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NE곰 카프카 파이널 에세이
세 개의 감옥, 갇혀진 욕망 그 너머
카프카의 단편, 욕망의 국카스텐(guckkasten)
“내 잡문에 씌어진 것은 언제나 코이며, 입이며, 털이다. 하지만 그것을 합치면 하나의 형상인 전체로 될 것이다”
루쉰의 잡문처럼 카프카의 단편은 짧지만 강렬한 이미지들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메시지가 아닌 ‘이미지’인 것은, 명확하게 메시지로 표현하기엔 카프카가 보여주는 세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카프카의 단편이 모호한 허상만 담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루쉰이 자신의 잡문에 대해 평했듯, 카프카의 단편들도 각기 떨어져있을 때는 “코이며, 입이며 털”이기에 전체를 파악하기 쉽지 않은 것뿐이다. 물론 가끔씩은 코, 입, 털조차도 구분해내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난해함 속에서도 재미있는 것은 그 단편의 조각들이 국카스텐, 즉 만화경 안의 알갱이처럼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며 다채로운 무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만화경 안을 들여다보듯 카프카의 단편들을 찬찬히 보면 색다른 무늬들을 포착할 수 있다.
몇 번을 흔들어 포착해낸 하나의 코드. 불완전한 알갱이들의 이산과 집합이 만들어낸 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가 바로 ‘욕망’이다. 카프카는 그의 소설에서 끊임없이 ‘욕망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편입의 욕망, 탈주의 욕망, 권력의 욕망. 그의 소설들은 욕망에 대한 각기 다른 단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욕망의 단상 또한 보는 각도에 따라서, 모여든 알갱이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때문에 좀 더 명확한 상을 보기위해 알갱이를 선별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선택 된 카프카의 단편이, 「어느 단식 광대」,「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이다. 욕망의 국카스텐인 두 단편 소설에는 각기 다른 세 개의 감옥이 등장한다. 감옥 속에 갇혀져 있는 무엇. 그것은 바로 욕망이다. 세 욕망은 서로 다른 표현, 소통 방법을 가진 채 창살 안에 ‘갇혀져’ 있다.
광대와 표범, 철창 안에 갇힌 욕망
세 개의 감옥을 흔들어 볼 수 있는 그 각도들은 무엇일까. 욕망은 말 그대로 무엇인가를 바라고, 또 원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욕망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욕망의 대상을 ‘어떻게’ 욕망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런데 ‘무엇’과 ‘어떻게’ 사이에는 선후관계가 없다. 오히려 ‘무엇’은 동시에 ‘어떻게’이며, ‘어떻게’는 그 자체로 ‘무엇’이다. 즉, 욕망은 표현되는 그 방식으로 정의된다. 욕망의 방식이 중요한 만큼 그 욕망과 시대의 관계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대와 욕망이 만나는 지점에서 욕망이 발현되고, 그 방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시대의 욕망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욕망에 큰 영향을 끼친다. 시대와 욕망은 서로가 서로를 얽어매어 욕망의 시대, 시대의 욕망을 만들어낸다.
여기 시대의 욕망을 재현해주는 한 광대가 있다. 광대는 시대의 욕망을 배설, 대리해주는 존재이다. 광대의 유희를 보며 사람들은 자기 안에 갖고 있는 욕망을 배설해내고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단식광대 또한 극한의 단식을 통해 관객들에게 탄성을 자아낸다. 관객들은 자신들은 할 수 없는 단식, 절제의 행위를 극한으로 밀고나가는 광대를 보며 희열을 느낀다. 단식 광대는 철창 안에서 단식이라는 광대놀음으로 시대의 욕망, 시대의 광대가 된다. 그런데 단식광대의 유희가 벌어지는 장소는 다름 아닌 철창 안이다. 감옥 안에 갇혀있는 광대를 사람들은 저 멀리서 신기한 듯 구경 한다. 철창을 경계로 광대는 일반인과는 다른 사람으로 격리되며, 이로 인해 단식행위는 더 대단한 것이 된다. 단식광대, 개인의 단식에 대한 욕망은 감옥이 씌워짐으로써 하나의 표상, 상징이 되어버리고, 그 상태로 사회, 군중에 의해 소비된다.
그런데 시대의 욕망이라는 것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이제 단식에 열광하는 ‘단식을 위한 시대’도 지났다. 절제의 극한을 찬양하는 것은 더 이상 시대의 코드와 맞지 않는다. 욕구를 인내하는 것이 하나의 해방구, 카타르시스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욕구의 무한 증식만이 열광의 대상이 된다. 결국 단식 광대는 시대에 의해 버려져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감옥 안에서 홀로 굻어죽은 채 말이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단식의 끝을 보았으니 죽기 전 단식광대는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단식 광대의 생명이 끊어진 그 철창 안으로 새로운 욕망, 새끼 표범이 넣어진다. 표범은 자신이 철창 안에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생명력이 넘쳐 보인다. 그 무엇도 먹지 않았던 단식광대와 달리, 새끼 표범은 철창 우리 안에서 마음껏 고기를 물어뜯는다. 표범은 시대가 원하는 욕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상이다. 사람들은 이 새로운 ‘욕망 덩어리’가 보여주는 욕망의 그르렁거림에 열광하며, 표범 우리 앞을 떠날 줄 모른다. 그러나 사실 관중이 열망하는 것은 표범의 생명력이 아니라 철창 안에 가두어진 야생의 욕망이다. 표범 우리의 철문이 열리면, 그 누구도 표범에 열광하지 못할 것이다. 공포에 질려 도망가기 바쁠 것이다. 단식광대의 철창처럼 표범의 감옥 또한 그를 군중과 격리시키고 하나의 ‘소비되는 욕망’으로 박제화 시킨다. 표범도 언제 단식 광대처럼 버려질지 모르는 운명이다. 결국 단식광대도, 표범도 박제된 광대, 욕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감옥 밖으로 나온 원숭이, 인간세계 안에 스스로를 가두다
이번에는 앞의 두 존재들과 달리 감옥에서 벗어나 출구를 찾은 한 수인(囚人)이 있다. 그는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감옥의 문을 열었으며, 스스로 만족할 만한 지위를 얻었다. 자유로운 그, 그는 다름 아닌 원숭이이다. 원숭이는 말한다. “저는 자유를 원치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의 출구만을 원했습니다. 그 출구가 하나의 착각일지라도 말입니다.” 감옥에 갇힌 원숭이는 ‘출구’를 욕망했고 출구를 위해 원숭이이길 포기했다. 말하자면, 이 원숭이는 출구를 ‘학습한’ 셈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다른 길은 없었다고 말한다. 인간을 모방하고 인간세계로 편입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길이자 욕망인 것이다. 그는 악수를 배우고, 술을 마시고, 담배피우며, 심지어 인간의 언어로 말을 한다. 그래서 결국 그는 그가 원하던 대로 유럽인의 ‘평균 교양’에 도달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원숭이는 참 당돌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원숭이는 이러한 반응을 예측하기라도 했던 듯이, 자신의 노력에 대한 평가절하는 사양한다고 말한다. 다른 인간의 판단은 원치 않는다며 말이다. 원숭이 말대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했으며, 그만한 대가를 얻었다. 이것에 만족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착각일지도 모르는 자유지만 나는 행복하다, 만족한다. 원숭이는 그를 가두고 있던 작은 감옥 속에서 벗어나는 훌륭하게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는 작은 철창 보다 훨씬 거대하여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세계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꼴이 된다. 원숭이도 결국 단식광대나 표범처럼 갇힌 존재이다. 인간세계로 편입되고 싶은 욕망, 그것은 원숭이에게는 생존의 열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욕망을 모방한다. 인간세계의 욕망에 자신의 모든 욕망을 동일화 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모방이 그에게는 또 다른 하나의 ‘감옥’이다. 물론 그는 보이지 않는 감옥 속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그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사회의 욕망을 모방해야한다. 새로운 와인이 나오면, 그 와인의 이름을 외워야하고, 다른 유행이 오면 또 그 유행에 맞춰가기 급급해야한다. 이런 것들을 족쇄가 아닌 축복으로 여긴다면야 더 이상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개의 감옥들. 감옥에 갇힌 것이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혹은 그 안에서 행복하든 불행하든 간에 결국에는 ‘감옥’이다. 그 공간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동일한 속성을 지닌 곳이라는 얘기다. 단식광대와 표범의 욕망이 발현되는 지점은 판이하지만 갇힌 욕망이라는 동일한 성격을 지니듯, 원숭이의 자유로운(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 세계도 똑같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사람들에게 그는 특이한 원숭이, 구경거리의 대상일 뿐이다. 이렇듯 감옥, 철창은 욕망의 주체들을 소외시키고 한낱 ‘대상’으로 격하시킨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욕망을 소외시키는 주체, 시대와 사회를 언급할 수밖에 없어진다.
욕망과 시대라는 허상, 상상력의 곡선
시대는 욕망을 지배하고, 욕망은 또한 그 시대를 지배한다. 각 시대, 사회 마다 내세우는 특정한 가치들이 있다. 중세의 신, 조선시대의 유교 논리 등, 이러한 가치들은 그 시대 사람들의 욕망에 하나의 틀이 되어준다. 사람들은 그 틀을 따라 자신들의 욕망을 배출해낸다. 그런데 이 배출은 사실 진정한 욕망의 배설이라고 할 수 없다. 앞서 말했듯 배설되는 것은 각 개인들의 욕망이 아니다. 자신들의 욕망이라고 믿고 있지만, 단지 시대와 사회가 정해준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주체는 소외되고 그 자리에 욕망만 남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실 시대의 욕망이라는 것도 허상에 불구하다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욕망의 종류는 달라지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인간의 <정당해>와, 가진 건 돈뿐이야 하는 인간의 <에헴>과, 어때 나 이쁘지 하는 인간의 <흥>은 시간만 다를 뿐 같은 성질의 관념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현실’의 가치 관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욕망의 본질은 같다. 시대는 욕망의 종류를 정의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노선을 강요 한다. 그 노선은 어쩌면 시대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욕망의 본질을 구성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시 한 번 욕망의 탄생과 맞닿아 있다. 한 사회의 주류적 욕망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사회, 경제, 문화적인 다양한 요인이 관여한다. 그러나 어떠한 시대적 욕망이 탄생하던 간에 이 욕망이 굴러가는 힘은 간단하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바로 끊임없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것’. 단순화시키기에는 뭐하지만, 자신보다 좀 더 나은 존재를 부러워하고, 그만큼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사실 여기에서 ‘좀 더 나은 존재’라는 것도 단지 시대의 욕망에 조금 더 충실한 사람을 의미할 뿐이다.) 이것이 시대의 욕망을 작동시키는 원리이다. 이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계속되는 한 시대의 욕망은 그 커진 힘으로 자신과 배치되는 욕망들을 삼켜버린다. 이쯤 되면 “1년에 한 번씩 예수가 온다 한들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 정도의 궁상스러움과 회의가 밀려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역사의 반복과 순환처럼, 시대의 욕망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불쌍한 존재의 한계일까?
사실 허상을 깨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것이 허상임을 깨닫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그 허상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시대의 욕망에서 한 발짝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시대의 욕망이 허상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상상력. 당대의 욕망이 아닌 ‘그 너머’의 욕망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그래서 사실 갇혀있다는 것은, 욕망하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 자체가 금지되는 것, 새로운 것이 있다는,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상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차원에 있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이 진정으로 감옥이며, 보이지 않는 창살이다. 그러나 이렇듯 당대의 상상력이 아닌, 자신만의 상상력을 갖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시대의 욕망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허우적거리며 불행해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어제보다 한 번 더 자위하는 세상”, 수인(囚人)의 자격
“기적이 그런 거라면, 하고 내가 말했다. 왜 이렇듯 다들 불행한 거죠? 그게 인간이야, 하며 요한은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팡이로 바다를 갈라 보여준다 한들 내일 아침이면 또 다른 기적을 원하는 게 인간이지. 끝없이 자위를 해야 하고 끝없이 손을 씻어야 하는 게 인간이야. 그리고 또, 자위를 너무 하면 몸에 해롭지 않나요 걱정하는 게 인간이지. 그러고 돌아서면 자위도 안하는 척, 하는 게 인간이야. 휴지는 휴지대로 진창 써놓고 뭐야 휴지가 떨어졌잖아, 하는 게 인간이라구.”
저는 기적을 믿어요. 티 없이 맑은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저 어색한 미소로 작게 끄덕여줄 수밖에. 그렇다고 인간이란 원래 그런 거야,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이런 말에 완전히 동의할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긍정과 체념 사이를 곁눈질 하다가 어정쩡하게 경계선에 서있다. 그러기에 소설 속 원숭이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감히’ 감옥에 있는 것을 쉽게 조롱할 수는 없다. 또한 난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감옥에서 벗어나자고 말할 자신도 없다. 비난할 자격이 있는 자, 수인(囚人)이 아닌 자 그 누구일까. 우리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어떠한 방식과 형식으로든 ‘욕망이라는 감옥’의 죄수라는 것이다. 카프카가 감옥의 이미지를 반복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족쇄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카프카는 앞서 말했듯 국카스텐이다. 만화경은 자신이 보여준 현란한 무늬에 대해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단지 그가 보여주는 모양들이 그의 메시지이다.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각자가 조각들을 해석해보고, 그 모양에 이름붙일 뿐이다.
이름붙이는 행위에 그 어떠한 ‘자격’이 필요한가. 굳이 말하자면 그 자격을 ‘수인(囚人)의 자격’이라고, 그러니 우리, 죄수들은 충분한 조건이 된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또한 죄수로서 자신이 갇혀있는 감옥에 대해 기꺼이 궁시렁거리는 것이 권리이자 의무라고도 해두고 싶다. 그것이 무기력감이든 상상력의 곡선이든, 그러나 죄수라는 한계가 있기에 너머가 있는 것이고, 너머가 있기에 또한 한계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철창 ‘너머’를 보는 것은 죄수의 본능이다. 본능은 긍정과 체념, 어떤 판단보다도 우선에 있는 것이다. 그 본능을 “어제보다 한 번 더 자위하는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 발휘할지는 각자의 욕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