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잔잔2011. 6. 24. 03:32

2ne곰 윤미

어떤 열매: 둘

1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작품인 <까라마조프씨네 형제들(1880)>을 펼치면 제일 첫 장에 있는 문장이다.

정말 잘 들어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복음 12장 24절)

책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저 문장의 여운을 통해 알게 된 건데, 아마도 D선생은 이 한 문장을 가지고 천여 페이지가 넘는 긴 이야기를 만들어낸 듯하다. 왜냐면 저 한 문장이 신의 존재(‘잘 들어두어라’라고 말하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 죽음(희생)과 그 결실에 대한 이야기 등을 모두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2장 24절의 ‘말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그저 자연을 관찰한 ‘사실’을 말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열매 중 일부가 씨앗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열매 혹은 열매의 일부로써 그대로 존재할 테고, 그것이 땅에 떨어지면 씨앗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는 사실. 농사를 짓거나 조그만 텃밭을 일구거나 화분을 키워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게 되는 그 사실이 말로 표현됨으로써 ‘말씀’이 된 것이다(물론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입장에서). 마찬가지로 D선생은 그 사실을 ‘이야기’로 풀어냄으로써 열매를 맺는다.

그래서 말인데 나도 D선생의 이야기를 읽고 어떤 열매를 품게 되었다. 어쩌면 어떤 씨앗인지도 모르겠지만.

 



2

D선생이 풀려는 이야기는 형제들의 아버지인 까라마조프의 살해사건이다. 그리고 그 사건 속에 있는 형제들은 삶의 커다란 주제를, 대화를 혹은 메시지를 이야기의 형태로 풀어나간다. 이반이 알료샤에게 들려주는 몇 가지 이야기들이 대표적이다. 이반은 차남으로 형제들 중 공부를 제일 많이 했고 신을 믿지 않았다. 아버지는 호색한에 교활하고 계산적이며 연극적이다. 이반은 아버지를 싫어하지만 형제들 중 그나마 아버지와 괜찮은 관계를 맺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결국 아버지를 죽게 만든 건 이반의 몫이었다.

그에 반에 맏형인 드미뜨리는 겉으로 드러난 많은 부분에서 이반과 대조된다. 드미뜨리는 호전적인 무인이다. 이반이 지식으로 잘 포장된 사람이라면 형 드미뜨리는 거친 날 것의 느낌이다. 또한 드미뜨리는 아버지와 직접적인 대결구도에 놓여있다. 어머니의 유산문제를 둘러싼 갈등에 그뤼센카라는 여인을 둘러싼 갈등까지 더해져 아버지를 증오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아버지를 많이 닮아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벌레에게는 정욕을!> 내가, 얘야, 바로 그 벌레에 해당된단다. 그건 특히 나를 지칭하는 말인 거야. 그리고 우리 까라마조프 집안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야. 천사 같은 너의 내부에도 벌레가 살고 있고 너의 피는 폭풍을 잉태하고 있단다. 그건 폭풍이지. 왜냐하면 정욕은 폭풍이고 또 폭풍보다 더 엄청나기 때문이지! 아름다움이란 무시무시할 정도로 끔찍한 것이란다. 무서운 것이지. 아름다움은 규정되지 않은 것이고 결코 규정할 수 없는 것이며 신이 던진 유일한 수수께끼니까.......아니야, 인간은 광활해. 너무나 광활해, 나는 그걸 축소시킬거야. 나원 참, 도대체 알수가 없다니까! 이성의 눈에는 치욕으로 보이는 것도 마음의 눈에는 끊임없이 아름답게 보이니까. 그러니 아름다움은 소돔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니?

드미뜨리는 자신이 아버지와 닮아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그 점을 두려워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그것을 또 다른 아름다움이라 여기기도 한다. 이렇게 막내동생 알료샤에게 전하는 말 곳곳에서 드미뜨리 내면에 있는 이야기가 드러난다. 또한 드미뜨리는 뜨거운 사람이기도 하다.

어디 한 번 말해보게. 어째서 집에 불이 난 어머니들이 저렇게 서 있는지, 어째서 저렇게 불쌍한 사람들이 존재하는지,.....어째서 초원이 저렇게 황량해졌는지, 어째서 저들은 서로 안아주고 입맞춤하지 않는지, 어째서 즐거운 노래를 부르지 않는지, 어째서 저들은 혹독한 재난 때문에 까맣게 변했는지.......

이런 드미뜨리가 아버지의 살인사건 용의자로 지목된다. 그리고 별다른 항변 없이 그대로 재판을 받고 누명을 쓰고 만다. 드미뜨리를 땅에 떨어져 죽은 밀알 하나로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드미뜨리의 희생은 끝없이 바르고 착한 막내 알료샤라는 열매를 희생이 되는 것일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D선생에게 씨앗문장 같은 것이었을 요한복음12장 24절의 내용을 소설 전체와 억지로 끼워 맞추려 드는 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단 계속 가보겠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한복음12:24)

의문: 하나의 밀알의 ‘죽음(희생)’이란 게 무엇일까?

하나의 밀알이 단순히 열매의 종자로써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생명의 토대를 만드는 것이 하나의 밀알의 '죽음(희생)'이라고 생각한다. 씨앗이 뿌리내리고 자랄 수 있는 흙, 양분을 토해내는 것. 그러니까 썩어 버리는 것 말이다. 왜냐하면 사실 땅위로는 무수히 많은 씨앗들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씨앗자체보다 더 중한 건 바로 그 씨앗을 자라게 해줄 어떤 장場 내지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아버지가 죽고, 맏형이 누명을 써 벌을 받고, 둘째가 죄의식에 괴로워하며 죽어간다. 그리고 이 일련의 사건 혹은 희생으로 인해 알료샤는 홀로 더 풍부한 사유를 진행시킬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따지면 드미뜨리의 희생(누명쓰기)으로 대표되는 이 까라마조프가의 이야기는 알료샤라는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한 장을 열어준 것이 된다.

이야기, 그리고 공간, 그것이 내가 맺고 싶은 어떤 열매 혹은 어떤 씨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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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잔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