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루쉰2010. 8. 19. 02:59

2NE곰  루쉰 소설집 『방황』

루쉰, 오 마이 라이팅!(Oh, my 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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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골 서늘한 일상의 ‘침공’

  한 작가가 ‘행복한 가정’이라는 주제로 소설을 쓴다. 그 소설에는 매우 세련된 부부 한 쌍이 등장한다. 작가는 고상하고 우아한 주인공들의 삶을 하나하나 구상해본다. 그런데 소설 구상이 쉽지만은 않다. 안타깝게도 그의 구상은 단지 상상, 가정뿐이기 때문이다. 그가 쓰고자 했던 행복한 가정은 처음부터 ‘가정’에서 시작된다.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도시 조차 정할 수 없다. 그저 A시이다. 당시 중국의 도시 중에서는 ‘현실적’으로 작가가 구상하는 행복한 가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은 한 번도 읽지 않은 책이지만, 교수들이 좋게 평가했다는 이유만으로 주인공들에게 『이상적인 남편』을 읽히고, 진귀한 요리를 먹게 한다. "My dear, please." 느끼한 영어로 서로에게 뱀장어를 권하는 부부라니.
  소설은 어찌어찌 진행된다고 해도 더 큰 문제가 그를 괴롭힌다. 그것은 바로 소설 속 행복한 가정과는 정반대인 그의 일상, 현실이다. 소설을 구상해나가면서 일상의 언어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장작 스물다섯 근, 오오는 이십오. 떨어진 장작을 사는 일이 그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돈다. 그러나 일상이 글 속으로 ‘침투’하려 할수록, 오히려 소설은 작가의 일상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즉, 그는 그의 일상을 하나하나 지워나가며 글을 구상해나가는 것이다. 그는 그의 일상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가령 책장 옆 배추더미라든지, 늘 열려있는 서재 문과는 정반대의 ‘행복한’ 세계를 소설 속에서 구현해낸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침투는 ‘침공’으로 바뀌어 그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그는 자신이 쓰려는 ‘행복한 가정’과 배치되는 자신의 현실을 마주 할 때마다, 허리에 바늘이 박히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 스릴러 영화에 나오는 살인마처럼 일상은 그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아내가 아이를 때리는 ‘찰싹’소리,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를 현실세계로 돌아오게 만든다. 결국 그는 자신의 현실과 소설 사이의 괴리를 참지 못하고 원고지를 찢어버리고는 그것으로 아이의 눈물과 콧물을 닦아 준다.

현실은 시궁창, 글쓰기 그리고 루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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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보면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손으로는 젖과 꿀이 흐르고 무지개가 뜨는 낙원을 그릴 때가 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러하다. 내 손으로 쳐내려간 활자들이지만, 나의 일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러려니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가끔은 짜증이 밀려오기도 한다. 영어발음 굴려가며 맛있게 먹을 뱀장어를 집어 올렸는데, 뭣도 아닌 현실이 내 허리를 콕콕 찌르고, 순간 놀라 뱀장어를 떨어뜨린다. 떨어진 뱀장어가 능글맞게 웃으며, 네 현실이나 돌아보라 한다. 내가 그려내는 글 속의 세계는 위풍당당하게 미래와 희망을 이야기하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뚜벅 뚜벅 나아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의 일상은 여전히 글과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사실 글과는 달리 나는 전혀 나아가고 있지 못하며, 그렇다고 희망적이 되고 싶은지 그 조차도 잘 모르겠다. 내 글 속에는 희망으로 향하는 너무나 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들이 등장하지만, 정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은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차라리 글을 쓰지 않는다면 좀 더 마음이 편해질까? 더 이상 그 평행선, 뱀장어의 비웃는 얼굴을 떠올릴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루쉰의 소설, 잡문을 읽다보면, 현실 속 자신과 그의 글 사이에서 고민하는 루쉰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는 변화와 희망을 얘기하지만, 동시에 누구보다도 회의하고 절망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그런 그의 글을 “가면 속 외침”이라고 한다. 나는 나의 또 다른 글에서 루쉰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괴리, 모순을 직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의 인생을 직시한다는 것, 그 비참함을 안고 한 시대를 살아낸 ‘인간 루쉰’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내가 루쉰을 이렇게 받아들여 글을 쓰는 것과 나의 일상 사이에는 무엇이 놓여 있는 것인가. 루쉰을 위대하다고 ‘쓰는 나’는 오히려 루쉰을 쓰는 행위를 통해서 그를 밀어냈던 것은 아닐까. 루쉰이라는 화살이 내 일상, 현실에 닿지 못하도록 글을 방패삼아 막아내며 말이다.
  소설「행복한 가정」속에서 원고를 찢어버린 작가의 눈앞에 “여섯 포기의 배추더미”가 우뚝 서있다. 루쉰이 직시했던 것은 바로 이 우뚝 서있는(아마 우뚝 서있어 피할 수 없는) 일상이었을 것이다. 오, 마이 루쉰. 오, 마이 라이팅! 아직은 나지막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언젠가 나 또한 원고지를 구겨버리고 ‘무언가’를 마주해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미 그 배추더미의 실체를 어느 정도 마주해버렸다. 시궁창인 현실과 쉽게 바뀌지 않는 시궁창의 그 끈질긴 관성. 지금 이 순간에도 무의식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타이핑했다 지우고를 반복하는 나의 글, 나의 현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시궁창의 관성에 지배당하기 전에 희망찬 ‘그럼에도’가 아닌 ‘오, 마이’의 절규로 끝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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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루쉰2010. 8. 14. 22:26

-사람이 사람을 먹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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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食人)’의 공포에 사로잡힌 남자의 이야기


루쉰의
<광인일기>는 어는 피해망상병을 앓은 남자의 이야기다. “오늘 밤은 참 달이 밝다(루쉰 소설전집,P12)”. 일기는 맑게 갠 밤 하늘에 뜨는 달의 묘사부터 시작된다.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달은 맑은 빛을 던져온다. 남자는 혼자 하늘의 빛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생각한다. “어다까지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P12)”.

 

 

남자의 병은 사람들이 자기를 잡아먹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피해망상이다. 밖에 나가면 모든 인간이 해치려는 이상한 눈초리로(P13)” 자기를 째려보고 있다. 길거리에서는 여자가 너를 물어뜯어 놓겠다!(P14)”라고 소리를 치르고 있다. 집에 소작인이 오면 맞아죽은 사람의 내장을 먹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역사 책을 찾아봐도, 책에는 식인 글자가 가득 있다. 남자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소름이 (P14)”차며 이렇게 생각한다. “그들이 사람을 잡아먹을 있다면 나라고 잡아먹을 리가 없을 것이다(P14)”.

그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잡아 먹는 사람들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간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으며 의사를 봐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남자는 잇달아 새로운 진실 발견한다. 사람들은 사실은 사람을 잡아먹고 싶어하면서도 수법이 비겁하고 음흉하며 감추려고 하기 때문에 감히 덤벼들지 못하(P17)” 있다는 , 자기의 형도 자기를 먹으려고 하고 있다는 . 그리고 자기는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의 동생이며, 만약에 자신인 잡아먹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의 동생인 (P18)” 깨달은다. 

 

모두가 자기를 잡아먹고 싶어하고 있다는 남자의 확신은 나날이 커져간다. 남자는 묻는다.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옳은 일인가?(P20)”.

그리고 사람들에게 외친다. “너희는 고칠 있어! 진심으로 마음을 고쳐먹으라구! 이제 멀지 낳아 사람을 잡아먹는 놈들은 세상에서 살아갈 없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 “너희가 마음을 고치지 않으면 자기 자신도 결구 먹혀버리고 말거야. 설사 줄줄이 낳아서 늘어놓는다 해도 잔정한 인간들에게 멸망당하게 거야! 마치 사냥꾼이 늑대를 모조리 잡아죽이듯이벌레처럼 말이다!(P24-25)”.

 

남자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묻는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알게 된다. “4 동안 내내 사람을 잡아먹어 , 거기서 나도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왔다는 . “4 동안 사람을 잡아먹는 이력을 가진 나는 애초에는 진정한 인간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몰랐지만 지금을 똑똑히 알고 있다!”. 그의 마음의 외침은 이렇게 끝난다. “사람을 잡아먹어 본적이 없는 아이들이 아직도 있을지? 아이들을 구해야지…..(P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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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을 먹는 세상


남자는
광인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남자가 느끼고 있었던 , 그것은 정말로 이상한것이었을까? 그가 보고 있었던 세상은 우리가 보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미친 세계일까?

우리는 날마다 누군가가 살인 당한 이야기를 들며, 때로는 아주 무서운 뉴스에 접하기도 한다. 어디 뿐인가. 우리는 자기자신을 위해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한다. 사람이 사람을 습격하는 세상, 사람이 사람을 먹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다만 그런 것을 들어도 처음부터 보지 않기로 하거나 나에게는 상관이 없는 일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남자는 사실이 너무나도 마음에 걸린다. 그는 확신한다. 사실은 모두의 마음속에는 사람을 잡아먹고 싶은 생각이 가득 있음이 틀림없다고. 그리고 자기야말로 먹힐 거라고.

 그러나 그는 자신도 몰래 사람을 먹은 적이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도 4천년의 식인의 역사를 가지는 인간의 일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만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남자는 마지막에 아이들에게 미래를 걷는다. 우리는 무엇에 미래를 거는가. 나는 아직 이 답을 찾느라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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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루쉰2010. 8. 13. 01:03
 


 어느 여름, 셋째댁은 그녀의 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토끼 한 쌍을 사는 것으로 루쉰의 소설 <토끼와 고양이>는 시작한다. 그 천진난만한 토끼를 보며 아이들은 무척 좋아한다. 호기심 많은 강아지 에스도 그 토끼를 보고 달려들다 재채기를 하고 물러선다. 아이들은 자주 토끼를 껴안고 놀았고, 에스도 토끼를 괴롭히려 하지 않았다. 얼마 후 그 토끼들이 땅을 파자, 모두들 토끼새끼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새로 태어난 토끼 두 마리는 어느 새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 후 어미토끼도 나타나지 않았다. 셋째 댁은 토끼 굴의 다른 통로에 고양이의 발톱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 새끼 토끼가 사라진 이유가 고양이의 소행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그녀는 호미로 토끼 굴을 파기 시작한다. 그러자 원래 토끼 굴이 있었던 자리와 좀 떨어진 곳에서 어미토끼와 새끼토끼 일곱 마리가 자고 있었다. 필시 두 마리의 어린생명들이 희생당한 후, 어미토끼는 고양이를 피해 다른 굴로 옮겨가서 새끼를 낳았을 것이다. 셋째 댁은 이제 더 이상 그 어린 토끼들이 고양이에 희생되지 못하도록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다. 하지만 남들은 셋째댁을 보며 그토록 번거롭게 토끼를 기르는 법은 본 적이 없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런데 이를 지켜본 소설 속 주인공은 갑자기 그 죽은 두 마리의 어린 생명들을 생각하면서 서글픈 마음이 든다. 그는 그 작은 존재의 허약함과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사라진 것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갖는다. 그 토끼들은 존재의 빛을 한번도 발하지도 못한 채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는 옛날의 일을 생각한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회관 앞의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서 보게 된 가득히 흩어진 비둘기의 털, 그 비둘기는 누군가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마차에 치어서 죽어가는 강아지. 그러나 얼마 후 그 죽음의 흔적조차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그곳에서 한 생명이 끊어졌으리라는 것을 누가 알 것인가! 그는 그것을 보고 망연함과 허망함을 느꼈다.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그토록 쉽게 나고 사라져 버리는 허망한 모습에 슬퍼한다. 이에 조물주를 원망해보기도 한다. 조물주는 멋대로 생명을 만들기도 하며, 멋대로 짓밟아버리기도 한다면서.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든 조물주에게 돌을 던져보지만, 자연의 실상은 원래 그러하기에 의미 없는 돌이라는 것을 안다. 셋째댁이 그토록 새끼 토끼를 정성스레 돌보는 것, 주인공이 소리 없이 사라져간 생명들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과 같은 인간의 선의는 자연 속에서 무참히 짓밟힌다. 하지만 그는 그 무참히 짓밟힌 작은 생명을 기억하고, 그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또한 그는 작은 존재들을 무심히 밟아버리는 강한 자들을 증오하며, 약한 존재들을 대신해 강한 자에게 복수해주고 싶어한다. 그는 자꾸 책상 속에 숨겨둔 청산가리 병을 떠올린다. 주인공이 얼마만큼 고양이를 증오했는지 잘 나타난다. 청산가리는 정말 강력한 독극물이다. 얼마나 고양이가 싫었으면, 청산가리를 떠올리겠는가! 그는 언제까지나 고양이가 담장 위를 당당하게 활보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확신한다. 이 확신에는 증오에 가득 찬 살기와 비장함이 서려있다. 고양이를 설사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언제나 그 놈이 저리도 당당하게 살고 있는 꼴을 못보겠다는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증오인 것이다. 그도 다 안다. 그래봐야 약한 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는 강자는 여전히 많다고. 하지만 이건 그의 다짐 아닐까? 끝까지 한번 해보자는. 이 세상의 강한 것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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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루쉰2010. 8. 10. 14:07

납함에 있는 소설 속 주인공들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인물은 아큐이다.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그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큐는 이런 사람이구나 하다가도 갑자기 방향을 틀어 전혀 다른 행동이 나타난다. 혹은 아예 그의 생각을 읽어버릴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아큐는 자신의 부스럼을 놀리는 동네 건달들에게 몇 번 덤볐다가 항상 벽에 머리를 짓찧게 된다. 그래도 절대로 자신의 부스럼에 대한 놀림을 넘기지는 않는다. 아큐를 일반적인 바보나 맹추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몇 번 호되게 당한이후로 놀림을 받아도 그저 속으로 분해할 뿐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맞는 것이 두려우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건달들에게 힘이 통하지 않자 매섭게 째려보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대단한 자존심이다. 이랬던 그가 얼마 안가서 건달들에게 머리채를 잡히자 자신은 벌레라며 빨리 놓으라고 한다. 그 대단한 자존심이라면 오히려 머리채가 뜯겨져 나가도 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네가 어떻게 나의 친척일 수가 있냐고 화를 내며 따귀를 때리는 짜오 나으리 앞에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것은 그가 당한 폭력의 수준 차이 때문인 것일까?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 맞는 것이 더 아프고, 덜 아프고를 떠나서 맞는 것 자체를 싫어할 텐데 아큐는 폭력을 자처하고 있다. 매에 맞기 전에 변명을 하기보다 매에 맞고 난 후 변명을 하는 것이 그다. 그리곤 후련해 한다. 한 대 맞은 것으로 일이 일단락되었으니 말이다. 보통 맞고 나면 더 반항심이나 울분이 생기는데 후련해 하다니. 자존심이 강한 아큐라면 오히려 가슴속에 남들보다 큰 앙갚음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크기가 남들보다 큰지 작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나름의 울분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그는 이런 울분을 가끔 정신적 승리법으로 푼다. 자식이 애비를 때리는 거라는 생각도 하고 이 생각이 먹히지 않을 정도로 울분이 심한 날은 제 손으로 제 얼굴을 세게 몇 번 때린다. 맞은 것은 ‘나’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누군가를 때렸다는 것으로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그의 생각이나 기분을 읽어내려 했던 내 시도는 철저히 무너진다. 이런 정신적 승리법을 만들어 낸 그의 사고를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다. 짜오 나으리나 가짜 양반, 미장 사람들이 아큐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그를 마을의 하찮은 녀석, 어중이떠중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고 평소에도 그의 존재를 크게 인식하고 있지 않다. 소설 속 그의 행적을 봤을 때 충분히 독특한 사람임에도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큐정전>의 서문만 봐도 그렇다. 작가가 그에 대해 확신하고 있는 것은 ‘아’자 하나뿐, 아무런 정보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 그는 너무나 복잡한 사람이다. 혁명당원의 목이 댕강 잘리는 것을 보고서도 ‘혁명이란 것도 괜찮구나’라고 생각하는 그의 사고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혁명을 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들, 예를 들면 짜오 나으리네 가구나 재산들과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녀석들에 대한 복수가 그를 유쾌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 때문에 그가 혁명에 가담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거인 나으리의 두려움, 미장 사람들의 두려운 눈빛이 그를 신명나게 했다. 마을의 존경받는 어르신조차도 두려워하는 혁명과 반란에 마을사람들도 덩달아 두려워 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아큐는 혁명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는데도 변발을 위로 올리고 ‘반란이다!’를 크게 외치고 다닌다. 그가 멍청하고 상황파악 능력이 모자라서 그랬을까? 아무리 그렇다하더라도 사람들의 두려운 눈빛이 그에게 주는 유쾌함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바보면 다 혁명하는 자인가.

                                                                                                                                   <왜 영구가 떠오르는 걸까...?>



아큐가 종잡을 수 없는 생각과 성격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있다. 그는 그 스스로가 너무 잘났다. 이는 그의 자존심이 세다는 말인 동시에 남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게다가 들을 마음도 없어 보인다. 무인도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사람처럼 아큐는 그의 기분이나 감정, 이것들의 해소와 자신이 보고 듣는 모든 것에 대한 해석들을 스스로 해결한다. 위에서도 말하지 않았는가. 정신적 승리법이나 혁명에 대해 느끼는 신명 등. 그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그를 위해 충고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아큐에게 무게감 있게 살아가라고 충고해준다. 아큐의 반응은? 귓등으로 듣지도 않고 자신에게 충고를 해준 그 사람을 욕할 것이다. 아니면 귀를 한번 후비고는 멍한 표정으로 자리를 뜰 것이다. 아큐는 남의 말에 휘둘릴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돈이 없어 며칠을 굶고, 옷이나 집이 없어도 충분히 살아간다.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그는 그만큼 강하다. 여기서 강하다는 것은 의지가 굳거나 생활력이 강하다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어떤 표현을 써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삶에 단단히 붙어있다는 느낌이랄까. 이런 강함.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강함. 그만큼 그는 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일 테다. 여기서부터 아큐에 대한 이해, <아큐정전>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지 않을까.


Posted by masoume
History/루쉰2010. 8. 8. 17:07

<2NE곰-납함 에세이>


현실을 살아가기



명혜원


 

박수근作

아아, 이것이 20년 동안 한시도 잊지 못한 고향의 모습이란 말인가? 내가 알고 있는 고향은 전혀 이런 모습이 아니었다. 내 고향은 훨씬 더 좋았다. 그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며, 그 좋은 점을 말로 표현하려하면, 금새 그 모습은 사라지고 말은 잃어버린다. 역시 이런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나 자신을 위로하였다. ‘본래 고향이란 이런 것이다. 진보도 없는 대신, 내가 느끼는 바와 같은 적막함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느끼는 것은 나 자신의 심경이 달라진 탓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번의 내 귀향은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라고.




 루쉰의 소설 '고향' 속 20년만에 고향을 찾은 주인공의 심경묘사이다. 이사를 위해 고향을

박수근作
찾았을 때 그는 슬픔을 느끼게 된다. 자신이 기억하던 고향의 모습과 너무나도 다른 쓸쓸하고 황폐한 마을이 생기를 잃은 채 가로누워 있는 모습을 보니 자신이 20년 동안 그리워하던 고향이 정말 맞는지 가슴에 슬픔이 솟아오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과거 고향의 아름다움을 가슴에 그리며 좋은 점을 말해 보려 하면 그 모습은 순식간에 지워지고, 표현하고자 했던 말도 없어져 버리고 만다. 그가 알던 고향의 아름다움이란 그가 그려낸 막연한 아름다움이었던 것이다.

 ‘고향’이라는 단어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것만 같은 막연한 공간으로서의 이미지가 있기도 하고, 지친 나를 포용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푸근함도 존재하는 듯하다. 고향에서의 추억은 아련하나 즐거운 감정을 만들어내 되새기고 은미하며 현재를 즐겁게 살아가도록 만들어 준다.

 하지만 첫사랑은 첫사랑으로 남겨두고 만나지 않는 것이 나았다는 말이 있듯이 시간이 흘러 마주하게 된 고향은 그가 막연히 그리던 아름다움이 사라져버리게 된다. 특히 추억 속 자신의 작은 영웅인 룬투는 모진세월을 견디며 ‘등신 같은 인간’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순수하던 어린시절 주고받은 우정은 그들에게 남아 있지 않다. 룬투와 그의 사이에는 이제 그를 ‘나으리’라고 부르는 벽이 생겨나 있었다. 고향의 아름다운 이미지와 더불어 어린시절 추억까지 깨어져 버린 것이다.



옛 집은 차츰 나로부터 멀어져 갔다. 고향의 산천도 차츰 나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미련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내 둘레에 보이지 않는 높은 벽이 쳐져 나 혼자 그 속에 남겨진 듯한 생각이 들어 울적해질 뿐이었다. 수박밭의 은목걸이를 한 어린 영웅의 모습은 다시 없이 선명하였었는데, 이제는 갑자기 희미해져버렸다. 이 또한 견딜 수 없이 슬픈 일이었다.


 

박수근作
오랫동안 타지 생활을 하던 그가 마음한편에 두었던 기억하고 싶던 추억이 사라졌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슬픔이었을 것이다. 이제 막연히 아름답다 칭하며 떠올릴 마음의 안식처가 사라져버렸다는 점과, 자신이 그리던 아름답던 추억이 단지 과거의 기억일 뿐이었다는 점이 그를 슬픔으로 몰아넣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는 깨닫게 된다. 자신은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고, 룬투는 룬투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흔히 현재의 상황이 싫어지면 과거를 떠올리며 추억하게 된다. 대학생 때는 ‘고등학교 때가 좋았지’, 고등학교 때는 ‘중학교 때가 좋았지’, 중학교 때는 ‘초등학교 때가 좋았지’ 등 현재의 상황과 과거 좋았던 일부를 비교하며 돌아가고 싶은 추억으로 만들어 떠올리며 위안을 삼는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를 버텨나갈 수 있는 일종의 희망이 된다. 즉 추억이라는 희망은 사람을 즐겁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그러나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가공된 이미지속 추억에 너무 의존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들을 직접 마주했을 때 크나큰 절망감에 빠지게 된다. 그렇다고 우리가 평생 추억을 가지지 않고 살아가기란 불가능 하다. 추억이란 것은 우리가 가지지 않으려고 해도 어느 순간 생겨나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추억과 어떻게 관계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가? 결론은 2가지다. 희망적 추억을 만들고 그것을 직접 대면하지 않은 체, 평생 추억을 그리며 살아가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다. 또 다른 방법은 추억이 추억일 뿐임을 인식하고 너무 큰 기대와 희망을 가지지 않고 마주하는 것이다.


‘나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이다. 주인공은 자신의 조카와 룬투의 자식이 잠깐의 만남으로 서로를

타향도 정이들면 고향이라지
그리워하는 정이 생겨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는 그들은 자신과 룬투와 같은 단절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그러기 위해선 이들이 기존과 는 다른 전혀 새로운 길을 가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곧 이러한 바람조차 희망임을 직시하며 위와 같은 말을 하게 된다.

 우리가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막연히 그리게 되는 추억 또한 희망과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땅위의 길과도 같은 희망. 우리가 걸어갈 수, 실천 할 수 있어야만 희망은 만들어 질 수 있게 된다. 고향에 대한 추억이, 추억에 대한 이상이 현실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절망이 되어버린 것은 고향과 추억에 대한 이상이 과거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추억에 의지하며 현재를 부정하고 살고 있지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한다. 자신의 희망과 현실이 마주했을 때의 간극으로 절망하며 패배감에 휩싸여 살아가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우리는 과거를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희망만을 의지한 체 살아가는 사람들도 아니고,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