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루쉰2010. 8. 5. 11:45

  무릇 우매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멀쩡하고 건강하더라도 하잘것없는 본보기의 재료나 관객이 될 수 밖에 없으며, 병으로 죽는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불행하다고 여길 것도 없다는 것이다. 우리들의 첫 번째 중요한 일은 그들의 정신을 고치는 데 있다. 당시 나는 정신을 고치는 데 있어 최선으로 당연히 문예를 들어야 한다고 여겼다.

  루쉰은 그의 첫번째 소설집 『납함』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납함』에는 그가 말하는 '우매한 국민'에 대한 소설이 여럿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도 루쉰의 이러한 태도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라면 아마도 「풍파」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풍파」는 신해 혁명 직후의 어느 작은 마을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뱃사공 칠근은 혁명의 바람을 따라 변발을 과감히 잘라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황제가 복위한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이미 변발을 잘라버린 칠근은 불안감에 휩싸인다. 더구나 마을 근방 최고의 식자인 자오치도 변발이 없으면 큰 화를 당할거라며 으름장을 놓자 칠근과 그의 가족들은 절망에 빠진다. 그러나 다음 날이 되자 황제의 등극 소문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다. 마을 사람들은 그저 황제가 등극하지 않았나보다 생각하고 다시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이 소설은 무엇을 얘기하고 있는걸까? 여기에서의 '우매한 국민'이라면 단연 칠근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이다. 그들은 바깥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 아예 무관심하지는 않다. 하지만 어설프게 아는 것이 오히려 더욱 독이 된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칠근은 천천히 고개를 들고 한숨을 푹 내쉬면서 말하기를
 
"황제께서 등극하셨대"라고 했다.
  칠근의 처가 잠시 멍청히 있더니, 갑자기 크게 깨닫기라도 한 듯이 말했다.
  "참 잘됐네요. 그러면 또 대사령(大赦令)이 내리지 않겠어요!"
  칠근은 또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변발이 없잖아."
  "황제께서 변발이 있어야 한대요?"
  "황제께서는 변발을 요구하거든."
  "당신 어떻게 알아요?"
  칠근의 처는 조급해져서 다그쳐 물었다.
  "함형주점 사람들이 모두 있어야 한댔어."
  칠근의 처는 이때 직감적으로 사태가 별로 좋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왜냐하면 함형주점이라면 소식이 정통한 곳이기 때문이었다. 

  일단 작품을 모두 읽고 나면 황제의 등극이 실제로 고려되기는 했던 일인지 의심이 든다. 만일 실제로 등극한다 하더라도 반드시 대사령이 내려지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들은 변발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왜 그래야 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함형주점에서 들려오는 소식이라면, 학식이 있는 자오치 어른의 말이라면, 책에 쓰여져 있다고 하면 모두 맞는 말인줄만 안다. 이런 관계는 상당히 위험하다. 어느 한쪽의 견해나 잘못된 정보 따위를 틀림없는 사실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러한 지식적 권력에 대항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루쉰의 말처럼 문예로 그들의 정신을 고쳐주어야 할까?

이것은 말하자면 일종의 '계몽'이다. 계몽이라면 지식인으로서 응당 행해야할 역할이지만 '정신을 고쳐주겠다'는 식의 접근 방법은 곤란하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위에서 아래로' 가르치는 수직적 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이 마을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일깨워 준다고 한다면 그건 그들이 '주체적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어야 한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지식이란 정세를 아는 것, 즉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가를 똑바로 아는 일이다. 그러나 물론 이들이 그걸 제대로 알고 싶지가 않아서 모르는 것은 아니다. 생활 환경 자체가 세상사를 파악하기에 어렵기 때문이다. TV도, 인터넷도 없던 시절에 이 구석진 시골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이 무슨 수로 나랏일을 알겠는가? 그러다보니 기껏해야 함형주점에서 근거 없는 소문을 주워듣는 수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떤가? TV도, 인터넷도 있는 지금에는 우리가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하면서 살고 있는가? 자신있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있는 나랏일들도 어쨌거나 언론을 한 번 거쳐서 나온 정보다. 게다가 서로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이나 전하는 말이 다르니 우리가 언론을 통해 정세를 객관적으로 본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어쩌면 우리들이나 「풍파」에 나오는 마을 사람들이나 크게 다른 처지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지 소설 속 인물들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지식적 권력에 대항하여 싸울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내가 여기에서 그 모든 방법을 거론할 수는 없다. 물론 알지도 못한다. 다만 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가지 방법을 말할 것인데, 그건 자신의 의견과 타인의 의견을 확실하게 구분하는 일이다.「풍파」의 내용으로 이야기하자면 그것이 칠근 자신의 생각인지, 아니면 함형주점 사람들의 생각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또 책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책에서 읽은 얘기라고 무조건 자신의 의견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먼저 사람들이, 혹은 책이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나면 자신이 그 의견에 동의하는지, 아니면 다른 의견이 있는지 그 입장이 확실히 서게 된다.「풍파」의 인물들이 못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그들은 변발이라는게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리고서 변발을 자르느냐 보존하느냐를 곧 자신들의 입장으로 삼으니(자오치라는 인물도 포함하여) 껍데기 밖에 없는 지식이 통념으로 자리잡게 된다.

  우리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정말 나의 의견일까? 아니면 어디에서 들은 얘기를 나의 의견으로 삼은걸까? 만약 후자라면, 그러한 의견은 어떤 생각에서 나온 의견일까? 그리고 나는 그 생각에 동의하는가? 이러한 질문이 있고 나서야 우리는 비로소 '지식'이라고 할만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특정한 매체가 가진 지식적 권력을 자연스럽게 분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카프카2010. 8. 5. 11:00
 

<2ne곰-카프카 파이널 에세이>


'가족'이라는 이름의 표상을 뒤집는 카프카

- '변신'을 통해 살펴본 가족의 모습 -


 명혜원


 가족이란 이름의 표상
 

페르난도 보테로 作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가족간의 관계는 다른 어떠한 관계보다 앞서 중요하게 여겨진다는 말이다. 우리는 흔히 TV광고나 드라마 소설책에서 가족의 표상을 만나게 된다. 가족하면 떠오르는 것은 투닥투닥 다투기는 하나 서로를 아끼며 위해 주는 마음은 의심할 수 없고, 가족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 아름답고도 당연한 미덕인 이미지이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역할, 어머니는 어머니의 역할, 자식은 자식의 역할을 담당하며 서로가 맡은 역할을 충실히 해나간다. 우리가 접하게 되는 대부분의 드라마나 소설속 가족의 이야기는 이러한 가족의 이미지와 조금이라도 어긋나게 되면 발생한다. 자식이 자식의 역할을 하지 않을 때, 아버지가 아버지의 역할을 하지 못할 때, 가족의 단합을 위한 개개인의 희생 없이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게 되었을 때 등이 그러하다. 하지만 결국 대부분의 드라마는 가족의 갈등을 지나 서로를 위해주는 진심을 알고 행복하게 막을 내리게 된다. 24년을 살면서 항상 교육받고 주입되어진 가족의 모습은 이러한 터라 나에게도 가족의 이미지는 배려가 중시되는 애정의 관계였다. 가족은 동등하고 평등한 위치로 자신의 역할을 완수 할 때만이 행복해 질 수 있다는 생각. 이것이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표상 속 가족의 모습이라면 우리가 보지 않으려고 외면했던 가족의 이면을 카프카는 어떻게 그려내고 있을까?


 경제적 상황에 따른 가족의 변화

 그레고르 짐자의 가족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던 그가 벌레로 변해 버린 후 다양한 변화를 한다.


'그러면 여동생이 돈벌이를 해야 할까? 그 애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밖에 안 된 어린애로 지금까지 즐겨하던 생활 방식이란 옷이나 잘입고, 늦잠 자고, 집안일을 도와주고, 몇 가지 간단한 유흥에나 끼고 바이올린을 켠다든지 하는 일이었다.' (136p)


그레고르 짐자의 여동생, 그레테의 모습은 요즘 학생들의 모습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부모님의 보호아래 학교공부, 친구들과의 간단한 유흥, 취미생활 등을 하게 된다. 17곱살이면 보호받아야 하고 생계를 위한 일을 해야 하기엔 너무 어려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우리의 대부분에 생각이다.

페르난도 보테로 作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도 이러한 의식이 드러나 있다. 그런데 그가 생각했던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아이라고 생각했던 그레테는 오빠가 벌레로 변해버리고 난 후 많은 변화를 하게 된다. 처음 벌레로 변한 오빠를 발견한 후 울기만 했던 그레테. 그 후 부모님을 대신해 오빠를 돌보는 일을 자연스럽게 담당하게 된 그녀는 오빠를 돌보는 일에 대해서는 자신만이 할 수 있고, 가장 잘 알고 있다는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자신만이 할 수 있다고 믿는 이일에 누군가 개입을 하려 하면 그녀는 경계를 하며 거부하는 모습까지 보인다. 의존적이며 울기만 하던 그녀가 가족의 누구보다 잘 알고 가족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생겨서인지 점점 활기를 띈 성격이 되어간다. 이뿐만이 아니다.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17살 어린 소녀가 이제는 판매원으로 취직해 일을 하고 보수를 받는다. 거기에 더 나은 직장을 위해 밤마다 공부하게까지 된 것이다.

 감성적이고 감정적으로 상황을 마주하던 그레테는 사라지고 없다. 벌레가 된 오빠를 보며 안타까움과 슬픔, 애정을 주던 그레테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생기고 가족경제에 보탬이 되는 일을 시작함과 동시에 벌레를 오빠로 생각하는 것, 그 벌레에 가족이 메여있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다는 말을 하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 되어있었다.

 가족이란 안전한 울타리와 그속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가던, 나약했던 그레테가 자신의 삶을 살기위해 일하면서 강해지는 모습을 보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사람들이 종종 나에게 하는 '넌 고생을 해봐야 단단해 질 수 있어'라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생계를 위해 일을 하게 되면 힘은 들지만 사람이 단단해질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의견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다는 것. 가족들간의 관계에서도 더 이상 보호받기위한 어리광을 부리지 않게 된다는 것을 그레테가 보여준 모습을 통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



그의 아버지 또한 많은 변화를 하는 인물 중 한명이다.


' 실생활비는 벌어야만 했다. 아버지는 아직 건강하긴 하지만 나이가 들었고, 벌써 오 년째 일을 하지 못하고 있으니 아무튼 아버지에게서 너무 많은 부담을 바랄 수는 없었다. 어려운 실패의 삶을 보내다가 처음으로 휴식하게 된 지난 오 년 동안에 아버지는 살이 많이 쪄서 둔해지셨다.'(136p)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하기전 기억하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다.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기에 자신이 돌보고 부양해야 한다고만 믿었던 아버지. 가족들간의 관계에서도 그다지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고 보기 어려웠던 아버지는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해 자신이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을 느껴서인지 점점 변하기 시작한다.


' 실은 그는 변화된 상황에 대응할 준비를 했어야 했다. 그렇더라도, 그렇더라도 저 사람이 아버지일까? 전에 그레고르가 업무 여행에 나간 때면 피곤에 지쳐서 침대에 죽은 듯이 누워 있었던 바로 그 사람일까? 저녁에 귀가할 때면 잠옷 바람으로 안락 의자에 앉아 나를 맞아주던 사람,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해서 반갑다는 표시로 손만 쳐들던 사람, 일 년에 두세 번 일요일 또는 큰 명절에 드물게도 함께 산책을 갈 때면 워낙 느리게 걷는 그레고르와 어머니 사이에 서서 낡은 외투를 몸에 두른 채 언제나 조심조심 지팡이를 내디디며 더욱 천천히 가던 사람, 무슨 말을 할 때면 거의 언제나 발걸음을 멈추고 옆에 가는 사람들을 자기한테로 불러모으던 그 사람일까? 그런데 이제 그 사람이 꼿꼿하게 서 있으면서 은행 급사처럼 금단추가 달린 푸른 제복을 입고, 상의의 높고 빳빳한 칼라 위에는 억센 이중 덕이 나와 있고, 숱이 많은 눈썹 아래에는 검은 눈이 생생하고 날카로운 시선을 보내고 있지 않은가?(147p)'


 

페르난도 보테로 作

 그레고르의 기억속 아버지의 모습은 도저히 자신을 대신해 일할 수 있는 분이 아니었다. 그레고르는 아버지가 아무 일도 할 수 없어 자신이 아버지를 부양해야만 하면 그는 자신이 벌어준 돈에 의해 노년을 편안하게 보내시는 것이 그의 행복이며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했을 때 경제적 상황을 책임져야하는 아버지의 상황을 좋아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는 일을 시작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면서 생기를 찾았다. 심지어는 집에서도 회사 제복을 벗기 싫어하는 것, 마치 항상 일을 할 태세로 제복을 입고 잠자리에 드는 것 등을 보면 자신의 상황을 행복해하는 것 같아 보인다.

 가족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도 매우 극진하다. 굳이 부축을 거부하는 아버지를 침실까지 양모녀가 팔짱을 끼고 부축해가는 모습이며, 아버지의 쇼파에 계속 앉아 있겠다는 고집을 달래는 어머니의 태도는 매우 인상적이다. 어버지는 이런 상황을 즐기는듯하게 묘사되는데 여동생과 어머니의 아버지를 위하는 공손한 태도가 그를 '이게 인생이군, 이게 내 말년의 휴식이구먼'이라는 말까지 하게 만든다.

 몸이 편안한 것보다 가족에게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이를 인정받았을 때 더 행복해하며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우리시대 아버지들의 이미지와 겹쳐졌다. 가족을 위해 일을 하고 그로인해 가족들에게 자신의 권의를 인정받고 큰 힘을 행사할 수 있는 아버지들의 모습이. 그레고르에게 가족의 생계를 맡기고 있을 당시 기운없어 보이던 노인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든 그의 당당함이 가족관계에서 경제적 역할이 한사람에게 미치는 경제적 요인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알 수 있다.



' 세상이 가난한 사함들에게 시키는 온갖 일을 식구들은 최대한으로 해냈다. 아버지는 말단 행원들에게 아침 식사를 날라다 주었으며, 어머니는 모르는 사람들의 내의를 만드느라 헌신했고, 여동생은 고객의 명령에 따라 판매대 뒤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식구들의 힘으로는 더 이상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151p)

 

 그레고르 짐자의 가족들은 경제적 버팀목인 그가 사라지자 역설적이게도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가족을 위해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경제적으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을 자신감 넘치고 자기주장을 확실히 하게끔 만들어준 것이다.

 이와 동시에 경제적인 힘이 생긴 아버지의 모습 변화는 우리에게 더욱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경제적인면이 가족관계에서도 권력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그중 한가지이다. 이는 현대 사회속 대부분의 가정에서도 아버지가 가장 큰 힘을 가지는 이유는 가족의 경제적인 부분을 담당하고 있어서라고 연결지어볼 수 있다. 가족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때 가족의 행복이 유지된다는 말은 어쩌면 가족 속 권력관계를 깨지 않을 때에야 비로소 행복이 지켜 질 수 있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사랑과 믿음이 우리가 그리는 가족의 표상이었다면, 그속에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지만 표상에 가려져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경제측면에 따른 권력관계가 작동하고 있었다. 카프카는 경제적 상황 변화에 따른 가족구성원의 변화를 통해 우리에게 사랑과 배려, 희생이라는 가족의 표상속 다른 이면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


페르난도 보테로 作

 물론 가족이라는 표상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가족은 우리가 그리는 이미지처럼 서로를 아껴주고 위해주는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와 더불어 가족도 작은 사회이기에 권력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권력관계에 휘둘려 나약해지지 않기 위해선 경제적인 독립이 가능해야만 가능하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가족간의 진정한 배려와 사랑이 존재하기 위해선 경제적 독립이 우선시되어야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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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루쉰2010. 8. 3. 23:35

2NE곰 10.7.17 루쉰 『납함』

“그게 그것”, 냉소와 찌찔함 사이


“그게 그것”, 어떻게 세상이 변하니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며 변화시킬 수 있다. 아니다, 바꾸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쉽게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것이 있다. 소설 단오절의 주인공 팡쉬엔춰는 “그게 그것”이라는 말로 양쪽 의견에 대한 확답을 교묘하게 피해간다. 세상은 변하지만 실제로 달라지는 것은 크게 없으며, 다 같고 그게 그것이다. 평범해 보이는 생각이지만, 이러한 틀로 세상을 보면 모든 현상이 쉽게 이해가 된다. 이해를 넘어서 넓은 아량까지 생긴다. 옛 투사들의 변절을 보고, 어제의 청년이 오늘의 어른이 되듯이, 당연한 듯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으며, 부당한 행동을 보고도 내가 만약 그 상황이었다면 ‘역지사지(易地思之)’해보고 그럴 수도 있으리라 넘어간다. 팡쉬엔춰는 그가 마주하는 상황마다 “그게 그것”이라는 한마디로 가볍게 비껴간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대적해야할 ‘적’이 없다. 사람, 인간이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기에, 악도 적도 없는 것이다.
  그게 그것이기에 격변하는 사회에서도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세상 돌아가는 것을 고고하게 관조하고 있다. 그에게는 인간의 사상이나 행동도 크게 중요하지 않다. 팡쉬엔춰의 태도는 한마디로, ‘냉소’이다. 체념이라고 하기에는 그의 태도가 그 스스로에게 너무나 큰 편안함을 준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박혀있는 이 한마디에 위안을 받는다. 팡쉬엔춰의 처세는 찌질하나, 사실 그의 말이 틀린 것만은 아니다. 사회가 변화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변발이 짧은 머리로 바뀌는 것? 그것도 변화임에는 틀림없지만, 사회의 겉모습이 바뀐다고 해서 그 사회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겉모습이 바뀌는 것도 쉽지 않지만, 소위 인간의 한계라고 부를 수 있는, 사회를 이루는 인간들이 가지는 본능적인, 본질적인 것은 늘 쉽게 부숴지지 않는 ‘철방’과 같은 존재로 남아 있다. 인간에게 그래서 변혁은 그리 쉽게 이루어 지지 않는다. “역사는 반복된다.” 거창하게 역사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팡쉬엔춰가 보기에도 사회 속 인간들의 모습은 모두 비슷하다. 학생들이 욕하는 관료는 그 이전에 학생이었다. 역할과 자리는 그대로고 사람만 바뀔 뿐이다. 사실 냉소적인 팡쉬엔춰가 아니더라도,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그게 그것”이 꼭 과장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참을 수 없는 그 찌질리즘

 
다 그게 그거다, 라는 무심한 말이 어떻게든 사회가 변화할 것이라고 믿는, 믿어야하는 투사들에게는 그들을 적막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한마디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도 쉽게 이러한 변화에 대한 체념과 냉소를 부정할 수는 없다. 사실 그들 자신도 무언가 변하리라 확신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팡쉬엔춰의 비판 아닌 비판이 설득력이 있을 정도로 그들이 마주한 시대상황은 암울했다. 그렇기에 소설 속에서 팡쉬엔춰의 생각을 서술하는 루쉰은 이에 대한 어떠한 평가나 비판을 하지 않는다. 루쉰 자신도 ‘철방’이 깰 수 있을까 고민하는 판이니 말이다. “산다는 게 그런 거지”라고 말하는 팡쉬엔춰에게 그렇게 쉽게 “닥쳐”라고 하지 않는다. “그게 그거”라는 이 무심한 사람의 명연설을 소설의 앞부분에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뒷부분으로 갈수록 드러나는 팡쉬엔춰의 궁상스러움이다. 결국 그가 보여주는 사회에 대한 냉소적인 태도는 나태함 이외에 다른 말을 덧붙이기 어렵다. 사회에 대한 어떠한 비판의식 없이 한마디로 귀찮아서, 특별히 무언가에 반대하는 행위 없이 편안히 먹고 살 정도의 돈만 있으면 그만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저 찌질해서 이중적이라고도 할 수 없는 팡쉬엔춰의 삶이야말로 ‘에게 그거’이다.


  에게 그거, 찌질한 삶. 어느 시대에나 찌질한 삶은 있을 수 있으며 단지 그 찌질함의 표현이 달라질 뿐이다. 어떤 이는 찌질함의 정의를 ‘보는 순간 때려주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 것’이라 했다. 팡쉬엔춰가 말하는 것처럼 ‘그게 그거’인 시대를 살아가는 자, 그의 찌질함은 어느 순간에서 ‘구타유발자’인가? 그의 일상을 살펴보면 그 찌질함의 속내가 보인다. 그의 찌질함의 원천인 ‘그게 그거’ 요법은 일상 속에서 점점 우스꽝스럽고 한심한 모습으로 뒤틀려간다. 그는 외부세계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냉소적인 시선으로 본다. 이러한 냉소는 얼핏 보면 심지어 지식인스러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이 팡쉬엔춰 자신의 삶, 일상으로 들어오면 이야기가 또 달라진다. 즉, 팡쉬엔춰가 말하는 ‘그게 그거’의 고상함에 대한 변명의 여지가 점점 줄어든다.
  "“보라구. 그래도 교원들이 급료를 요구하는 걸 천박한 짓이라고 할 수 있겠소. 그런 놈들은 사람이 밥을 먹어야 하고, 밥은 쌀로 지어야 하고, 쌀은 돈으로 사야 한다는 이런 아주 기본적인 일조차도 모르는......” “맞아요. 돈도 없이 어떻게 쌀을 사며, 쌀도 없이 어떻게 밥을 끓여 먹는담......” 그의 두 볼이 부어올랐다. 부인의 대답이 바로 자기의 의견과 ‘그게 그것’이어서 남의 말에 부화뇌동하는 꼴이 된 것 같아 화가 난 것이다.(「단오절」 p.185)"
  아내의 말로 그가 비난하던 교원들이나 자신이 결국 “그게 그것”이라는 것이 드러났을 때, 그의 두 불은 부어오른다. 화가 나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의 이론대로라면, 그는 ‘쿨하게’ 교원들과 그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교원들이나 팡쉬엔춰 자신이나 당연히 ‘그게 그거’인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실 그의 찌질함은 지극히 감정적인 자기 방어, 합리화이다. 사실 그 이면은 그가 가지고 있는 자존심, 감정의 문제인 것이다. 그의 찌질함, 순전히 ‘그게 그거’는 어쩌면 지식인의 ‘정신 승리법’이기도 하다.

결론은 버킹검[각주:1], 태도의 문제

 
그런데 변명의 여지도, 옹호할 부분도 그다지 많지 않은 팡쉬엔춰라는 인간상을 비웃게 되면서도, 왠지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진다. 앞서 말했듯 작가는 팡쉬엔춰에 대해서 직접적인 평가를 내리는 대신 그저 보여준다. 이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아는 고품격 궁상스러움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팡쉬엔춰 식 궁상스러움이 그 시대 지식인들이 알게 모르게 갖고 있던 의식의 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변혁을 소리 높여 이야기 하지만, 사실 그들 자신들의 모습부터도 바꿀 수 있는 것인지. 세상, 인간에 대한 회의와 절망은 말끔하게 걷어내기 쉽지 않다. 지식인이라는 자존심, 그 때문에 오는 궁상스러움에 대한 방어기제가 팡쉬엔춰와 같은 ‘정신승리법’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게 그것”이라는 틀 안에 자신을 가두고, 스스로를 사회와 격리시켜 버린다. 갇혀있지만 오히려 마음이 편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나름의 ‘승리’이든 간에 적어도 우리는 팡쉬웬춰가 찌질하다는 것을 안다. 변화에 대해서, 쉽게 그 가능성과 희망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 사실을 아는 것과 일상 또한 “그게 그것”인 것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것 또한 알고 있다.
  세상의 틀을 깰 수 있을까? 앞으로 한 발자국 내딛을 수 있을까? 이 소설 속에서 루쉰은 절실하지만 진부한, 누구도 확신하여 대답할 수 없는 문제에 대답하려 애쓰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결론은 버킹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태도이다. 아니, 태도일 수밖에 없다. 세상이 변한다고 믿든,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고 믿든 간에 말이다. 자신에게 이미 운명이 정해져있든, 정해져있지 않든 간에 결국 오늘 하루를 눈뜨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진정 ‘운명’이다. 변화를 희망하는 이들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희망은 가능성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우리가 희망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들은 대단한 것이 아니라 소박한 의지와 의도이다. 그 소박함도 없이는 하루를 살아가기가 어려운 시대가 바로 루쉰이 살아갔던 시대였을 것이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것, 어쩔 수 없는 것에 대한 절망은 일단 접어둔 듯하다. 대신 루쉰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거창한 혁명도 투쟁도 아닌 오늘하루를 살아갈 의지, 태도이다. 물론 그 태도가 최소한 ‘에게 이거’는 아닐 뿐이다.


  1. "결론은 버킹검"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정말로) 의류 CF광고 멘트입니다. 필자는 한 소설에서 이 구절을 매우 인상깊게보고 에세이에 인용했으나, 안타깝게도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실제 있는 광고냐,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등등 많은 이들의 논란을 잠재우고자 버킹검 CF 주소를 올립니다. mms://media.adic.co.kr/tv/wmv300/200004/V6A01051.wmv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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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카프카2010. 8. 3. 18:20

2NE곰 카프카 파이널 에세이

세 개의 감옥, 갇혀진 욕망 그 너머


카프카의 단편, 욕망의 국카스텐(guckkasten)

“내 잡문에 씌어진 것은 언제나 코이며, 입이며, 털이다. 하지만 그것을 합치면 하나의 형상인 전체로 될 것이다”[각주:1]
  루쉰의 잡문처럼 카프카의 단편은 짧지만 강렬한 이미지들을 담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메시지가 아닌 ‘이미지’인 것은, 명확하게 메시지로 표현하기엔 카프카가 보여주는 세계가 모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카프카의 단편이 모호한 허상만 담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루쉰이 자신의 잡문에 대해 평했듯, 카프카의 단편들도 각기 떨어져있을 때는 “코이며, 입이며 털”이기에 전체를 파악하기 쉽지 않은 것뿐이다. 물론 가끔씩은 코, 입, 털조차도 구분해내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말이다. 이러한 난해함 속에서도 재미있는 것은 그 단편의 조각들이 국카스텐, 즉 만화경 안의 알갱이처럼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하며 다채로운 무늬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만화경 안을 들여다보듯 카프카의 단편들을 찬찬히 보면 색다른 무늬들을 포착할 수 있다.  
  몇 번을 흔들어 포착해낸 하나의 코드. 불완전한 알갱이들의 이산과 집합이 만들어낸 많은 경우의 수 중 하나가 바로 ‘욕망’이다. 카프카는 그의 소설에서 끊임없이 ‘욕망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편입의 욕망, 탈주의 욕망, 권력의 욕망. 그의 소설들은 욕망에 대한 각기 다른 단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욕망의 단상 또한 보는 각도에 따라서, 모여든 알갱이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때문에 좀 더 명확한 상을 보기위해 알갱이를 선별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선택 된 카프카의 단편이, 「어느 단식 광대」,「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이다. 욕망의 국카스텐인 두 단편 소설에는 각기 다른 세 개의 감옥이 등장한다. 감옥 속에 갇혀져 있는 무엇. 그것은 바로 욕망이다. 세 욕망은 서로 다른 표현, 소통 방법을 가진 채 창살 안에 ‘갇혀져’ 있다.

광대와 표범, 철창 안에 갇힌 욕망


  세 개의 감옥을 흔들어 볼 수 있는 그 각도들은 무엇일까. 욕망은 말 그대로 무엇인가를 바라고, 또 원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 욕망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런 다음에 욕망의 대상을 ‘어떻게’ 욕망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런데 ‘무엇’과 ‘어떻게’ 사이에는 선후관계가 없다. 오히려 ‘무엇’은 동시에 ‘어떻게’이며, ‘어떻게’는 그 자체로 ‘무엇’이다. 즉, 욕망은 표현되는 그 방식으로 정의된다. 욕망의 방식이 중요한 만큼 그 욕망과 시대의 관계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대와 욕망이 만나는 지점에서 욕망이 발현되고, 그 방식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시대의 욕망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욕망에 큰 영향을 끼친다. 시대와 욕망은 서로가 서로를 얽어매어 욕망의 시대, 시대의 욕망을 만들어낸다.
  여기 시대의 욕망을 재현해주는 한 광대가 있다. 광대는 시대의 욕망을 배설, 대리해주는 존재이다. 광대의 유희를 보며 사람들은 자기 안에 갖고 있는 욕망을 배설해내고는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단식광대 또한 극한의 단식을 통해 관객들에게 탄성을 자아낸다. 관객들은 자신들은 할 수 없는 단식, 절제의 행위를 극한으로 밀고나가는 광대를 보며 희열을 느낀다. 단식 광대는 철창 안에서 단식이라는 광대놀음으로 시대의 욕망, 시대의 광대가 된다. 그런데 단식광대의 유희가 벌어지는 장소는 다름 아닌 철창 안이다. 감옥 안에 갇혀있는 광대를 사람들은 저 멀리서 신기한 듯 구경 한다. 철창을 경계로 광대는 일반인과는 다른 사람으로 격리되며, 이로 인해 단식행위는 더 대단한 것이 된다. 단식광대, 개인의 단식에 대한 욕망은 감옥이 씌워짐으로써 하나의 표상, 상징이 되어버리고, 그 상태로 사회, 군중에 의해 소비된다.
  그런데 시대의 욕망이라는 것은 늘 변하기 마련이다. 이제 단식에 열광하는 ‘단식을 위한 시대’도 지났다. 절제의 극한을 찬양하는 것은 더 이상 시대의 코드와 맞지 않는다. 욕구를 인내하는 것이 하나의 해방구, 카타르시스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제는 욕구의 무한 증식만이 열광의 대상이 된다. 결국 단식 광대는 시대에 의해 버려져 쓸쓸한 죽음을 맞이한다. 감옥 안에서 홀로 굻어죽은 채 말이다.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단식의 끝을 보았으니 죽기 전 단식광대는 행복했을지도 모르겠다.
  단식 광대의 생명이 끊어진 그 철창 안으로 새로운 욕망, 새끼 표범이 넣어진다. 표범은 자신이 철창 안에 있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생명력이 넘쳐 보인다. 그 무엇도 먹지 않았던 단식광대와 달리, 새끼 표범은 철창 우리 안에서 마음껏 고기를 물어뜯는다. 표범은 시대가 원하는 욕망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대상이다. 사람들은 이 새로운 ‘욕망 덩어리’가 보여주는 욕망의 그르렁거림에 열광하며, 표범 우리 앞을 떠날 줄 모른다. 그러나 사실 관중이 열망하는 것은 표범의 생명력이 아니라 철창 안에 가두어진 야생의 욕망이다. 표범 우리의 철문이 열리면, 그 누구도 표범에 열광하지 못할 것이다. 공포에 질려 도망가기 바쁠 것이다. 단식광대의 철창처럼 표범의 감옥 또한 그를 군중과 격리시키고 하나의 ‘소비되는 욕망’으로 박제화 시킨다. 표범도 언제 단식 광대처럼 버려질지 모르는 운명이다. 결국 단식광대도, 표범도 박제된 광대, 욕망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감옥 밖으로 나온 원숭이, 인간세계 안에 스스로를 가두다

 
이번에는 앞의 두 존재들과 달리 감옥에서 벗어나 출구를 찾은 한 수인(囚人)이 있다. 그는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감옥의 문을 열었으며, 스스로 만족할 만한 지위를 얻었다. 자유로운 그, 그는 다름 아닌 원숭이이다. 원숭이는 말한다. “저는 자유를 원치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의 출구만을 원했습니다. 그 출구가 하나의 착각일지라도 말입니다.” [각주:2]감옥에 갇힌 원숭이는 ‘출구’를 욕망했고 출구를 위해 원숭이이길 포기했다. 말하자면, 이 원숭이는 출구를 ‘학습한’ 셈이다. 그는 스스로에게 다른 길은 없었다고 말한다. 인간을 모방하고 인간세계로 편입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길이자 욕망인 것이다. 그는 악수를 배우고, 술을 마시고, 담배피우며, 심지어 인간의 언어로 말을 한다. 그래서 결국 그는 그가 원하던 대로 유럽인의 ‘평균 교양’에 도달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원숭이는 참 당돌하기 짝이 없다. 그런데 원숭이는 이러한 반응을 예측하기라도 했던 듯이, 자신의 노력에 대한 평가절하는 사양한다고 말한다. 다른 인간의 판단은 원치 않는다며 말이다. 원숭이 말대로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다했으며, 그만한 대가를 얻었다. 이것에 만족하는 것이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착각일지도 모르는 자유지만 나는 행복하다, 만족한다. 원숭이는 그를 가두고 있던 작은 감옥 속에서 벗어나는 훌륭하게 성공하였다. 그러나 그는 작은 철창 보다 훨씬 거대하여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세계라는 감옥에 스스로를 가둬버린 꼴이 된다. 원숭이도 결국 단식광대나 표범처럼 갇힌 존재이다. 인간세계로 편입되고 싶은 욕망, 그것은 원숭이에게는 생존의 열망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욕망을 모방한다. 인간세계의 욕망에 자신의 모든 욕망을 동일화 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모방이 그에게는 또 다른 하나의 ‘감옥’이다. 물론 그는 보이지 않는 감옥 속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끝까지 그 편안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쉬지 않고 사회의 욕망을 모방해야한다. 새로운 와인이 나오면, 그 와인의 이름을 외워야하고, 다른 유행이 오면 또 그 유행에 맞춰가기 급급해야한다. 이런 것들을 족쇄가 아닌 축복으로 여긴다면야 더 이상 할 말은 없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개의 감옥들. 감옥에 갇힌 것이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혹은 그 안에서 행복하든 불행하든 간에 결국에는 ‘감옥’이다. 그 공간의 크기와는 상관없이 ,동일한 속성을 지닌 곳이라는 얘기다. 단식광대와 표범의 욕망이 발현되는 지점은 판이하지만 갇힌 욕망이라는 동일한 성격을 지니듯, 원숭이의 자유로운(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 세계도 똑같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사람들에게 그는 특이한 원숭이, 구경거리의 대상일 뿐이다. 이렇듯 감옥, 철창은 욕망의 주체들을 소외시키고 한낱 ‘대상’으로 격하시킨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욕망을 소외시키는 주체, 시대와 사회를 언급할 수밖에 없어진다.

욕망과 시대라는 허상, 상상력의 곡선

시대는 욕망을 지배하고, 욕망은 또한 그 시대를 지배한다. 각 시대, 사회 마다 내세우는 특정한 가치들이 있다. 중세의 신, 조선시대의 유교 논리 등, 이러한 가치들은 그 시대 사람들의 욕망에 하나의 틀이 되어준다. 사람들은 그 틀을 따라 자신들의 욕망을 배출해낸다. 그런데 이 배출은 사실 진정한 욕망의 배설이라고 할 수 없다. 앞서 말했듯 배설되는 것은 각 개인들의 욕망이 아니다. 자신들의 욕망이라고 믿고 있지만, 단지 시대와 사회가 정해준 욕망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주체는 소외되고 그 자리에 욕망만 남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사실 시대의 욕망이라는 것도 허상에 불구하다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보이는 욕망의 종류는 달라지지만, 그 본질은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십자군 원정을 떠나는 인간의 <정당해>와, 가진 건 돈뿐이야 하는 인간의 <에헴>과, 어때 나 이쁘지 하는 인간의 <흥>은 시간만 다를 뿐 같은 성질의 관념이야.”[각주:3]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현실’의 가치 관념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욕망의 본질은 같다. 시대는 욕망의 종류를 정의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의 노선을 강요 한다. 그 노선은 어쩌면 시대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욕망의 본질을 구성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다시 한 번 욕망의 탄생과 맞닿아 있다. 한 사회의 주류적 욕망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사회, 경제, 문화적인 다양한 요인이 관여한다. 그러나 어떠한 시대적 욕망이 탄생하던 간에 이 욕망이 굴러가는 힘은 간단하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바로 끊임없이 ‘부끄러워하고, 부러워하는 것’. 단순화시키기에는 뭐하지만, 자신보다 좀 더 나은 존재를 부러워하고, 그만큼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것.(사실 여기에서 ‘좀 더 나은 존재’라는 것도 단지 시대의 욕망에 조금 더 충실한 사람을 의미할 뿐이다.) 이것이 시대의 욕망을 작동시키는 원리이다. 이 부러움과 부끄러움이 계속되는 한 시대의 욕망은 그 커진 힘으로 자신과 배치되는 욕망들을 삼켜버린다. 이쯤 되면 “1년에 한 번씩 예수가 온다 한들 인간을 구원할 수 있을까?”[각주:4] 정도의 궁상스러움과 회의가 밀려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역사의 반복과 순환처럼, 시대의 욕망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이라는 불쌍한 존재의 한계일까?
  사실 허상을 깨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것이 허상임을 깨닫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그 허상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 시대의 욕망에서 한 발짝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시대의 욕망이 허상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상상력. 당대의 욕망이 아닌 ‘그 너머’의 욕망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 말이다. 그래서 사실 갇혀있다는 것은, 욕망하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상상력 자체가 금지되는 것, 새로운 것이 있다는, 있을 것이라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상상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차원에 있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것이 진정으로 감옥이며, 보이지 않는 창살이다. 그러나 이렇듯 당대의 상상력이 아닌, 자신만의 상상력을 갖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기적’에 가까운 일이라고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시대의 욕망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허우적거리며 불행해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어제보다 한 번 더 자위하는 세상”[각주:5], 수인(囚人)의 자격

“기적이 그런 거라면, 하고 내가 말했다. 왜 이렇듯 다들 불행한 거죠? 그게 인간이야, 하며 요한은 새 담배를 꺼내 물었다. 지팡이로 바다를 갈라 보여준다 한들 내일 아침이면 또 다른 기적을 원하는 게 인간이지. 끝없이 자위를 해야 하고 끝없이 손을 씻어야 하는 게 인간이야. 그리고 또, 자위를 너무 하면 몸에 해롭지 않나요 걱정하는 게 인간이지. 그러고 돌아서면 자위도 안하는 척, 하는 게 인간이야. 휴지는 휴지대로 진창 써놓고 뭐야 휴지가 떨어졌잖아, 하는 게 인간이라구.”[각주:6]
  저는 기적을 믿어요. 티 없이 맑은 얼굴에 침을 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저 어색한 미소로 작게 끄덕여줄 수밖에. 그렇다고 인간이란 원래 그런 거야, 사는 게 다 그런 거지. 이런 말에 완전히 동의할 마음은 생기지 않는다. 긍정과 체념 사이를 곁눈질 하다가 어정쩡하게 경계선에 서있다. 그러기에 소설 속 원숭이가 우리에게 말하는 것처럼 ‘감히’ 감옥에 있는 것을 쉽게 조롱할 수는 없다. 또한 난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감옥에서 벗어나자고 말할 자신도 없다. 비난할 자격이 있는 자, 수인(囚人)이 아닌 자 그 누구일까. 우리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한가지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어떠한 방식과 형식으로든 ‘욕망이라는 감옥’의 죄수라는 것이다. 카프카가 감옥의 이미지를 반복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족쇄에 대한 자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카프카는 앞서 말했듯 국카스텐이다. 만화경은 자신이 보여준 현란한 무늬에 대해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는다. 단지 그가 보여주는 모양들이 그의 메시지이다. 만화경을 들여다보는 각자가 조각들을 해석해보고, 그 모양에 이름붙일 뿐이다.
  이름붙이는 행위에 그 어떠한 ‘자격’이 필요한가. 굳이 말하자면 그 자격을 ‘수인(囚人)의 자격’이라고, 그러니 우리, 죄수들은 충분한 조건이 된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또한 죄수로서 자신이 갇혀있는 감옥에 대해 기꺼이 궁시렁거리는 것이 권리이자 의무라고도 해두고 싶다. 그것이 무기력감이든 상상력의 곡선이든, 그러나 죄수라는 한계가 있기에 너머가 있는 것이고, 너머가 있기에 또한 한계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철창 ‘너머’를 보는 것은 죄수의 본능이다. 본능은 긍정과 체념, 어떤 판단보다도 우선에 있는 것이다. 그 본능을 “어제보다 한 번 더 자위하는 세상”에서 어떤 식으로 발휘할지는 각자의 욕망이다.


  1. 루쉰, 「준풍월담 후기」중 [본문으로]
  2. 카프카 전집,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 p.267 [본문으로]
  3.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p.227 [본문으로]
  4.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221 [본문으로]
  5.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221 [본문으로]
  6. 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p.225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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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카프카2010. 8. 3. 00:28

  실종자, 카알 로스만

정 철 현

실종자

 실종(失踪)자는 종적을 잃어 간 곳이나 생사를 알 수 없게 된 자를 의미한다. 보통 어떤 사람이 실종되면 가족을 비롯한 주변사람들은 그를 애타게 찾을 것이다. 주로 불의의 사고에 의한 실종, 보통 이러한 실종은 그 사람이 죽었을 높은 가능성을 이야기해주고 있기 때문에 가족 및 주변 사람들은 그가 살아 돌아오길 간절히 바란다. 한편 일상에서 실종되었다는 말이 비유적으로 쓰일 때도 있다. 우리가 어떤 친구가 실종되었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 친구가 요즘 눈에 잘 띠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물론 그 친구를 애타게 찾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친구에 대한 관심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실제 실종자에 대한 마음이 그러하듯 같다.

그 관심은 자신과 함께 생활해 오던 동료 혹은 가족의 부재에 대한 걱정과 염려일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와 함께 했던 생활의 일부분들에 대한 그리움, 다시 돌아와 함께 생활하면 좋겠다는 기대에서 나왔을 것이다. 그는 어딘가에서 누군가와 함께 했었고, 그래서 그 누군가가 그를 찾고, 함께 하길 바라는 것이다.

그런데 카프카의 『실종자』에는 이와 또 다른 실종자가 등장한다. 카알 로스만. 하지만 그에게는 실종자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다른 이들로부터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하고 있는 그가 어떻게 실종자일 수 있겠는가. 주로 우리가 실종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누군가가 어디로부터 실종되었다라고 말한다. 즉 그 사람이 원래 있던 자리에서 실종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럴 경우 카알은 실종자가 아니다. 그를 실종자라며 관심을 가지고 찾아줄 원래 그가 있었던 자리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그는 원래부터 실종자였다. 그가 있을 장소란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실종자, 카알 그리고 아메리카

 아메리카. 그곳은 카알에게 어떤 장소도 주지 않았다. 그 장소란 간단히 말해서,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일하며, 놀고, 쉬고 하는 공동체를 말한다. 그는 그러한 공동체 안에 속해, 미국생활에 적응하고 싶었지만 그 곳으로부터 계속 미끄러지게 된다. 옥시덴탈 호텔에서, 외삼촌에게서, 그는 그 안에서 어떤 확실한 지위에 오르고 싶었지만 계속 이곳저곳 떠돌기만 한다. 이렇게 카알이 어느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계속 떠돌아다는 것은 아메리카 탓이기도 하고 그가 지닌 상황자체의 모순 때문이기도 하다. 공동체 안에서 살고 싶은 카알의 바람, 그러나 그렇지 못한 아메리카 현실.

  그건 중요치 않아요, 우선은 대단치 않은 일을 맡게 될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부지런하고 세심하게 일하여 지위가 높아지도록 해야만 돼요. 좌우간 세상을 방황하고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어디엔가 정착하는 것이 당신에게 더 좋고 또 적합할 것 같군요. 내 생각엔 당신은 세상을 떠돌아다닐 체질도 아닌 것 같아요. 134p

  옥시덴탈 호텔의 여주방장은 떠돌아다닌다는 카알에게 호텔에서 일하면서 공동체 속에서 편히 살기를 권유한다. 여주방장은 카알에게 하찮은 일부터 시작하더라도, 열심히 일한다면 호텔 안에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며, 그가 호텔 안에 들어와 일할 것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러한 여주방장의 말처럼, 옥시덴탈 호텔에서 어떤 확실한 지위에 오르기란 쉬운 것이 아니다. 이곳, 옥시덴탈 호텔은 아메리카라는 기계의 축소판이다. 그곳은 끊임없이 카알에게 호텔에 들어와 일할 것을 권유하면서도, 한편으로 호텔로부터 밀어낸다. 호텔에 들어와서 열심히 일하면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이라고 카알을 꼬신다. 하지만 그러한 꼬심에 넘어가 호텔을 욕망하는 카알은 다시금 호텔에 의해서 내쳐진다. 카알이 호텔 속에 일하기를 바라듯, 아메리카 속에서 일하길 바라는 사람들. 하지만 아메리카는 거대한 기계. 그 기계는 많은 작업량으로 고장이 잦다. 계속 해서 부품을 교체해주어야 한다. 그 부품은 바로 기계 주위를 배회하는 카알 같은 산업예비군들인 것이다.

  카알이 자주 놀란 것은 그는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도 다른 동료들은 현재 자신의 지위에 완전히 만족하여 그것이 일시적인 직업임을-이십 세 이상의 엘리베이터 보이는 고용하지 않았다-전혀 느끼지 못했고 또 장래에는 다른 직업을 결정할 필요성도 깨닫지 못한 채, 침대에서 침대로 전해지고 있는 더러운 누더기에 쌓인 탐정소설 외에는 아무것도 읽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158p

  아메리카라는 기계, 그것은 카알이 자신을 욕망하게 만들지만, 카알이 그 곳에 들어갈 자리는 마련해주지 않는다. 아니면 잠시 사용했다가, 철저한 규율 하에 다른 부속품으로 대체된다. 철저한 규율 하에 그는 엘리베이터 보이에서 해고되었고, 다른 일자리를 구하러 오클라하마로 간다. 다른 종류의 부품이 되려고 말이다. 이럴 줄 알았을까? 그는 엘리베이터보이를 할 때도, 혹시 모를 훗날을 위해 열심히 상업교본 공부한다.

  또한 카알은 자신 안에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외면적으로, 혹은 거짓으로 그 집단에 수용된 것이며, 그 자신도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믿으며 살아간다. 항상 그가 꿈에 그리고 상상하던 모습대로 될 것이라면서 말이다. 어찌됐든 바로 아메리카 시민이 되는 것이 바로 눈앞에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눈앞의 모습은 거짓된 유리를 통해서 본 착시현상에 불과할 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카알이라는 개인 안의 모순이 드러나게 된다. 그 사회에서 받아들어졌다고 착각하는 카알, 그러나 그럴 리가 만무한 현실. 현실과 배치되는 카알 자신의 상상은 그가 바라는 자아의 모습일 것이다. 그가 여러 공동체를 떠돌아다니며 꿈꿔왔던 자기상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그것은 카알 자신의 존재이유였고, 그것은 그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다. 이러한 그의 모순적 상황에서 ‘실존적 실종’을 볼 수 있다. 그는 현실 속에서 자아의 상을 계속 해서 잃어나간다.
아메리카라는 거대한 기계는 카알을 원래부터 실종자이게 했다. 그가 머무를 곳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가 미국에 발을 들인 순간 그는 실종자가 되었다. 그리고 카알 자신 안의 모순은 그를 영원히 실종자이게 한다. 그래서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실종자이다.

 
카알의 존재이유, 아메리카

 그들은 이틀 밤낮 기차를 탔다.…………첫째날에 그들은 높은 산악지대를 가로질러갔다. 푸른 기가 도는 검은 암석덩이들이 뾰족한 쐐기 모양을 하고 기차 쪽으로 다가왔다. ……계곡 물의 찬 기운 때문에 얼굴이 덜덜 떨릴 정도로 계곡이 가까이 있었다. 330p

  카알이 브루넬다의 집에서 나와 오클라하마의 대형극장에 채용되어, 그곳으로 떠나는 마지막 장면이다. 이 마지막 장면에는 새로운 기대감과 앞으로 겪게 될 고단함이 느껴진다. 카알은 아메리카에서 살아가기 위해, 고단한 먼 길을 꿋꿋이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연이지만 이 소설의 결말이 나지 않은 채로, 카알이 어딘가로 또 다른 새로운 일을 향해 달려간다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럽다. 그는 멈추지 않고, 그의 새로운 아메리카에서, 아메리카를 위해, 설사 그것이 자신을 밀어낸다 할지라도 아메리카의 당당한 시민이 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할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끝은 어딜런지.

 
그래서 더욱 더 비참한

 카알이 행동하는 주저없고, 경쾌한 움직임은 더욱더 비참함을 가미시킨다. 그는 독일 집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올 때에도, 외삼촌에게 절연의 편지를 마주할 때도, 옥시덴탈 호텔에서 해고당할 때도 어떤 우울함이나 좌절감을 갖지 않는다. 그는 단지 다른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씩씩하게 나아간다. 그것은 그 당시 아메리카의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일자리는 구하기 쉽다. 언제나 누군가 타라는 차를 타면 그곳에 가서 일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야콥 운송회사에서 일할 노동자 모집’의 글귀가 붙은 차를 타거나, 오클라하마의 극장 직원 채용공고를 보고 그곳으로 달려가면 일할 수 있다. 그러나 옥시덴탈에서 해고되듯이 쉽게 해고되고 다른 일자리를 찾고, 그런 식의 무한한 반복. 그래서 좌절하는 것은 그 상황에 맞지 않는 일일지도 모른다.

 
카알에게 필요했던 것?

  정의의 문제가 중요한 것같이 보이지만, 동시에 규율의 문제도 중요하지. 40p

  카알은 아메리카에서 적응하기 위해 꿋꿋이 살아가지만 고독하고 외로웠다. 오직 규율만이 지배하는 그 곳은 그의 목을 옭아맨다. 그가 얼마나 열심히 하건, 그가 얼마나 착하고 올바른 생각을 가지고 있던 항상 규율만이 그를 평가한다. 계속 그랬다. 규율이 그를 자꾸만 밀어냈다. 독일서 미국으로 쫓겨났을 때에도 그는 하인을 임신시킨 죄로, 외삼촌과 절연하게 된 계기도 그 대단한 외삼촌의 규율과 원칙을 어긴 일로, 옥시덴탈에서 해고당했을 때도 엘리베이터 보이 규칙을 어긴 일로, 그는 평가받았고, 그 모든 곳에서 쫓겨났다. 모두 규율이 그를 평가하고 속박하고, 결국 내치기까지 했던 것이다. 이러한 삭막함 속에서 그가 원하는 것은 따뜻한 온정이었을까?

  너는 저 화부에게 홀린 것 같구나.” “너는 외로움을 느꼈을 테지. 그때 화부를 만났고, 지금 그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려는 것이지.”42p

침대에 앉아서 깜짝 놀라 문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을 잠옷 차림의 사랑하는 외삼촌을 놀라게 하고 싶었다. 어쩌면 이 사실 자체로는 대단한 일이 못되기는 하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까지 잘 생각해보아야했다. 아마 그는 처음으로 외삼촌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게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아침 식사를 계속하게 되면 지금까지 하루에 단 한 번 하는 것보다 더 자주 자리를 함께 하게 될 것이고, 물론 그러면 서로 솔직하게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69p

  그는 단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원했다. 그는 외삼촌에게서도 금전적인 것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지 그와의 솔직한 대화를 원했다. 그가 얼마나 외로웠으면. 그는 옥시덴탈 호텔에서 그런 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과 만난다. 여주방장과 테레제는 그에게 있어서 소중한 친구이자 어머니 같이 포근한 존재였다. 하지만 어머니와 같은 포근한 존재는 아버지로 대변되는 엄격함과 규율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시켜준다. 이런 의미에서 어머니와 같은 포근함은 그가 영원한 실종자가 되는데 기여하지 않을까?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어머니에게 치유받고, 또 아버지에게 얻어맞고, 치유되고....

 
카알의 마지막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 건

 카알이 오클라하마로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나고 『실종자』는 끝이 나는데, 그가 너무 경쾌하게 나아가서 일까? 물론 그 경쾌함 속에 외로움과 두려움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그 뒷모습이 무언가 미묘한 여운을 준다. 또한 그가 아메리카에 처음 와서 외삼촌 집에 피아노를 쳤던 행위가 그의 마지막 모습과 겹쳐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카알이 소음으로 가득한 하늘을 향해 열린 창 앞에서 고향의 옛 군가를 연주할 때면 그것은 참으로 기묘하게 울렸다. ……그러나 군가를 연주한 후 카알은 거리를 내려다보았는데, 그 모습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고, 그것은 순환 속에 작용하는 모든 힘을 알지 못하고는 우리가 그 자체를 정지시킬 수 없는 거대한 순환의 한 조그마한 부분에 지나지 않았다. 50P

  그는 자주 발코니에 우두커니 서서 길을 잃은 양처럼 거리를 내려다본다. 물론 이것을 삼촌이 불쾌하게 생각해서 그만 두었지만 카알은 이를 매우 즐겼다. 뉴욕의 바쁜 하루를 멍하니 바라보는 것을 말이다. 언젠가 그는 이 뉴욕 거리를 향해, 그 분주함이 만들어내는 소음이 가득 찬 하늘을 향해 고향의 옛군가를 연주한다. 무언가 변화되길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 거리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그것은 정지시킬 수 없는 거대한 아메리카다. 그래서 외삼촌이 말하지 않았던가. 우두커니 그것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그 속으로 뛰어들어가야 한다고. 물론 카알은 뉴욕의 거대한 순환 고리 속으로 들어갔지만, 그가 열린 창 앞에서 연주했던 고향의 옛 군가는 그의 마지막 뒷모습에서 은근히 들려온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