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잔잔2013. 11. 13. 16:39

 

선은이가 지현이 전주못온다는 글 백지에 남겼다는 얘기에 들어왔다가 갑자기 글 하나 남기고 갑니다.

저는 굴파고 들어갔다가 나왔다가를 반복하며 잘 지내고 있어요. 2월에 이음이 동생 여울이가 나옵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쪽파랑 알타리랑 무다듬어서 총각김치 담았어요. 생각이 많아지고 굴을 파고 들어갈거 같은 느낌이 올때 단순하고 좋은 향이 나는 작업을 하며 시간 보내는 걸 추천해봅니다. ^^

아마 두달정도 뒤에 푹 익은 총각김치를 먹으며, 아 이걸 담던 때 내가 그런 생각을 했었더라지, 하고 냠냠쩝쩝하겠죠. 흠 아무튼.

 

어제 우연히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를 다시 봤어요.

제가 엄청 좋아했던 영화에요. 보고나서 마지막 대사를 외워뒀는데 아직도 툭치면 그 대사를 읊을수 있답니다.

뭐랄까. 짝사랑만 주구장창하며 지내던 그런 날들을 보내던 중에 '사랑' 그것도 '영원한 사랑'에 대한 판타지같은 걸 가지며 가슴에 깊이 묻어두었더라죠.

줄거리를 다 알거라 여기고 대충 얘기하자면 첫눈에 반한 두남녀의 사랑이야기에요. 순수하고 풋풋한 느낌이 막 나죠. 조소과 여학생과 국문과 남학생의 러브스토리. 그러다 남학생이 군대를 가던 날 여학생이 마중나오다 트럭에 치여 죽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남학생은 다른 여자와 결혼해 애낳고 살고 국어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담임을 맡은 반에 한 남학생이 지나간 첫사랑 그녀를 떠올리게 하는 말과 행동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남학생이 환생한 그녀라고 믿고 사랑합니다. 당연히 학교에 소문이 나고 학교를 그만두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를 떠올리게 했던 그 남학생도 자신의 전생을 자각하고 선생님을 찾아 함께 떠납니다. 뉴질랜드에 번지점프를 하러말입니다. 줄없이요. 영화부제가 bungee jumping of their own 이에요. 그들 자신속으로 번지점프를 하다, 인가요.

 

영화줄거리는 이만 할게요. 아마 예전에 처음 봤을 때 줄거리를 썼다면 더 아름답게 썼을 거에요. 대사도 막 인용해가면서 말이죠. 사실 아름다운 영화에요! ^^

그런데 늙어가며 삐딱해져서 그런가. 영화결말이 엄청 거슬리더라구요. 어제밤내내 생각나고 결국 오늘 아침엔 한마디라도 적어둬야겠다 싶을 정도로요. 웃기죠.

뭐가 거슬렸냐면요, 두 사람의 사랑이 인생을, 삶을 너무 무시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인생에게 무례하다고 해야할까요. 몇번을 태어나고 죽어도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 자체는 그럴 수도 있고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사람과만 행복하기 위해 죽음을 택하는 건 이해가 안되고 화가 나네요. 주인공 남자가 교사가 되서 만난 반 아이들에게 엄청난 인연으로 우리가 이 교실에 앉아 서로 만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렇다면 그 엄청난 인연을 무시하고 죽음으로 끝내는 건 뭔가요, 싶은 겁니다. (물론 그 절벽아래로 뛰어내려도 끝이 아니라고 영화는 말하지만 그 이후에 환생한 삶은 별개의 또 다른 삶인거죠)

사회적으로 두 사람의 사랑이 동성애라는 이름으로 핍박받으니 죽어서 다시 환생해서 만나자.

결말이 이렇게 읽혔어요. 너무 삐딱한가. 흠

그렇다면 내가 원하는 결말은 뭘까요.

 

주어진 생애 내에서 다시 만난 자신의 사랑을 꿋꿋하게 지키면서 나머지를 살아가는 겁니다.

 

물론 아마 그런 결말이었다면 영화주제가 틀어질수도 있겠죠. 근데 저는 동성애에 집중하고픈 게 아니라

그냥 반복되는 일상을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가는 것, 살아가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싶어요.

 

 

글을 마구 휘갈기며 저를 돌아보게 됩니다.

내가 왜 이 결말에 흥분했는가.

 

아마 나는 열심히 지루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데 아름답게 손을 꼭잡고 번지점프를 하는 그 두 사람의 모습에 질투가 났나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매일 이음이와 꼭 붙어 비슷비슷한 날들을 보내고 있어요. 물론 아주 꼼꼼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일매일 순간순간이 다르지만..........................그런 게 보이는 날들은 손에 꼽고요.

다들 어찌 지내나요?

지현이는 저번에 얼굴 봤는데 취업준비로 그리고 맏딸로 서느라 애쓰고 있는 것 같았어요. 살도 많이 빠져보였고요.

다른 친구들은 곰쌤 결혼식때 보겠죠. 그럼 그때 봅시다.

글 쓰면서 급흥분했다 혼자 가라앉히고 내려갑니다. 안녕.

 

Posted by  잔잔
에세이/잔잔2013. 5. 6. 21:07

 

4월의 육아일기는 짧게 업뎃하고 지현이가 제안하고 선은이가 불을 지른 버킷리스트만들어보고자 다시 컴터앞에 앉습니다. 분명히 육아일기 쓰고 바로 앉아서 이 창을 띄워놓고 있었는데...... 어느새 일주일이 훌쩍 지나가버렸네요. 요즘 진짜 정신이 없어요. 오뉴월에 개도 안걸리는 감기로 시름시름 앓고 있으려니 더욱 정신이 없네요ㅜㅜ 그동안 꽃시장돌아다니고 동대문에 천떼러 다녀오고 닥나무에서 뽑은 실로 만든 한지드레스2차가봉도 체크하러 갔다오고..이음이도 쫓아다니느라 힘들었을 텐데...이음인 저보다 건강한가봐요. 아프지도 않고 씩씩하게 늦잠자는 엄마를 뒤로하고 거실로 나가더니

두루마리 휴지 하나로 신발장에서 열심히 놀았답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요새 아침마다 굿모닝팝스하나씩 듣고 있어요. 새벽6시에 하는 본방은 절대들을 수 없고, 걍 다운받아서 쌩쌩이랑 같이 듣고 있슴니다^^; 버킷리스트가 영어잖아요. busket list 버킷은 양동이란 뜻인데 왜 양동이 목록이 죽기전에 꼭 하고싶은 일의 목록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네요. 흠 궁금하군. 암튼 그래서 영어로 제목써봤어요. 드로우 업 어 버킷 리스트! 

 

1. <The little prince>번역하기. 어린왕자는 아큐정전다음으로 제가 여러번 읽은 책일거에요. ^^ 이음이가 뱃속에 있을때도 한글번역책 한 번, 영어번역책 한 번씩 소리내서 읽어줬다죠. 영어조기교육은 아니고요, 한글로 된것만 보다가 영어번역된 거 보니까 뭔가 느낌이 훨씬 더 맹랑하고 섬세한 것 같더라고요. 한문단씩 공책에 옮겨쓴담에 다시 내 말로 바꿔보고 있어요. 요거 다해보면 나중에 원서, 불어로 된 어린왕자를 읽어보고 싶네욧!

 

2. 스케치북이랑 펜들고 국내 도보or 자전거 여행하기. 아 생각만하여도 가슴설렙니다. 서울에서 1번국도를 쭉 따라걸으면 부산까지 간다던데.훗. 이음이가 많이 크면 같이 할 수도 있으려나..^^;

 

3. 작은 온실 작업실 만들기. 비닐하우스로 된 꽃가게들 들어가본적 있죠? 들어가면 습도와 온도가 향기가 너무 좋아요. 따뜻하니 잠도 잘 올 거 같고. 나중에 꼭 온실을 만들어서 거기에서 꽃도 가꾸고 나무도 가꾸고 저도 가꾸며 살고 싶어요. 거기서 노래도 부르고 글도쓰고, 차도 마시고.. 옛날엔 정원을 가꾸고 싶었는데 이젠 좀더 아지트느낌이 나는 온실을 가꿔보고 싶어졌어요.

 

일단 이렇게 세가지 적어두고 갑니다. 모두 엄마되고 나서 생긴 버킷리스트네요. 또 하고픈 일들이 생기면 요기에 업뎃해둬야겠어요. 한 오십년 흐른뒤에 몇개나 했을까 체크해보면 재밌겠다! ㅎㅎㅎ 그럼 좋은 밤^^

 

 

으억, 결혼식이 이제 2주도 안남았네요. 흐헑.

Posted by  잔잔
에세이/잔잔2013. 4. 30. 12:24

 

 

 

2012년 6월 18일 새벽 6시 8분 이음이가 태어났다. 뱃속에서 살짝 하늘을 보고 있던 탓에 이음이가 나오기까지 2박3일이 걸렸다. 진통이 계속 되는 와중에도 병원에 가기 싫었던 나는 쪼그려앉았다 일어서기, 걷기등의 운동을 하며 이음이가 어서 나와주기를 기도했다. 전날 밤 9시에 양수가 터졌고 밤새 나는 엄청난 진통과 씨름하며 새벽녘에 머리가 꼬깔콘처럼 눌려서 나온 이음이를 만날 수 있었다. 이음이가 나오고 나는 거의 실신했다. 사진속의 나는 '아 이 아이가 내 뱃속에서 자라 나오다니! 신기해' 하는 표정으로 이음이를 보고 있다.

 

힘들고 아팠던 출산의 과정과 더불어 이 작고 여린 아가를 씻기고 재우고 먹이고 달래면서 나는 모성애라는 엄청난 힘으로 이음이에게 집중했다. 집중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몸은 점점 회복되고 나는 슬슬 다른 것들에도 관심을 두며 이음이에 대한 관심의 비중이 9할에서 8할로, 그리고 7할로 줄어가고 있었다.

 

그 무렵 이음이도 눈을 뜨고 팔다리를 휘저으며 세상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음이가 제일 관심을 두었던 세상은 엄마, 라는 세상이었다. 엄마가 말할 때 움직이는 입, 깜빡이는 눈과 눈동자, 엄마 손의 움직임을 좇으며 따라하고자 노력하기 시작했다.

 

노래하는 엄마를 향해 고정된 이음이의 표정

아마 어느 순간부터 이음이는 엄마인 나의 모오든 움직임과 더불어 미세한 감정변화에도 집중하며 나를 관찰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나는 착각하고 있었다. 엄마인 내가 이음이를 더 많이 사랑하고 아끼고 있다고 말이다. 물론 그렇게 말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이음이가 나를 더 사랑하고 있음을 의식한 적 없이 반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이음이는 나를 아낌없이 사랑하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모오든 것을 다해 온전히 나를 사랑하고 있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나는 마치 쌩쌩에게 사랑받는 순간에 느꼈던 감정과 기분,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다면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사랑받는 처자들처럼 예뻐져야하리라,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이 태어나 처음 배우는 것은 바로 아낌없이 사랑하는 일이라는 것도 알았다.

이음이는 게으르고 한심한 순간의 나도, 바쁜척하며 이음이를 조금 귀찮게 생각하는 순간의 나도, 안된다고 소리치는 나도, 재밌는 책이나 게임에 빠져 깔깔대는 나도....모두 사랑한다. 이렇게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다는 것, 어쩌면 나는 내가 이음이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사랑은 또 다시 다른 어떤것, 다른 누군가에게 흘러가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 서로가 충분히 넘치는 사랑을 주고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피곤하고 고될때도 많지만 그래도 엄마가 홀로 육아와 씨름한다는 말은 이제 나에게 없는 문장이 되어가고 있다.

 

이음이를 목욕시키고 나서 찍은 사진. 힘이 더 세진 이음이를 목욕시키는 데에 점점 더 많은 힘이 필요해진다^^

Posted by  잔잔
에세이/잔잔2013. 3. 31. 14:56

 

 

 

이음이의 기상시간은 보통 6시에서 8시사이. 몸이 아프지 않다면 아침에 기분 좋게 일어난다. 그리고 자고 있는 엄마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보거나 때려본다. 그래도 엄마가 일어나지 않으면 혼자 논다. 주로 방안에 있는 장난감피아노를 치고 놀거나 자기서랍을 열어 옷이나 수건을 죄다 꺼내놓거나 개켜진 기저귀를 펼쳐놓거나 화장대수납장을 빼 놓으며 논다. 그러는 중에 새로운 물건을 발견하면 길게는 1시간까지 그렇게 놀수있다. 그러다 혼자놀기 한계에 다다른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엄마를 깨운다. 때리고 꼬집고 칭얼칭얼. 그럼 나는 일어나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아주고 조끼를 입히고 목수건을 해주고 양말을 신겨 거실로 나온다.

내가 전날 밤잠을 설쳐 피곤한 경우엔 쌩쌩이를 깨워 이음이를 맡기고 나는 30분에서 1시간정도 더 잔다. 그 경우가 아니라면 일어나서 아침먹을 준비를 한다. 7개월부터 본격 이유식을 시작한 이음이의 밥도 만들어야 한다. 얼마전부터는 젖먹는 것에서 배부름을 얻는 것 외의 다른 배부름을 요구하고 있다. 낮잠자고 일어나 오후가 되면 나를 주방으로 이끈다. 밥을 달라는 것이다.

아침에도 그렇다. 젖먹고 거실에서 좀 놀다가 나와 썡쌩이 아침을 먹으려 하면, 이젠 꼭 자기도 먹어야 한단다. 그래서 식탁은 늘 정신없다.

 

전에는 쌀을 불렸다가 갈아서 미음을 써줬는데 아랫니 두개가 나면서부터는 그냥 한 밥에 애호박이나 시금치, 연근, 쇠고기, 브로콜리, 감자 등을 잘게 썰어 물과 함께 넣어 푹 퍼지게 끓여서 먹인다. 간은 하지 않는다. 엄마 입맛에는 싱겁고 맹숭맹숭하지만 고맙게도 이음이는 맛있게 잘 받아먹는다. 이음이가 밥이나 먹을 걸 거부한다면 그것은 몸이 아프다는 것. 신기하게도 조금 열이나거나 감기기운이 있으면 잘 안먹는다. 아무래도 몸이 아픈 곳 치료에만 집중하겠다는 표시겠지. 아무튼 이음이는 잘 먹는다!

 

특히 한동안 엄마아빠의 숟가락, 젓가락질을 유심히 살피더니 요즘은 직접 숟가락질을 한다.

숟가락질.

숟가락질!

 

나는 이음이가 숟가락질 하는 모습이 좋다. 숟가락을 쥐고 거꾸로 먹기도 하고 옳게 먹기도 하는데 아무튼 굉장히 집중해서 숟가락을 그릇에 한 번 댔다가 얼굴에 한번 댔다가 그런다. 그 모습이 뭔가 멋있다. 한번은 저녁밥을 먹이다 몰래 동영상을 찍어두기도 했다. 자기가 한 숟가락질을 통해 밥을 조금이라도 먹게되면 내가 먹여줬을때보다 더욱 기쁜 듯 쩝쩝 거리면서 먹는다.

아무래도 이음이의 숟가락질이 내게 멋져보이는 이유는 나는 아무생각없이 무심코 하는 일, 수저를 들어 밥을 퍼 내 입으로 날으는 일을 이음이는 매우 진지하고 조심스럽게 그리고 특별하게 하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이음이가 새롭게 시도하는 많은 일들은 그러한 이유로 앞으로의 내게 늘 감동이 될터.

 

 

딸기를 손에 쥐고 으깨고 있다 딱딱한 과일은 아직 씹을 수없어 켁켁거리지만 말랑말랑한 딸기는 만만한 이음이!

 

이렇게 하루 두번에서 세번정도 숟가락질을 하고 나면 집안에는 평화가 찾아온다. 물론 잠깐이지만. 내가 홀로 다른 짓(!)을 해도 이음이가 그렇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자기할일(!)을 한다. 그러니까 나는 나대로 이음이는 이음이대로의 시간이 잠깐동안 이어진다. 서로가 저기에 여기에 있다는 것을 알은체로 자기만의 시간을 여유롭게 보낼 수 있는 것, 나는 그것을 평화라고 생각한다. 지금 집에서 가질 수 있는 이음과 나의 평화. 생각해보니 평화라는 말도 그렇다. 밥을 나눠 먹는 게 평화平和다. 수확한 벼禾를 고르게平 나눠 먹는 것口. 물론 그렇게 서로 밥을 나눠 먹고 오는 평화는 잠깐이 아니냐 할 수도 있지만 그 잠깐의 시간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어 남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비단 이음과 나만의 평화만 그러할까. 거시적안목의 평화도(!) 밥을 나눠 먹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지 않을까.

갑자기 멀리갔다. 간김에 더 가볼까. 요즘 유행이라는 '먹방(먹는방송)'도 어쩌면...음. 돌아와야겠다.

 

 

 

 

다먹은 빈그릇을 들고 좋아하는 이음이 얼굴에 평화가 한 가득 보인다!

마무리로 시 한편 더해본다.

 

 

꽃으로 시작하다

이영식

네 살배기 처조카 꼬맹이가 숟가락질을 한다

장난감처럼 작은 수저로 밥덩이를 실어 나른다

흰밥을 수북이 떠 입가로 가져가지만

밥알은 절반 넘게 숟가락 밖으로 뛰어내린다

아이는 무릎이며 바닥에 떨어진 밥알을 줍지 않는다

밥을 얻기 위해 한 삽의 무엇도 해본 적 없는

조그마한 입에 밥은 목적이 아니다, 놀이다!

하나의 동선으로 이어지는 저 지극함

내 풍진 묻은 손으로는 따라할 수 없는

장난감 나라 먼 축제처럼 보인다

아이가 떨어진 밥알을 방바닥에 으깨어 붙인다

한두 송이 이팝나무 꽃으로 피어난다

희망처럼 씹었지만 비굴이 되기도 하는 밥

볼에 핀 밥풀을 떼어 먹는다, 아이는

기나긴 여정의 발원지이자 종점인 숟가락질을

꽃으로 시작하고 있다.

<현대시, 2010 2월호>

 

 

 

 

Posted by  잔잔
에세이/잔잔2013. 2. 18. 19:17

 

 

이음이가 태어난지 반년이 넘었다. 만7개월이 넘은 이음이는 두살이 된 2013년 1월1일부터 기어다니더니 이젠 상이나 벽을 짚고 위태롭게 일어서 미소짓는다. 어쩌면 여름이 오기전에 이음이는 걸을지도 모르겠다.

 

 

이음이는 정말 무럭무럭 크고 있다. 애들은 자고 일어나면 큰다는 옛말이 틀린말이 아니다. 낮잠만 조금 오래자고 일어나도 눈빛이 다르다. 내가 노래를 불러주거나 손을 쥐었다폈다하며 '잼잼'이나 집게손가락으로 손바닥을 찍는 '곤지곤지'를 보여줄때마다 그것에 집중하는 눈빛이 매순간 다름을 느끼고 있다. 내가 보내는 시간과 이음이가 보내는 시간의 깊이나 결은 분명 다를 것이라고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이음이가 태어났을때부터 쭉 한결같이 이음이를 대하고 있었다. 배고프지 않게 먹이고, 기저귀가 젖어있지 않게 살피고, 춥고 더럽고 위험한 것으로부터 이음이를 지켜주는 것.

 

12월 25일 이사후 새로운 집에 적응하랴 피곤한 나와 이음이는 며칠 밤잠을 설쳤다. 많으면 두세번정도 수유하고 잤는데 이사온 뒤로 이음이가 대여섯번씩 밤중수유를 요구하는 것이다. 너무 피곤한 나는 그냥 누워서 물렸고 그것이 며칠 반복되자 습관처럼 젖을 물고 자고 싶어했다. 결국 나는 밤새 젖물리고 기저귀갈아주기를 반복하다 새벽녘엔 녹초가 되고 말았고 아침엔 잠을 못잔 짜증과 스트레스로 온 신경이 곤두서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녹초가 된 나는 이음이와 전쟁아닌 전쟁을 치르게 됐다. 기어다니기 시작하면서 활동영역이 더욱 넓어진 이음이는 저기서 쿵 여기서 쾅하며 울기 일쑤였다. 게다가 이음이가 만지면 안되는 물건들은 주변에 왜이렇게 널려있는지 쫓아다니며 치우기 바빴다. 종이는 먼지가 많아 안되고, 전자제품은 위험해서 안되고, 그릇은 깨져서 다칠까봐 안되고, 신발장이랑 화장실은 더러워서 안되고... 그즈음 내 머릿속을 떠다닌 동요 한구절이 있다. "이것도 안돼~ 저것도 안돼~ 안돼는 게 너무 많아요~네. 사람들은 어른이 되면은 어린시절 까먹나봐~"

 

그렇게 한 일주일 흘렀나. 정말 피곤했다.

그러다 어느 오후 이음이랑 눈을 마추고 노래를 불러주는데 이음이가 눈으로 나에게 뭔가 말을 해주는 것 같았다. 그순간 팍, 졸고 있는 내 정신이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이음이는 말 그대로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그 반면 나는 늘 '그날이 그날'이었다. 자고 일어나 밥먹고, 이음이 먹이고 재우고, 또 밥먹고, 한자외우거나 컴퓨터하고, 이음이 씻기고 먹이고 재우고.. 하지만 이음이는 이불에 그려진 작은 그림도 어제 본거랑 또 다르다는 듯 오늘 다시 눈여겨 보고, 어제 했던 문열고 닫는 놀이가 오늘 또 새롭다는 듯이 즐거워 했다.

여기서 늙어버린 나의 정신세계(!)를 탓하거나 반성하고 싶지는 않다. 그 역시 자연스러운 성장과정이라 믿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의 모든 일상을 시시하거나 맨날 똑같애서 죽겠다고 여기고 있지 않고 있으므로. 반복되고 있는 일상에서 나름의 삶을 가꾸고 있으므로.

중요한 것은 이음이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게 되었고, 그것에 반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초중고등학교를 함께 다니며 수많은 추억을 가진 옛친구들을 만날때마다 나는 반가움과 함께 늘 조금은 못된 의문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왜 우리는 만날때마다 과거지사를 들추는 것 밖에 할 수 없을까. 물론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등의 이야기도 나누지만 주로 옛날이야기들을 즐겁게 소비하고 헤어지기가 일쑤였다. 아무래도 현재 함께 나누고 있는 혹은 나눌 수 있는 어떤 꺼리가 없기 때문이겠지, 하고 나름의 답을 내렸지만 그래도 석연치 않은 뭔가가 있었다. 왜냐면 그렇다고 억지로 뭔가를 하는 것도 웃기고, 물리적으로 쉬운 일도 아니기 때문에. 결국 나의 석연치않은 그 마음은 속으로 품고 있어야만 했었다.

그런데 이음이와 부대끼다가 그러한 내 마음을 풀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됐다.

 

관심關心이다.

쉽게 하는 말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니 좀 웃기다. 관關은 성문을 닫아 놓은 모양의 형성자인데, 국경이나 국내요지의 통로에 드나들던 화물이나 사람을 조사하던 곳(네이버한자사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그냥 보는 게 아니라 뭔가 수상하거나 이상한 점은 없나, 저 사람은 어디서 왔을까, 저 보따리엔 뭐가 있을까..아주 세심하고 면밀하게 봐야만했던 사정이 있는 글자에서 관심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관계,라는 말도 저 관자를 쓴다.

나와 이음이라는 모자관계에서 관심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엄마 눈은 아기를 좇는다. 그렇다 보니 처음이어서 버벅대긴 했지만 매일 달라지는 이음이를 느끼고 거기에 대응할 수 있게 됐다. 더럽고 다칠수 있더라도 이음이가 먼저 만져보고 다가갈 수 있게 열어주었다. 그 다음에 더러워지면 닦아주고 다쳐서 울면 안아주면 오케이. 아주 간단하게 해결됐다. 물론 여전히 피곤한 일상이지만 이음이와 투닥거리더라도 '아 도대체 얘가 왜이럴까'하는 그 불편한 마음만은 사라졌다.

모자관계외에도 소중한 관계는 생각보다 많다. 지켜가고 싶은 소중한 관계는 관심을 갖는 노력을 해야할 것 같다, 노력!  관심을 갖고 있을 때만이 적재적소에 업데이트가 가능하고, 함께 할 때 피곤하지 않고 즐거울 수 있을테니 말이다. 이음이만 변하고 있는 게 아닌가보다. 나도 크고 있다. 늙고 있다. 지키고 싶은 것들이 생기고 있는 걸 보니. 참고로 늙는다ㅡ는 말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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