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구절절'에 해당되는 글 22건

  1. 2010.10.20 구구절절..
  2. 2010.10.15 니몽의 구구절절3- 대화의 기술 1
  3. 2010.10.11 니몽의 구구절절2 - 루쉰과 ‘연극’ 1
  4. 2010.10.07 권력에 매혹당하지 마라 2
  5. 2010.10.06 강철의 얼굴 2
구구절절2010. 10. 20. 02:59


 

테크닉이나 이론은 다소 개인차가 있어도
누구든 언젠가는 습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은 각자가 나름의 방법으로
획득해야 하는 것이고, 그 때문에 학생인 것이다.

 나는 직업으로 이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선택했다.

요시토모 나라 (奈良美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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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굔데...졸리네요....ㅠ
졸린김에 잠깨기 위해 컴터에 손을 댔는데..
이런글이 우연히 들어왔어요
개인적으로 요시토모 나라를 너무 좋아해서,
너무 잘알아서 올리는건 아니구요..
저번주 세미나 이후
 '절실함'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저한테 절실함은..
무엇을 하고싶어 한다가 아닌,
내가 해 나가고 있는 것,
내상황에서의 스스로의 선택이
나중에 후회 없도록 하기위해
노력하며 사는 일 같아요
저한테 지금 절실한건..
졸전이죠......
졸전과 더불어 작업하며 생긴 문제는...
나를 부정하지 않기.
나의 자존감 찾기,?!ㅋ
나는 무엇을 할것이다가 중심이 아닌
현재에 하고있는 일에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그 일이 매순간
절실한 삶의 방식이 되도록 노력해야 겠어요
비몽사몽....
아직도 졸려요........
절실함이 있다면 잠이 없을까요...........?
음.......
토요일날 봐여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구구절절2010. 10. 15. 03:15
이번 구구절절은 루쉰이 아닌, 한겨레21 칼럼 중에서 뽑아보았습니다.(그래봤자 결국 루쉰이야기를 하지만서도) 
신형철 씨가 쓴 <대화의 기술>이라는 글에 인용된 구절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인터뷰를 발췌한 것이라네요.

"가장 하고 싶은 말은 하면 안됩니다. 거기서 멈춰버리니까요. 대화라는 것은 스테이트먼트가 아닙니다.
훌륭한 퍼커셔니스트는 가장 중요한 소리를 내지 않아요.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쓸데없이 멈춰서는 안 돼요. 그게 기본입니다."(무라카미 하루키)

"훌륭한 퍼커셔니스트는 가장 중요한 소리를 내지 않아요." 이 구절을 읽고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습니다. 
글쎄요. '가장 중요한 소리'를 쿵, 혹은 뗑, 하고 들은 느낌과 비슷하달까요. 

저는 이 구절을 읽고는 이런 순간을 상상해보았습니다.
"가장 중요한 소리"가 튀어나오고, 대화가 멈추고 정적이 흐릅니다. 하루키 씨의 말에 따르면 '기본'도 안된 대화의 예겠지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입니다. 정적의 그 때, 하나의 문턱을 넘어가고, 존재가 뒤바뀌어 버립니다.
왠지 익숙하지요. 사실 이 장면은 제 상상이 아닌 루쉰이 포착해낸 순간입니다. 어떤 장면인지 떠오르시나요?

제가 떠올린 것은 바로 <복을 비는 제사>의 샹린댁 입니다.
"샹린댁!" 샹린댁은 존재를 바꾸는 이 한마디를 듣고 눈의 광채를 잃어버립니다.
애처롭고 안타까운 장면이기도 합니다만, 존재를 바꾸는 한 마디. 저에게는 이것이 더 인상깊게 남네요.
물론 "샹린댁!" 한마디가 하루키 씨가 말한 '가장 중요한 소리' 혹은 '가장 하고 싶은 소리'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저는 무엇인가 말해진다는 것. 그리고 그 것이 정적 혹은 어떠한 변화를 만들어낸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세미나 때 <복을 비는 제사>를 암송하고, 이야기를 했던 것이 기억납니다. 다른 분들이 암송하는 것을 듣고 이 소설을 다시 한번 더 보게 되었어요. 루쉰 소설에 등장하는 '존재를 바꾸는 한마디'에 대해서도 말이죠.) 

*칼럼 전문을 보고 싶으신 분들을 위해 주소도 올려봅니다.
원래 이 칼럼은 소설 속 "대화의 기술"에 대한 글입니다. 저는 이 칼럼을 읽고 소설 속 대화 뿐만아니라,
제가 마주하는 여러 대화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되더군요.

*신형철의 문학 사용법, <대화의 기술>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281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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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구구절절2010. 10. 11. 03:10

  루쉰을 공부하면서 제가 가장 부딪치는 문제는 루쉰 글의 의도, 흐름을 제대로 읽어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독해’가 안되다보니 글은 당연히 꼬여버릴 수밖에요. 이런 상태에서 단순한 감이나 이미지만으로 한 주제 아래 여러 글을 묶으니, 글을 쓴 제 자신도 갸우뚱 하게 되더군요. 루쉰의 글은 한 대상, 주제에 대해서도 보여주는 관점이 너무 많아서 어딜 어떻게 가지 쳐서 다듬고 글로 만들어낼지 참 난감합니다.

  루쉰을, 루쉰의 글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글을 쓰려니 너무도 답답하여, 이 ‘구구절절’한 마음을 <구구절절> 란에 올려봅니다. 앞으로 루쉰을 제대로 ‘독해’하기 위해서라도 제 나름의 정리가 계속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런 취지에서 늦었지만, 이번에는 루쉰의 잡문 중에서 제가 관심 있게 읽고 있는 테마의 글들을 정리해 볼까합니다.

  제 눈에 자꾸만 밟히는 테마는 루쉰과 ‘연극’입니다. ‘연극, 배우, 꼭두각시, 관객’. 루쉰의 잡문에서 자주 등장하는 소재들입니다. 한꺼번에 이 소재를 다 다룰 수는 없고, 이번에는 비슷한 소재 속에 나타나는 다른 ‘관점, 시선’에 대해 정리해볼까 합니다. 여러 잡문에서 연극과 관련된 비유들을 등장하고 서로 유사해보이지만, 쉽게 같다고 등호를 매기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서의 ‘관객’이 저기에서의 ‘관객’과는 또 다른 것입니다. 섣불리 묶으려고 하다가 산산이 부서진 제 글을 떠올리며 나름대로 고민해보았습니다. 


  연극이라는 상황을 크게 공간적인 구분으로 나누면, 무대 안과 무대 밖으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무대 안, 무대 위에서는 배우들이 연기를 하고, 무대의 밖에서 그들의 연극을 구경하는 것이 관객들입니다.

A. 군중-특히 중국의 군중은-은 영원히 연극의 관객입니다. 희생이 무대에 등장하였을 때, 만약 기개가 있다면 그들은 비장극을 본 것이고, 만약 벌벌 떨고 있다면 그들은 골계극을 본 것입니다. 북경의 양고기점 앞에는 항상 몇몇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양가죽을 벗기는 것을 구경하고 있는데, 자못 유쾌해 보입니다. 인간의 희생이 그들에게 주는 유익한 점도 역시 그러한 것에 불과합니다. 게다가 사후에 몇 걸음 채 못가서 그들은 얼마 안 되는 이 유쾌함마저도 잊어버리고 맙니다.
이러한 군중에 대해서는 방법이 없습니다. 차라리 그들이 볼 수 있는 연극을 없애버리는 것이 도리어 치료책입니다. 바로 일시적으로 깜짝 놀라게 하는 희생은 필요하지 않고 묵묵하고 끈기 있는 투쟁이 더 낫습니다.

-노라는 떠난 후 어떻게 되었는가, 무덤, p.229-

  A의 경우 군중은 연극의 관객으로 묘사되어있습니다. 이들은 무엇인가 ‘연기’하는 존재가 아니라 철저히 보는 존재입니다. 그들은 “입을 벌리고 구경”만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누가 연기하는 연극(그 연극이 비장극든 골계극이든 간에)을 보고 있는 것일 까요? 연극이 있어야 관객이 있는 것이고, 이 말은 어딘가에 ‘배우들’이 있다는 이야기겠지요.

  이 배우들이 누구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각 잡문마다 지칭하는 대상이 조금씩 다르지만, 대부분의 경우 군중들보다는 ‘특별한’ 존재들입니다. 연기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 나름의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은 루쉰이 비판하는 “무대 위에서의 몸짓과 무대 뒤에서 본심이 다른(<속 즉흥일기>中)”이들입니다. 군중들을 속이는, 진짜가 아닌 ‘연기’하는 이들이 바로 배우들인 것입니다. 연기로 속이는 행위를 어떤 의미에서는 ‘조종’(조종이라는 단어 역시 루쉰의 잡문에 자주 등장합니다.)과 연관시켜서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관객과 배우. 연극에 대한 시선을 이 두 가지만으로 설명할 수 있으면 편하련만, 루쉰의 글은 참 ‘불’편합니다. 앞에서 연극을 공간적으로 안과 밖으로 나누었는데,(즉, 무대와 무대 밖) 마당극 같은 경우 무대와 관객석의 경계가 모호하지 않습니까? 루쉰이 말하는 연극이 마당극과 같은 ‘이미지’는 아닙니다만,(일단 쿵덕쿵덕 흥겹지 않으니까요.) 관객이 늘 관객의 역할을 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점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3의 존재들, 배우 같지만 관객 같고, 관객 같지만 배우 같은 아리송한 이들이 등장합니다.

B.1 “극장은 작은 천지요, 천지는 큰 극장이다”라는, 연극무대에 걸어두는 훌륭한 대련으로 전해져오고 있다. 사람들이 본래 모든 일은 한바탕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있으니, 진지한 사람이 있으면 그는 곧 바보가 된다. 그러나 이는 결코 적극적인 체면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며 마음속에 불평이 있어도 복수에는 겁을 내서 만사는 연극이라는 사상으로 그것을 포기해버린다. 만사가 연극인 이상 불평도 진짜가 아니며 복수하지 않아도 비겁하지 않은 것이다.

B.2 연극하는 것이라면 무대 앞에서의 자세는 무대 뒤에서의 모습과는 다르다. 단지 관객들은 분명 그것이 연극인줄 알면서도 그럴듯하기만 하면 여전히 그 연극에 기뻐하고 슬퍼할 수 도 있으며, 그래서 그 연극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폭로하기라도 하면 그들은 도리어 흥을 깨는 것이라고 여긴다.

-즉흥일기 속편, 화개집 p.350,351-

  B.1과 B.2는 같은 글에서 발췌한 것인데, 묘사되는 ‘시선’이 약간은 다릅니다. B.1의 경우 자신의 인생을 한낱 “연극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고” 현실을 외면하는 이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A에 묘사되는 관객과는 다르죠. A의 관객들은 구경만하는 진정한 ‘관객’인 것에 반해서 B.1의 인물들은 자신들이 마주하는 사건들이 연극 속의 일이라 치부해버리는, 연극 무대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관객이 자신의 일을 연극 속의 일과 같다고 생각하지는 않으니까요. 관객은 무대를 경계로 연극과 거리를 두고 있습니다. 루쉰이 B.1에서 묘사하는 군중은 자신들이 적극적으로 연극 속에서 행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연극 무대 안에 있기 때문에, 그들을 관객이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관객 겸 엑스트라라고나 할까요? 그렇지만 A와 B.1을 묶을 수 있는 것은 루쉰이 관객을 묘사하든, 엑스트라(엄밀하게는 배우)를 묘사하든 그 껍데기와는 상관없이 그들은 모두 ‘수동적’인 존재라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들을 ‘꼭두각시’라고 말할 수 있겠죠. 무대 위에 있지만, 여전히 조종당하니까요. 또한 무대 밖에 있어도 배우들에게 속는 것은 마찬가지겠지만 말입니다. 속는 다는 점에서 조종당하는 것과 유사하다고 할 수 도 있겠습니다. 

  B.2는 B.1과는 다른 관점이 느껴지는데, 묘사되는 관객의 모습이 A와 동일합니다. 그러니까, 관객과 배우가 확실히 나누어져있다는 것이죠. 발췌한 부분에는 없지만, 이 글에서 배우들은 “국수주의자 또는 도덕가 등이라 일컬어지는 패들”입니다. 이들은 연기를 하고, 관객들은 “분명 그것이 연극인줄 알면서도 그럴듯하기만 하면 여전히 그 연극에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입니다.
정리해보자면 루쉰이 연극을 보는 초점은 1.관객을 속이는 배우, 2.철저히 구경만하는 관객 3.무대 위에 있지만 수동적인 관객 겸 배우(엑스트라) 정도 되겠습니다. 특히 3의 아리송한 수동적 존재들 때문에 좀 더 복잡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나눠놓고 보니, 루쉰이 ‘연극’이라는 비유를 자주 애용했고, 여러 단어에 대해서 일관성 있게 의미를 부여했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비유적’으로 글에서 사용했다는 느낌도 듭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왠지 ‘허무한듸!’를 외치고 싶네요. 그렇지만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이,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간에 지금 저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다음번(다음번이라지만 기약할 수는 없는)에는 좀 더 ‘정의’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사실 이 부분이 진정한 의미의 독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예를 들어 루쉰이 말하는 ‘연극’이란 무엇인가? 그가 묘사한 ‘관객’, ‘배우’들은 어떠한 존재들인가, 혹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가? 등. 루쉰의 용어 사전이라고나 할까요? 아마 ‘미션 임파서블’일 가능성이 농후하지만 그래도, 한 발짝 나아가기 위해 끄적거려 볼 생각입니다.

P.S. 사실 이 글도 다분히 제 ‘느낌과 감’에 의존한 해석일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지적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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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구구절절2010. 10. 7. 01:30

* 철학이 “권리들”을 규정했던 것처럼, 개인의 “권리들”을 되찾는 것을 정치에 요구하지 마라. 개인은 권력의 산물이다. 요구되는 것은 다양성과 전치, 다양한 조합들에 의한 “탈개인화de-individualize"여야 한다. 집단은 위계화된 개인들을 획일화하는 유기적 접착이 아니라 탈개인화의 부단한 발생장치이어야 한다.


*권력에 매혹당하지 마라.


[안티 오이디푸스 영역판 서문 by 푸코]


저번주와 이번주 마음세미나는 채운샘의 안티오이디푸스 강의가 있었어요.
기계니 코드니 영토화니 용어때문에 정신이 없긴 하지만 강의를 다 듣고난 지금,
이들의 저작을 읽고 싶다는 생각이 강렬합니다. 노마디즘 한 번 읽고 싶어요.
마음세미나 끝나고 세미나를 만들어 볼까 생각중이긴 합니다만.. 우선 사람들을 모아봐야 겠네요.
 
욕망이 누군가의 소유가 될 수 없다는 사실, 즉 나의 욕망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이 꽤나 큰 충격이었습니다.
내가 나의 욕망이라고 생각하고 내 욕망대로 하겠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되는거죠.
그 욕망은 사회나 국가, 자본에 의해 권력화 된 것들이니까요.
이런 것들을 파시즘이라고 부르더라구요. 내 안의 파시즘.
들뢰즈와 가타리는 "우리를 지배하고 착취하는 바로 그 권력을 욕망하게 만드는 파시즘"을
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차이, 차이의 반복들을 중요시 여겼었나봐요.

요새 화요일에  영어 세미나를 하는데
거기에서 하워드 진의 '미국 민중사'를 읽고 있어요.
이 구절을 읽으면서 미국 민중사의 한 부분이 떠올랐어요.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정치적인 권력을 가진 백인 상류층에게 반대하여
흑인들, 이민자들, 가난한 백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들의 반란은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어 내는 게 목표가 아니었어요.
자기네들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정치 환경을 만드는 게 목표였어요.
그래서 새로운 정당을 만들지만 결국 기존의 엘리트 정당들에게 먹히고 맙니다.
"Liberty!"
이 자유라는 이름이 반란의 방식을 이런 식으로 밖에 생각할 수 없게 만든거죠.
하나의 흐름 밖에 만들어 낼 수 없는 것...
다른 식의 흐름들을 어떻게 만들어 내야 할 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이 씁쓸함이 요새 저의 고민입니다.
20대, 대학생, 그것도 졸업을 앞둔 대학생, 그리고 나와 비슷한 처지의 친구들.
이 위치에서 어떻게 씁쓸함을 넘어설 수 있을지.
이런 고민을 던져준 들뢰즈와 가타리에게서 답을 찾아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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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soume
구구절절2010. 10. 6. 23:02

"지난 해 이후 확실히 나는 몹시 사람이 나빠졌소. 그만큼 진보했는지도 모르겠소.
여러 방면으로부터 공격을 받아도 전혀 상처를 입은 느낌이 들지 않으며 이젠 쓰리지도 가렵지도 않은 거요.
이 이상 어떤 죄상을 추가당하더라도 기가 죽는 일은 없을 것이오.
이것은 많은 오래된 또는 새로운 세상물정을 체험함으로써 겨우 획득한 것이오." ([상해통신] 중에서)

공격을 받아도 상처를 받지 않는 느낌! 
오랫동안 사람들과 논쟁을 거친다음 과거의 껍질을 벗고 새로운 껍질을 뒤집어 쓴 루쉰.
상당히 강화된 껍질이어서 그런지 이제는 쉽게 다른 이들에게 기 죽지 않을 것 같단다.
기가 죽든, 기가 죽지 않던 자신은 자신을 뿐이라는 것.
남이 욕해도, 남이 칭찬해도 루쉰은 루쉰.
내가 넘어서야할 문제를 오롯이 받아들이는 태도.
상처 따위는 없다, 강철얼굴에는.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