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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루쉰2011. 2. 2. 19:49



장례식으로 시작해서 장례식으로 끝나는 「고독자」. 화자(선페이)는 두 장례식에서 리엔수를 만난다. 살아있는 리엔수와 죽어있는 리엔수를. 그러나 그의 모습은 시종일관 고독해 보인다.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던 모습과 여윈 얼굴로 가슴팍에 핏자국을 남기고 떠난 모습은 그가 여전히 고독했음을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 리엔수가 ‘나는 고독하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화자와 소설을 읽는 우리는 그가 지독하게 고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냉담한 성격, 실의에 빠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독신주의자, 검은 피부에 작고 마른 체격, 그리고 실패했다고 몇 번이나 울부짖고 있던 그의 서신.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그가 고독한 사람이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그의 고독이 무엇에서 기인했고 그가 왜 거기서 고독을 느끼는지는 알지 못한다. 느낌상, 그가 풍기는 분위기상 그가 고독함을 알 뿐이다. ‘고독’이란 단어로 정의되는 리엔수.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더 알기 위해서는 그의 고독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





표면적 고독


소설은 리엔수 할머니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이질에 걸려 상태가 위급했던 할머니는 리엔수를 찾지만 그가 S시에서 한스산으로 오기 전에 돌아가시고 만다. 마을사람들은 그가 도착하기 전에 모여 회의를 한다. 신당(新黨)인 리엔수가 장례의식을 신식으로 바꾸려고 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회의 끝에 마을사람들은 그에게 옛 전통대로 장례를 치를 것을 요구하기로 한다. 모두들 엄청난 충돌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리엔수는 의외로 담담하게 그 조건을 수락한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대단한 솜씨로 수의를 입혀 마을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이 놀라움은 리엔수가 신당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그가 서양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옛 도리를 무시하고 서구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맞는 말이다. 그가 옛 도리를 무시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한스산에서 유일하게 외지로 유학을 나가 서양식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이 이유만으로 의도치 않게 신당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추측해 보건데 그는 봉건사상을 떠나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위치에 있었다. 자신을 ‘불행한 청년’이나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하면서 그를 찾아오던 지식인 청년들, 글을 발표한 것 때문에 지방의 작은 신문에서 그를 공격한 익명의 인사들, 그리고 이로 인해 당한 해직. 리엔수는 당시 사회를 바꿔 보려했던 혁명가였던 것이다. 그것이 계몽운동과 관련된 것인지 계급과 관련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혁명을 꿈꾸는 지식인이라고 하기에 이 청년은 너무나 무기력해 보인다. 매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고 누군가를 방문하는 일도 없다. 그리고 사람을 냉담하게 대한다. 게다가 결혼도 하지 않아 그 처지가 더 쓸쓸해 보인다. 마치 수많은 좌절을 겪어 더 이상 낼 기운조차 없는 사람 같다.



그도 처음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밝은 청년이었을 것이다. 자유나 평화, 희망을 말하는 청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밝은 이상을 품고 뛰어든 세상은 그에게 좌절만을 안겨주었다. 중국에 신교육운동이 일어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자신의 고향에는 초등학교조차 없다. 마을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신당이라며 괴상한 눈을 하고 쳐다본다. 집 주인네 할머니는 결혼을 하라고 성화다. 지식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결국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이상은 그저 이상일 뿐이었다. 삶을 살아갈수록 늘어나는 것은 실망과 좌절뿐이다. 그래서 마을 어르신들이 장례를 전통의식에 따라 치르라고 요구했을 때에도 그저 ‘다 좋습니다’라고 체념한 듯이 말한 것이 아닐까. 그가 거기서 옛 전통을 따르지 못하겠다고 주장해도 그것이 받아들여지기는커녕 싸움을 일으키거나 마을을 소란스럽게 할 뿐이다. 봉건사상이나 봉건예교를 배척해야한다는 주장은 이 마을 사람들에게 먹히지 않을뿐더러 화를 돋우는 말이다. 리엔수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어르신들의 요구대로 하고 그것도 대단한 솜씨로 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이미 많은 좌절을 겪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의 내면



현실과 이상의 괴리. 거기서 오는 슬픔과 고독. 리엔수의 고독을 이렇게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의 내면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인생에서 좌절과 실망이 계속된다면 사람은 자신의 주위에 방어벽을 치고 세상과 단절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방어벽 안에서 나오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계속 홀로 외로이 존재하고자 한다. 더 이상 상처를 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벽 안 쪽으로 자신을 숨기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보신주의. 밖으로 괜히 나갔다가 넘어지고 다칠까봐 아예 나가지 않는 것이다. 겁쟁이라 불러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만큼 자신을 소중히 여기니까. 세상은 이미 글러먹었다. 내가 나서서 뭘 해 본다 한들 변하지 않는다. 구제불능. 그래서 이렇게 방어벽을 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잘못 생각한 거요. 모두 결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스스로 누에집을 만들어 자신을 그 속에 가두어 놓고 있소. 세상을 좀 밝게 볼 필요가 있어요.”



언뜻 리앤수에게 적절한 충고 같아 보인다. 그는 깜깜한 누에집 속에서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니 말이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누에집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



이건 무슨 의미일까? 내가 담을 쌓기는 했지만 내 의지는 아니었다? 아니면 누에집을 만들기는 했지만 난 그놈의 고독을 전혀 즐기고 있지 않다?



그는 이 말 뒤에 자신의 할머니 이야기를 꺼낸다. 집에서 하루 종일 창밑에 앉아 천천히 바느질을 하던 할머니. 그리고 평생을 말없이 그렇게 살아온 할머니. 리앤수는 할머니의 일생을 이렇게 평한다. ‘스스로 고독을 만들어서 그것을 씹어 삼켜 온 사람의 일생’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니 자연 슬퍼져서 장례식 때 통곡을 하고 말았다. 할머니가 느꼈을 고독과 세상엔 이런 사람들이 많을 것이란 생각에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는 타인의 고독을 읽어낼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누에집 속에서 오로지 자신의 내면만을 바라보고 고독해하는 사람과는 다르게 남의 고독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곧 그가 고독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람은 자신의 속에 있는 것만큼을 남에게서 발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는 고독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만큼의 고독을 남들에게서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리앤수는 사람을 냉담하게 대하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에는 손님들이 드나들었다. 그 대부분은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항상 실의에만 빠져있으란 법은 없어 그에게는 오래 사귄 벗이 없었다. 그에게는 몇 주 찾아오다가 연락이 뜸해지고, 그러다 또 몇 주 찾아오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한동안 나에게 찾아와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고 술로써 그 고통을 함께 잊던 친구가 날 더 이상 찾지 않을 때의 처절함과 쓸쓸함을 그는 잘 알았으리라. 그런데도 그는 손님들을 맞아 주었다. 분명 이 사람도 몇 주 후엔 더 이상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 사람이 떠난 뒤 자신에게 남겨질 쓸쓸함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는 자신만큼 남들의 고독을 잘 이해하고 헤아려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신의 고독을 뒤로하고 남의 고독을 들어줄 수가 있었겠는가.



그는 고독이 주는 쓰라림을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 고통을 알기 때문에 그들과 마주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도 그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것은 자신이 해고를 당해 심경이 편치 않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겨울 공원’에 비유하며 ‘겨울 공원에 가는 사람은 없잖소?’라고 말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는 해고를 당하기 전이나 후나 늘 겨울공원이었다. 음울한 건 마찬가지고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돈이 없어 영양상태가 좋지 못한 것과 가재도구가 줄어든 것이다. 천진난만 했던 아이가 나쁘게 된 것은 환경 탓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겨울 공원이라고 말하는 사람. 리앤수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미워하지 못하는 사람임이 느껴진다. 그래서 화자가 ‘당신은 인간을 너무 나쁘게만 보는 것 같은데’라고 말했을 때 차갑게 웃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누에집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라는 말의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닐까. 누에집들은 그 생김새가 다 다르듯이 고독도 그 모양새가 다 다르다. ‘고독’이라는 단어 속에는 전 인류만큼이나 다양한 고독들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리엔수의 고독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고독은 이런 모양을 하고 있다. 거센 바람이나 파도에 온 몸이 상처를 입어도 다른 돌들을 그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큰 바위. 그의 고독은 찢겨진 상처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보호하고 있는 돌들에게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아, 사람이 죽은 뒤에 한 사람도 그를 위해 울어 주는 이가 없도록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야.”



리앤수는 타인의 고독을 받아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무도 자신을 위해 울지 않게 하려고 한다. 누군가가 죽어 그를 위해 운다는 것은 상실의 아픔이 있다는 것이다. 리앤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아픔조차 남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혼도 하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의 죽음에 가장 슬퍼할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는 마치 세상에서 자신의 모든 흔적을 지우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도 결벽증적으로. 마지막까지 모든 고독의 짐을 자신이 짊어지려한다.






그의 삶



리앤수는 성공했다. 그의 장례식에서 그를 위해 울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형식적인 곡소리만 있을 뿐이었다. 그가 좀 더 살기를 바라던 한 사람도 이미 죽고 없었다. 그는 그의 소원을 이뤘다. 아무에게도 상처를 남기지 않고 떠난 것이다. 마치 성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모진 환경 속에서 자신이 상처를 입어도 두 팔로 남을 감싸 안은 모습. 그리고 그 와중에도 아무런 존재감 없이 조용히 있다 가는 모습.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맞나?)으로 향하는 예수님만큼이나 아름다운 모습이다. 희생과 박애의 정신! 그러나 그는 인간이다.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신이 되려 했다. 희생과 박애는 허울 좋은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잊었다.



리앤수가 가난에서 벗어나 뚜 사단장의 고문이 되어 운이 트이게 되고 난 후 화자에게 서신을 보낸다. 이 마지막 서신에서조차 그는 끝까지 멋있으려한다.



“인생의 변화는 너무도 빠르오! 지난 반년 동안 난 거의 거지나 다름없었소. 아니, 실제로 이미 구걸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소. 그러나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소. 나는 그것을 위해 구걸을 하고, 그것을 위해 추위에 떨고 굶주렸으며, 그것을 위해 고독하게 살았고, 그것을 위해 고통을 받았소. 하지만 멸망만은 원하지 않소. 보시오, 내가 좀더 살기를 원하는 한 사람의 힘은 이렇게 컸소. 그런데 지금은 없소. 이 한 사람마저도 없어졌소. 동시에 나 자신도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느꼈소. 다른 사람은? 역시 자격이 없소. 동시에 난 또 내가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기어코 살아가야 하겠다고 생각하오. 다행히 내가 잘 살아가기를 바라던 사람은 이미 사라졌으니까 그 누구도 마음 아파하지는 않을 것이오. 나는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소.”




언뜻 보면 굉장히 멋있어 보인다. 자신의 굳건한 신념을 지키며 그 신념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모습. 그리고 그가 좀더 살기를 원하던 한 친구가 그에게 엄청난 힘이 되었다는 것도 느껴진다. 그 친구는 아마 리앤수와 비슷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친구가 리앤수란 사람을 알아 볼 수 있었을 것이며 그에게 많은 힘이 되었을 것이다. 친구를 잃고 절망하며 울부짖는 리앤수를 보건데 그 친구는 리앤수의 내면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의 힘은 얼마나 컸던지 리앤수는 구걸도 추위도 고통도 고독도 견뎌냈다. 그러나 그 친구가 죽자 살아갈 의지를 잃었다. 자신은 살아갈 자격이 없지만 그 친구를 죽인 놈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 놈들을 위해서라도 살아가려 한다. 뭔가 이상하다. 희생과 박애의 리앤수가 갑자기 복수의 화신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앞에서 살펴본 내면대로라면 이 순간에 리앤수가 취해야 할 행동은 자살이 더 옳아 보인다. 그런데도 살아가려 한다니.



그가 서신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그의 삶은 항상 누군가를 위한 삶이었다. 자신을 믿어준 친구를 위해 살아가던 삶, 그 친구가 죽고 나서는 그의 적들을 위해 사는 삶, 자신을 찾아오는 실의에 빠진 청년들을 위한 삶. 리앤수는 남들을 위해 자신이 살아왔지 자신을 위해 인생을 살아오지는 않은 것이다. 고독, 희생과 박애, 복수라는 것들도 다 그의 이런 태도 때문에 생겨난 말들이다. 이 단어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전제로 생겨날 수 있는 단어들이다. 그는 자신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생각해 왔고 그렇게 만들어 온 것이다. 그는 분명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왔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말했듯이 멸망만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미 멸망했다. 그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멸망했다. 이 세상을 자기가 스스로 자신의 발로 서서 살아가는 것에는 많은 책임감이 따른다. 리앤수는 이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이 무겁게만 느껴졌고 무의식적으로 피하려 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핑계거리로 고독과 희생정신이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삶의 본위가 되었을 때의 모습은 마치 고귀한 신의 모습을 띄게 된다.



리앤수는 서신에서 ‘실패했소’라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간간이 ‘승리했소’라고 말하기도 한다. 자신이 자신의 삶을 평가하고 논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모든 생을 마감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화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들이 결국 같은 길을 걷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오. 그렇다면 제발 나를 잊어 주기 바라오. 당신이 일전에 나의 생계를 걱정해 준 것에 대해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소. 그러나 이제 나의 일을 잊어 주시오. 나는 이미 좋아졌으니 말이오.”



자신이 누군가의 기억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 리앤수는 이 구절을 쓰면서 마음속으로 얼마나 울었을까. 차가운 말투로 자신을 잊으라고 말하지만 속으로 징징 짜면서 정말 외롭다고 울부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끝까지 쿨한 척 하고 있다.



자신을 고귀한 위치로 끌어올려 스스로의 생을 논하고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리앤수의 모습은 솔직히 오만해 보인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변명할지도 모른다. 나는 정말 고독했고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에 그들이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이런 내가 뭐가 오만하냐고. 그가 고독한 것도 상처를 입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그 고독에 휩싸여 누에집만한 세계에 갇혀 살아갈 뿐이었다. 울고 싶고 친구와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싶고 때론 즐겁게 살고 싶은데 삶이라는 것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한 나머지 고독이란 단어에 갇혀 살아온 것이다.



이 세상에 그토록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았던 그는 이를 남들에게 상처를 주기 싫어서라고 말하지만 사실 자신이 자신의 존재를 그토록 싫어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감도 없고 애착도 없기 때문에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고독과 희생이란 말로 포장했다. 자신의 삶을 살아보지도 않은 사람이 실패했다느니 승리했다느니, 나를 잊으라니 라고 말하는 것은 오만하다. 이 세상에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을 거란 생각이나 나만 왜 이런 고통을 다 당하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삶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다.
 



(* 사진은 영화 '더 로드' 캡쳐 장면입니다. 소설 '고독자'와는 내용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지만 캡쳐를 하면서 왠지 부끄러워지네요. 나는 리엔수를 정말로 이해하기 싫었구나란 생각이 자꾸 들어서요. 반면에 영화 속 주인공에게선 그의 슬픔을 느끼고 말이죠. 시시각각 변하는 저의 마음이 무섭네요.)


Posted by masou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