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07. 23 / 2ne곰 / 이것이 인간인가
발제자 : 희사
파시즘에 대한 작은 생각들
그들의 영혼은 죽어 있다. 음악은 바람이 낙엽을 날리듯 그들을 떠밀며 그들에게서 의지를 몰아낸다. 의지 같은 것은 이제 없다. 북소리의 박자가 걸음이 되고, 반사작용으로 지친 근육을 잡아당긴다. 독일인들은 이 점에서 성공했다. 1만 명의 동료들은 단 하나의 회색 기계들이다. 그들은 정확할 정도로 결연하다. 생각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그저 걸을 뿐이다. -p74
l 생각1. 파시즘을 낳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까지도 파시즘에 대한 생각은 몇 번 했었다. 파시즘은 왜 발생하는가? 일본에서 다시 파시즘이 자라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문득 생각하곤 했다. 설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러나 나는 파시즘이 발생하는 데에는 우파들의 선동이 많이 관련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큰 몸짓으로 선동하는 히틀러와 그것에 열광하는 민중들의 모습. 무지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이것이 나의 파시즘에 대한 이미지다. 그래서일까, 나는 파시즘에는 민중들의 ‘자발성’이 큰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들 안에 있는 파시즘을 경계하고 내 안에 있는 파시즘을 경계하라. 파시즘에 대해 갖고 있는 나의 기본적인 생각의 틀은 이런 식이다. 이 틀은 맞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조금 답답하다. 나를 경계하기는 쉽지 않다. 더군다나 남에게 어떻게 ‘너를 경계하라!’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파시즘에 대해 좀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것이 인간인가>의 마지막 불록에서 어떤 학생이 레비에게 이렇게 묻는다. 당신의 책에는 독일 사람들에 대한 증오나 원한이나 복수심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이 밉지 않는가? 그것에 대해 레비는 “유령집단을 향해 내가 어떻게 분노를 키우고 복수를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되묻는다. 이러한 레비의 생각은 책 안에서 계속 이어진다. 레비가 수용소에서 만난 사람들, 그들은 분명히 인간이다. 지난 세미나 시간에서도 책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한 많은 공감이 나왔다. 만약 수용소에 들어가게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세미나에서는 그런 상황이 되면 사람은 당연히 무력해진다는 것, 무력해지면서 동시에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게 될 것이라고 얘기를 나누었다. 살아남으려는 힘은 엄청난 것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는 애초 살아갈 수 없다. 그렇지만 사람에게는 살아남으려고 하는 욕망과 다른 욕망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이라든지 누군가에게 양보하려는 마음, 혹은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려고 하는 마음 같은 것들이다. 그런 욕망은 사람이라는 동물의 ‘본성’에는 맞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존엄성이라든지 인간성을 지키려고 하는 행위가 나의 욕망이 아닌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많은 경우 자신을 알고 싶어하고 자신을 이어나가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나는 자신의 정체성이나 존엄성을 가지고 그것을 잘 지켜 나가고 싶다고 종종 생각하는데, 그것 또한 나의 욕망이다. 먹고 살기만이 욕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욕구는 다른 말로는 자신을 배려하고 싶다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이런 욕망은 옛날부터 철학이나 종교를 통해 얘기되어왔고, 인간의 문화의 일부로서 존재해 왔다. 그리고 레비가 있었던 수용소는 바로 그런 인간성이 파괴되는 곳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울타리인 카베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이 아주 연약한 것이며 이 인간성이야말로 우리 생명보다 더 위태롭다는 것을 깨달았다…. 욕설과 구타로부터 일시적으로 멀어진 이곳에서 우리는 우리들 자신 속으로 다시 들어가 생각할 수 있었다…우리는 노예가 되오, 이름 없는 죽음을 맞기 훨씬 전에 먼저 영혼이 죽어, 수백 번 행진하고 말없이 중노동을 했다. 우리는 돌아가지 못하리라. 아무도 여기서 나가선 안 된다. 팔뚝에 새겨진 숫자를 들이대며, 아우슈비츠에서는 인간이 인간으로 하여금 무슨 짓이든 하게 만들수 있다는 불길한 소식을 세상에 전해서는 안 된다.―p81
l 생각2. 인간성과 ‘와리키리’
요즘에 들어 무섭게 느껴지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 ‘일하는 것’이다. 일을 할 때 나는 어떻게 되는가? 돈을 위해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할 때, 어떤 목표를 향해 돌진할 때, 나는 종종 자기의 마음을 하나하나 잘라 버린다. 최근에는 이런 일이 있었다. 문탁에서 일본어를 가르쳐야 하는데 나는 그 날 슬픈 감정이 있었다. 그렇지만 수업은 해야 하고 나의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 가르쳐 주고 있는 아줌마들에게 틀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오히려 평소보다 밝은 척 하면서 수업을 했다. 일이기 때문에 일본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것 자체를 정말로 좋아하는 것처럼. 실은 하기 싫었지만 그것을 인정하지 못해서 밝은 미소를 열심히 지우며 수업을 했다.
일본어에는 이런 상태를 표현하는 말로‘割り切り(와리키리)’라는 단어가 있다. ‘와리키리’란 “어떤 원칙에 따라 단순·명쾌하게 결론을 낸다(from naver)”는 뜻이다. 어떤 행위를 해야 할 때, 그것에 대한 감정이라든지 자신의 마음을 일단 옆에 두고 일시적으로 무시하는 것도 또한 와리키리다. 일을 빨리 잘하려고 할 때 우리는 자주 ‘와리키리’를 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이러한 와리키리를 잘하는 사람을 어른스럽다, 어른이 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와리키리가 일을 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와리키리와 나는 오래 지낸 사이다. 나는 최근까지는 그것을 좋은 것으로 알고 있었고, 와리키리를 잘 함으로서 좋은 결과를 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끔 했었다. 나의 마음 상태는 자꾸 변한다. 또한 정체성이라는 것도 잘 알 수 없는 것이다. 나라는 사람의 연속성과 정체성은 나에게 그름보다도 잡기 힘든 것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불확실한 것보다는 확실하게 나오는 결과가 더 중요하지 않는가. 그래서 마음이 잘 움직이지 않을 때도 자꾸 와리키리를 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데 와리키리를 할 때 내가 하나하나의 부분으로 나눠지는 느낌도 또한 피할 수가 없었다.
레비가 말하는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란 무엇이었을까? 레비가 “유령”이라고 말했던 SS나 가베의 직원들도 일을 하기 위해 생각했던 것은 분명하다. 어쩌면 그들은 정말로 와리키리를 잘하는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이나 존엄성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던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레베는 그들을 ‘유령’이라 부른 것이 아닐까?
l 생각3. 다시 파시즘을 낳는 것은 무엇인가?
인간이 살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 먹을 거리나 마실 거리, 깨끗한 환경이나 휴식등은 살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들이다. 수용소에서는 그런 것들은 모두 박탈되었다. 육체적으로 극한까지 몰려갔던 그 상황을 레비는 생생하게 묘사한다. 그렇지만 또한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포기해야 했던 상황이다. 그래서 수용소에서는 개개인이 정말로 “고독하다”.살아남기 위해 느끼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그리워하는 것도 포기해야만 했던 상황에서는 인간은 더 이상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타자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없다. 레비가 수용소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에 대한 얘기를 읽으면서 알게 되는 것은 것은 이런 것이다. 사람의 인간성은 얼마나 파괴되기 쉽고 약한가. 사람은 결국 자신의 인간성을 믿고 살아가는 가는 생물인데도 말이다. 많은 사람은 자신의 인간성이 파괴되면 더 이상 자신도 타인도 믿을 수 없게 될 것 같다. 레비도 자기 집에서는 수용소에서 행해진 것을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내가 일을 하는 것을 무섭게 느낀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일을 할 때 나는 나라는 한 명의 개인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돈을 위해서 능력과 에너지를 자르고 판다. 수용소와는 정말 다르지만 현재의 삶에서도 자신의 인간성을 지키면서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결국 레비의 기록을 읽고 있으면 파시즘이란 개인이 스스로의 인간성이나 정체성을 포기했을 때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생각하면 처음에 파시즘에 대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의 견해가 나온다. 즉 파시즘은 개인의 능동적인 행위로 인해 생기는 것이라기보다 개인이 자신의 존엄성이나 인간성을 포기했을 때야 성립 가능하고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열광하는 민중들의 모습에서는 능동성보다는 자신에 대한 포기가 느껴진다. 푸코가 자기 내부에 있는 권력을 알아차리고 자기를 배려하는 기술을 알려준 것도 이런 맥락과 닿는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따라서 나에게 남는 문제는 어떻게 하면 자기 스스로를 지켜나갈 수 있는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당당하게 살 수 있는가라는 문제다.
l 마치며 - 관계속의 나를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떨 때 나는 자신의 정체성이나 존엄성을 지키고 싶다고 생각하는가? 돌이켜 보면 나는 혼자서 있을 때보다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친구들의 여러 면을 보고 느낀다. 내가 친구한테 주목하는 것은 얼마나 일을 잘하는가가 아니라 그 사람의 인간성이다. 아마도 그들도 나의 그런 면을 보고 있을 것이다. 사람들하고 같이 있을 때 나는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이 힘들기도 하지만, 그렇게 사람들과 같이 있으려고 할 때 내가 하게 되는 고민은 더 새로운 삶을 생각하게 해 주는 것이기도 한다. 그래서 내 안의 파시즘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는 나의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덧붙이자면 누구보다도 자신의 인간성을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존재는 나와는 이질적인 타자다. 나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타자와의 관계속에서 자기 자신을 찾아가려고 하는 것. 이런 과정이 파시즘을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삶은 천천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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