖다 준다(223)”했던가. 손 유에는 청춘의 많은 시절을 아픈 역사가 드리운 그늘 속에서 보내야 했지만, 결국 이 작품에서 승리자는 그녀라고 생각된다. 제대로 아물지 못한 전 남편과의 상처는 20여 년 만에 그와 대면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처음에 그녀는 자오 젠호안을 용서할 수 없었다. 딸 한한이 그를 만나는 것도 속으로 바라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당시 자신이 자오 젠호안과 맺었던 관계는 사랑이라기보다는 맹목적인 이상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걸,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을 단지 누군가가 버렸고 버림받았다는 얘기로 설명할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통스러웠던 지난 세월과 그로 인해 회의로 가득 찼던 날들은 이제 손 유에에게 새로운 의미가 된다.

‘난 불행을 겪었지만 그것이 지금 나의 자양분이 되었다’는 말이나 ‘잃었기 때문에 얻을 수 있었다’ 같은 말은 의외로 하기 쉽지만 순간 마음을 위로하는 말에 그치기도 쉽다. 그녀가 스스로 “이것은 아큐 류의 자기기만도 아니고 타인에 대한 자기기만도 아니다(351쪽)”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이 말이 순간이 아닌 충분히 오랜 세월 아파한 뒤 얻은 것이기 때문 아닐까. 결국 손 유에와 호 젠후가 결합함을 암시하는 결말 역시 그렇게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호 젠후에 대한 애정은 단순한 첫사랑이나 남녀의 기쁨을 넘어선 “지금까지의 모든 고통을 거듭 거듭 반성해서 정련시킨 결정(352쪽)”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실은 그래서 이 소설의 결말은 굉장히 이상주의적이라는 생각도 든다. ‘권력을 잡았고, 다른 가정을 꾸렸고, 생활을 택한 그 모든 현실순응주의자들은 다들 지금의 스스로를 불행하다고 한탄하게 되었지만 20년 동안 한결같았던 손 유에와 호 젠후는 결국 행복졌답니다’, 뭐 이런 거니까. 혹은 ‘이상을 버리지 않은 그대여, 고통스러워도 살아 나가라. 그러면 언젠가 그 고통이 확고한 신념으로 승화될 것이다!’ 이런 거라고 할 수도 있을 테고. 끈질긴 이상주의자의 승리라고나!


현실과 이상에 대한 고민은 이 세상 살아가는 인간들 모두가 하는 고민일 것이다. 그래서 모두가 손 유에일 수는 없으며 사람마다 그 사이에서 각기 다른 포지션을 취할 수밖에 없다. 손 유에는 이상을 택했다. 그것은 늘 달콤하지만은 않았지만 그녀는 자기가 택한 전략에 대한 책임을 졌다. 그 결과 불같은 사랑도, 청춘도 잃었지만 그 정열이 불 탄 자리에서 그녀는 나아갈 길을 위한 숯불을 얻었다.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Posted by Journey.
에세이/여름_2011. 5. 22. 23:54




조용필 형님의 '꿈'을 들으면서 쓴거라.
다함께 라디오(?)를 크게 켜 볼까나요 캬


 


담배 잘 안 피웁니다. 양주? 더더욱 잘 안마십니다.

근데 이 이름은 모다??

우연히 읽게 된 ‘프랜차이즈 까페 노블’ 중 하나의 제목에서 따왔어요.

(‘프랜차이즈 까페 노블’은 익명 블로거의 사연을 바탕으로 프랜차이즈 까페에서 쓰여진 한 쪽 분량의 짧은 소설을 말합니다. 네이버 블로그 ‘시베리아 횡단열차’ http://bit.ly/gL5oDV 에서 읽을 수 있지요- 재미있는 컨셉이다 생각해서 기억하고 있던 걸 이렇게 써먹네요.하하)

 

‘지포라이터’와 ‘진토닉’이라니, 지나치게 대상이 단순화된 거 아닌가 싶기도 해요. 하지만 그래서 엄청나게 명확하기도 하죠. 전 쭉 그렇게 내가 매진하고 헌신할 수 있는 뭔가를 찾고 있었어요.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3년 쯤 전부터. 서울에 오게 된 것도, 조금 특이한 공부란 걸 하게 된 것도 그런 이유에서이겠고요.

지금은 그 뭔가가 찾는 거라기보다는 이것저것 해보고 부딪히고 깨지고 그러면서 조금씩 가까워져 가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도 여전히 그 ‘뭔가’가 있다고는 믿고 있습니다. 저도 언젠가 이렇게 ‘**’라고 그걸 한마디로 말할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이 폴더에 올리는 글들은 그 '무언가'에 다가가기까지의 궤적들이 될 것입니다. 뭐 다들 그렇죠?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잘 모르겠고 그렇다고 멈춰 있을 수는 없고. 저도 그래요. 함께 웃고 울고 공감해 주신다면 더없이, 기쁘겠습니다.

;)



*여름yeolum

여름의 에너지를 갖고시프다 + 고어로 '열매'란 뜻->'열매,결실을 잘 맺고 싶다' 이런 소망을 담은 이름.
버뜨.. 아무도 그렇게 안 불러줌.-_-;;
(결국 간간이 공연할때 or 글올릴때 쓰는 이름으로...어떤 의미에서는 제일 공적인 이름?!)
2년째 휴학생. "국문과에요?"를 거쳐 요새는 "연기전공이세요?"라는 말도 듣는다. 참 인생사 알 수가 없다.(실은 법학전공임)
지금은 친구들과 책읽고 글쓰고 연극도 하고 종종 주차장에서 기타 치며 노래도 한다.  내 인생에 남들 앞에서 제일 재주(?) 많이 부리고 있는 때인 듯하다. 불러만 주~쎄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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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Journey.
에세이/여름_2011. 3. 23. 02:24

호가든 한병까고는.. 얼굴 발개져서 잠못이루는 밤..ㅋ

진작 저번주 올리려 했던 『달과 6펜스』 후기를 이제나마 올려보려 합니다.

저에게 『달과 6펜스』는 단순하게 '한 천재 화가의 이야기'로 읽히진 않았습니다.

이 소설 속엔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어 그린다는' 스트릭랜드도 나오지만 단 30분간의 명상 끝에 과거의 생활을 버리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어부로 살아가는 삶을 택한 '나'의 친구 아브라함의 얘기도 나오니까요.
그러니까 그런 갑작스런 삶의 전환들, 인생의 중요성을 발견하게 되는 강력한 순간- 이라는 게 꼭 '광기' (흔히 예술가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와 함께 오는 것만은 아니라는 겁니다.




 














폴 고갱(Paul Gauguin·1848~1903)
*망고꽃을 든 두 타히티 여인
1899년, 캔버스에 유화, 94×72cm,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다만 우리가 세미나 하면서도 말했듯이 '그런 순간들이 어떻게 찾아오는가?' 하는 부분은
소설 속에서 잘 드러나고 있지 않습니다.
스트릭랜드의 삶이 비현실적이라던가.. 너무 작위적인 천재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던가..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이런 이유에서이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스트릭랜드나 아브라함처럼 자기 생의 중요한 목적, '난 이걸 해야만 한다'고 하는 것. 살아가면서 그걸 발견하는게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은 않습니다. 그게 설령 이상이라 하더라도..^^ 니체도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지 않던가요.


"그대들은 신을 사유할 수 있는가? 만물을 인간이 생각할 수 있고,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 그대들은 그것을 진리에의 의지라고 불러야 한다! 그대들은 자신의 감각을 그 궁극까지 사유해야 한다!
 그리고 그대들이 세계라고 부르는 것. 그것은 우선 그대들에 의해 창조되어야 한다. 이 세계는 그대들의 이성, 그대들의 심상, 그대들의 의지, 그대들의 사랑 안에서 만들어져야 한다! 그대들 인식하는 자들이여, 그러면 그대들은 그대들의 행복에 도달하게 되리라!
 그대들 인식하는 자들이여, 이러한 희망도 없으면서 어떻게 삶을 참고 견디려 하는가?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것 속에서, 비이성적인 것 속에서 그대들이 태어나야 할 까닭은 없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민음사), p.147


창조하는 자가 되는 것, 그러한 삶을 사는 것. 그건 니체도 말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닐 겁니다. 그런 강력한 순간들을 만나려면 일상부터가 다르게 조직되어야겠지요. 진짜 어려울 것 같아서!! 가슴이 뜁니다. 하하
당장 우리 세미나는, 공부는 어떻게 창조해야 할까요?? 삶을 작품으로 만드려면, 자기 윤리를 가지려면 초식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우리 그런게 너무 없는 것 같아요.

담달 월급받아도 생활비 빵꾸 예상되어 저녁 알바를 하나 더 구해야 해서 또다시 고군분투하고 있는 요즘, 생계에 목매달고 정신 놓을 뻔 하다 문득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생각하며 이 글을 씁니다.
이번주 세미나는 곰사형도 결석이니- 다들 해이해질거같기도 하고 @@
아이디어 모집합니다! 이번주 과제 ;)


Posted by Journ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