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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26 바람난 리뷰에 관하여 4
  2. 2011.07.26 삶 : 무게의 진실 1
  3. 2011.06.28 그, 얼굴들
  4. 2011.05.15 [바람난, 니몽을 찾아서] prologue 2
  5. 2011.05.14 씨리우, 그 사람의 의미 3
에세이/생명연습2011. 7. 26. 02:06

# 맥주 공장, 시시콜콜


더워서 창문을 열어놓았더니 간간히 맥주 공장 냄새 가 은은히 올라오네요.
제 자취방 가까이에 맥주 공장이 있는지라, 맥주가 발효되는 것을 바로 후각으로 느낄 수 있지요.
꼬리꼬리하기도 하고, 그러나 싫지는 않은 그런 냄새입니다.
이 냄새 때문인지, 이 한밤중에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쓰고 싶네요. 

투애니곰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으아, 참으로 뭐랄까. 설명할 수는 없지만서도.
거의 2년에 가까운 시간들이 아름다웁게, 마무리되어 한편으로 뿌듯하기도 합니다.
(그 아름다웁던 시간들은 곧 사진으로 다시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대신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무섭게 졸았지만서도.
아, 갑자기 비름나물 비빔밥이 아주 무섭게 먹고싶어지네요.


# 에세이? 리뷰? 바람난 리뷰?!

투애니곰이 끝나고, 이제 새로운 웹진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요즘에는 새삼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종종하게됩니다.

투애니곰 후반부에 이야기 나왔던 자폐적인 글쓰기, 혹은 폐쇄적인 글쓰기. 그리고 소통.   
그래서 요즘에는 내가 글을 왜 쓸까, 혹은 쓰고 싶어하는 가에 대해 생각해보게됩니다.
아직 답은 전혀 나오지 않았고 생각한다고 해서 간단하게 나올 답도 아니기에.

그래서 제가 요즘 곱씹는 것은 <리뷰>입니다.
리뷰, 리뷰라.
저는 투애니곰, 그 외 다른 세미나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쓸 때에
한번도 '리뷰'를 써본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에세이었죠. 그러니까 조금 더 제 감상이 담긴. 하여간 그런 에세이.

리뷰가 무엇일까. 심각하게 생각할 문제도 아니지만서도 
요즘 이 이유, 저 이유 때문에 리뷰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군요.

제가 어떤 책에 대한 리뷰를 쓴다고 마음 먹었을 때에는
에세이를 쓸 때보다 그 리뷰를 읽을 독자를 생각하게 되겠죠. 아무래도.
흔히 리뷰라 하면 비평. 평론. 서평을 말하니까요. 
지금까지 써왔던 글보다는 조금 더 '소통적인' 글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사실 이게 이렇게 쓰겠다고 써지는 건 아니지마는)
리뷰를 써보고 싶네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루아침이 글이 다른 사람이 쓴 것 마냥 바뀌지는 않을겁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좋은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구요. 희미하게나마 있는 제 색깔을 살린달까요.(쥐뿔도 없으매)
저도 어떤 글이 써질지 궁금합니다.
역시 에세이도 아니고 리뷰도 아닌, 그 뭣도 아닌 바람난 리뷰가 되겠군요. 저와 닮은. 

웹진은 웹진나름대로 꾸리겠지만 그래도 나름 제 폴더도 생긴지 얼마안됐는데, 말이죠.
처음 해본 블로그라 그런지 여기에 정이가네요. 
설마 이 팀블로그 없어지는 건 아니죠?
가끔씩 그 리뷰 비스므리 한 것도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아.
  


다시 읽어보니 시시콜콜이 지나치네요. 아, 배가 고프니 어서 자야겠습니다.
자취생은 배가 고프면 잠을 잡니다.



 


p.s. 배가 고프니 바다가 보고 싶습니다. 바다를 보러 갈겁니다. 이 여름이 끝나기 전에.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에세이/생명연습2011. 7. 26. 00:28

2NE곰 정말, 마지막 에세이
밀란 쿤데라 『농담』

삶 : 무게의 진실


삶, 능동과 피동

나는 살아갑니다. 어제를, 오늘을, 내일을 살아갑니다.

‘살아간다’라는 표현에는 주어인 내가 능동적으로 행위하고 있다는, 약간의 자신감이 숨어있다. 삶에 대한 오만함이랄까. 때로 우리는 삶에서 우리 자신의 의지가 반영된다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굳센 의지로 인생을 개척해나간다거나 하는. 그러나 많은 경우 이것은 쉽게 배반당한다.

물론 살아간다는 것이 능동의 의미가 있다고 해서, 삶이라는 것이 ‘살아간다’와 ‘살아진다’의 능동, 피동 한쪽으로만 경계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 나이에 삶이란 것에 쓰려니 피식 웃음이 나오지만, “열두 살은 열두 살을 살고 열여섯은 열여섯을 살지”라는 노래 제목처럼 우리는 나이에 상관없이 늘 각자의 삶을 살아가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이 무엇이다, 어떠하다고 말하기에는 여전히 민망하기는 하다. 각설하고, 능동과 피동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면 삶에서 많은 경우 우리는 능동보다는 피동의 상황에 더 자주 놓이게 된다. 삶에게 ‘~함을 당하는(피동)’ 철저한 약자들. 만약 그 삶이 역사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자신의 권력을 과시한다면 그 가혹함은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루드빅은 자신이 엽서에 써보낸 농담 한 마디로 과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삶 속에 던져진다. 단지 그가 결정할 수 있었던 것은 이 갑자기 마주하게 된 현실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이다. 물론 그는 자신의 의지대로 선택할 수 있다. 그러나 그는 그 선택지를 결정할 권리는 없다. 선택지는 이미 결정되어있다. “존재 자체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길 거부했던” 루드빅도 결국에는 군대 생활에 익숙해진다. 익숙해진다는 것 또한 그의 ‘선택’임은 물론이다. 어쨌거나 그의 의지가 반영된. 그렇게 그는 살아간다.


무게를 둘러싼 의혹들

[곽호철 作.]


삶의 무게를 달 수 있다면, 어떤 이의 삶은 무겁고 또 어떤 이의 삶은 가볍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삶의 태도의 문제일까 아니면 삶 자체의 문제일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생을 그가 짊어진 십자가, 고난의 무게만큼 무겁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쓸데없는 지난 며칠간을 내 인생에서 지워버릴 수 있다고 한들 그것이 내게 무슨 도움이 될 것인가, 내 인생의 일들 전부가 엽서의 농담과 더불어 생겨났던 것인데? 나는 실수로 생겨난 일들이 이유와 필연성에 의해 생겨난 일들과 마찬가지로 똑같이 실제적이라는 것을 느끼며 전율했다.
                                                                                                                          『농담』,p391


루드빅의 삶은 그 자신의 말처럼 “엽서의 농담과 더불어” 생겨났다. 농담은 그저 농담일 뿐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농담이 만들어낸 인생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 삶은 늘 살아가는 자체로 실재할 뿐이고, 루드빅의 말처럼 실제적이다. 무게로 생각하면 그만큼 충분히 무겁다는 이야기이다. 충분히,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은 딱 그 만큼.

또 다른 이는 삶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꿈이라고 믿기에는 그 고통이 처절해서 버거운 하루하루에 대해서. 그렇다면 고통의 무게가 무거울수록 삶은 무거운 것일까.

오늘 아침, 이 얇은 초록색 책이 다시 생각나 창고의 트렁크에서 꺼내왔다. 한 장 한 장 넘겨가다가 거친 필체의 메모를 발견했다. ‘세상은 환(幻)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라고 보르헤스가 구술한 문장 바로 아래였다.

그 꿈이 어떻게 이토록 생생한가. 피가 흐르고 뜨거운 눈물이 솟는가. 
                                                                                                               한강, 「희랍어 시간」

세상은 환(幻)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 사는 게 꿈일지라도 그 꿈속에서 사는 인간의 감각은 생생하다. 이 말을 한 보르헤스도 인생을 하루하루 살아내는, 이러한 점에서는 다른 사람들과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존재였을 것이다. “피가 흐르고 뜨거운 눈물이 솟는다”고 말하는 이도 마찬가지이다. 그 인생의 디테일이 꿈이든 지옥이든 천국이든 간에, 삶은 모두 동등한 무게를 갖는다. 루드빅이 소설 속에서보다 훨씬 더 불행한 삶을 살았다고 해서 그의 삶의 무게가 바뀌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한 사람이 그의 인생을 가벼이 본다고 해서, 혹은 반대로 진지하게 본다고 해서 삶을 재는 무게저울의 눈금이 더 기울지는 않는다. 결국 농담이든 진담이든 간에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삶들은 늘 삶이라는 만큼의 무게로 떡 버티고 있다.


그리하여, 수수께끼

이제 루드빅은 거대한 농담과도 같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며 생각한다. 인생이 그에게 마주하게 했던 모든 일들에 대해서.

개인적인 이야기들, 그런 일들은 그저 일어나고 지나가는 데 그치지 않고 무슨 말인가를 하고 있기도 한 것일까? 나는 아주 회의적이긴 하지만 그래도 약간의 비합리적인 미신이 내게 남아 있는데, 내게 일어나는 모든 사건은 그 자체 이상의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어떤 것을 <상징>하고 있다는 묘한 믿음이 그런 것이다. 삶은 삶에서 벌어지는 일들로 우리에게 말을 하고 점진적으로 어떤 비밀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믿음, 삶은 해독해야 할 수수께끼로서 주어지는 것이라는 믿음, 우리가 겪는 일들은 동시에 우리 삶의 신화를 형성하며 또한 이 신화는 진실과 불가사의의 열쇠를 모두 지니고 있다는 믿음. 그것은 환상일 뿐일까? 그럴 수도 있다, 틀림없이 그럴 것 같기까지 하다. 하지만 나는 내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해독>해야만 하는 이런 욕구를 억누를 수가 없다.
                                                                                                                    『농담』, p233,234

삶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반응해야할 것, 선택해야할 것들을 부과한다. 우리가 삶에 대응한 방식 혹은 그 결과가 ‘우리’를 만든다. 루드빅의 말을 빌려오자면 “신화”. 그렇다면 반대로 삶이 우리에게 무수히 보여주는 사건들에는 그 자체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 루드빅이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상징”이다. 삶이 우리를 살아내게 하면서 우리에게 조금씩 흘려주는 비밀은 무엇일까.

삶이 해독할 수수께끼라면, 그것은 영원히 풀어야할 퍼즐과 같을 것이다. 영원히 풀어야한다는 것은 결국 영원히 풀 수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맞춰야할 퍼즐조각의 수는 우리가 1분 1초를 살아가는 만큼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고, 퍼즐을 맞추는 사람조차 퍼즐이 완성될 모습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퍼즐, 혹은 수수께끼가 원래부터 답이 없다고 해서, 이 퍼즐을 맞추는 행위가 ‘무겁다고’해서 그만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굳이 그만둔다면 나야 할 말은 없지만. 우리, 이 피동적인 인간들은 같은 무게이지만 각자의 고유한 퍼즐을 가졌다. 그 퍼즐을 나도 너도 해독하지 못할 수도, 흔한 괴담의 결말처럼 원래부터 (해독할)그런 것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뭐,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다. 왜냐면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이 퍼즐을 풀어야하는 별 볼 일 없는 사명에 놓여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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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에세이/생명연습2011. 6. 28. 20:52

2NE곰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에세이

그, 얼굴들


첫 번째 유대인

  나치와 유대인, 홀로코스트, 아우슈비츠에 대한 수많은 일화들. 권장도서 목록에서 「안네의 일기」를 너무 자주 봤기 때문일까. 나에게는 유대인, 이 많은 ‘안네들’의 삶이 이성적인 수준 이상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들에 대한 재현은 왜인지 모르게 지나치게 감동적이거나, 혹은 지나치게 잔혹했다. 그래서 늘 나에게 남는 것은 감동과 안타까움, 놀람과 경악의 ‘감정들’이었다. 장편 역사책의 흐릿한 사진처럼, 추상적인 느낌들로 말이다. 그러던 나에게 유대인들을 하나의 ‘얼굴’로 각인시킨 것은 이 하나의 그림이었다.



   이 그림의 제목은 펠릭스 누스바움의 「유대인 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화상」이다.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서경식 씨는 이 그림에 대하여 “모든 것을 빼앗기고 절체절명의 벽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마지막으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막다른 곳에 몰린 유대인 남자가 자신을 부르는 관헌을 되돌아본다. 그런데 이 남자의 얼굴은 생각보다 침착하다. 그의 눈에는 자신이 잡혔다는 공포나, 놀람 보다는 체념이나 서글픔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감정이 담겨있다. 이 남자의 눈이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유대인’이다.

구조된 사람과 익사한 사람

“수용소는 게르만식 사회구조 한가운데서 시간제한 없이 우리에게 부과된 존재방식일 뿐이다.(125)”

  어떠한 상황에서 내가 그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영역이 적을수록, 실낱같은 희망이나, 우연에 기댈 수밖에 없어진다. 만약 극도의 절망적인 상황이라면, 프리모 레비가 묘사한 수용소의 삶처럼 그것이 “존재방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러한 공간에 내던져진 사람들은 나치당이 혹은 과연 자신들이 “이것이 인간인가”라고 탄식을 내뱉게 된다. 그런데 소설을 읽다보면 그들의 탄식이 나에게는 이것이 과연 인간이구나, 로 읽혀지게 된다. 수용소라는 같은 “존재방식”을 살아가지만, 해프틀링들의 팔에 찍힌 숫자만큼이나 다양한 인간들이 각자의 궤적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프리모 레비는 이들의 유형을 크게 둘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하지만 다음 사실도 관심을 기울일 만하다. 인간들을 뚜렷하게 구별 짓는 두 개의 범주가 존재한다는 것 말이다. 그것은 구조된 사람과 익사한 사람이라는 범주다 (132)”

  구조된 사람과 익사한 사람. 쉽게 생각하면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자, 그렇지 못한 자로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다. “익사자, 수용소의 척추다. 그들은 끊임없이 교체되면서도 늘 똑같은, 침묵 속에 행진하고 힘들게 노동하는 익명의 군중, 비인간들이다.(136)” 프리모 레비는 자신의 의지가 한순간도 발현될 기회 없이 생을 마감한 이들, 수용소라는 늪에서 익사해버린 자들을 이야기한다. “얼굴 없는 그들의 존재”로 우리 시대의 모든 악을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할 수 있다고 말이다.

  어찌되었건 프리모는 살아남았으며, 생존 경쟁에서 구조된 사람들을 기억한다. 그들은 그것이 천부적인 능력이든 노력이든 간에, 사실상 스스로를 ‘치열하게 구조해낸’ 사람들이다. 프리모의 그들에 대한 각각의 묘사는 놀라울 정도이다. 그들의 ‘능력’은 인간의 생존이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수용소의 생존이란 인간에 대한 어떤 미화도 없이 철저하게 발가벗겨낸 생존 그 자체이니 말이다.

  외모, 기본적으로 타고난 골격과 힘, 선천적인 잔혹한 성품 혹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 이 요소들을 무엇이라 지칭해야 하나. 좀 더 구체적 예를 들자면, 장기적인 안목으로 철저하게 이미지를 관리한다. 사람의 약한 부분을 파고들어 자신에게 동정심을 갖게 만든다. 친절하지만 결코 모든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등등. 이런 처세의 방식들 앞에 나는 생존이라는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린다. 그러나 사실, 생존이라는 이 명백한 단어 앞에서 어떠한 표정을 지어야할 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늘 이러한 것들이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인 일종의 ‘가식’과 같은 것이라 생각했다. 나와는 크게 동떨어진, 내가 마음만 먹으면 유유히 피해갈 수 있는 개똥과 같은 것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우연히 개똥을 밟고 황망히 걸음을 멈추었던 예전 어느 날 아침처럼, 이 책을 덮고 나는 그런 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내 기억 속에 추가된 몇몇의 새로운 얼굴들을 떠올린다. 내가 혐오하는 그 ‘비인간적’인 것으로 살아남은 인간들의 얼굴을 말이다.

  만약 내가 수용소에 수감되었다면, 어떤 해프틀링이 되었을지, 생각해본다. 그 “존재방식” 속에서 나의 얼굴은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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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에세이/생명연습2011. 5. 15. 18:07

 



니몽이라는 이름에 회의(?!)를 느끼고 있는 이참에,
다른 필명으로 바꿀까 이리저리 생각해보았는데요.(바우와우도 계속 생각나서요.)
아직은 딱 끌릴만한 이름이 떠오르지 않네요.

결국, 어찌어찌하여.
[바람난, 니몽을 찾아서]로 제 에세이 폴더명을 정했습니다.

앞으로 같이 읽을 책들이 꽤나 많이 남았고,
또 그 책들을 마주해나가면서 어떤 에세이들을 쓸지 모르겠기 때문에.
폴더에 어떤 주제명을 붙이긴 어려웠습니다.

대신 "바람난"을 붙였는데요. 오늘도 바람이 무척부는 날인데,
지난번 니체 에세이에서 썼듯이 요즘 "바람"에 대한 감상이랄까, 이미지가 자꾸떠오릅니다.
아직은 제 글처럼이나 엉성하고 그냥 이미지로 떠나니지만, 

앞으로 이 바람들이 점점 고여가면, 그러니까 니몽이가 "바람나면",
좀 더 선명한 것이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니모를 찾아서" 영화는 다들 아시죠. 
제가 니모를 닮았다는 이야기도 들었었는데, 

하여튼, 

제 안의 글들을 찾아 써보겠습니다.

투애니곰에서 같이 읽고 쓰는 에세이도 올리고,
아주 가끔씩은 다른 시시콜콜한 것들도 올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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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에세이/생명연습2011. 5. 14. 21:31

2NE곰 다이허우잉 『사람아 아, 사람아』에세이#2

씨리우, 그 사람의 의미


누구나 자신의 행동에 의미를 붙이며, 혹은 그 붙여질 의미를 상상하며 살아간다.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의미라는 것은 생명줄과도 같은 것이다. 얼마나 절실하게, 어떤 방식으로 그 의미를 생각하든 간에 말이다. 그래서 흔히 말하는 ‘의미 없는 삶’이란 인간에게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견딜 수 없음 때문에, 사람은 때로 ‘의미’를 필사적으로 붙잡고 놓지 못하기도 한다.

우리는 종종 다른 사람의 행동을 판단해보곤 한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할까, 아니,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소설 『사람아 아, 사람아』에서 작가는 각 인물들의 입을 빌려 이래서 그럴 수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그녀는, 혹은 그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렇게 살아갈 수 있었다고 말이다.

소설에서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저마다의 ‘의미’를 되새긴다. 사실 나는 허징후, 정확히 말하면 작가 다이허우잉이 말하는 ‘뜨거운 휴머니즘’이랄지. 계급 투쟁, 노선 투쟁 등등의 것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가 말하고 싶은 ‘인간’에 대해서는 말이다. 아마 그것들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주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쑨위에나 허징후가 신소설이나, 계몽소설 속 주인공을 떠올리게 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내 눈이 가는 곳은 말 그대로 ‘사람인’ 씨리우이다. 정확히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조롱하는 ‘의미’를 붙잡고 있는 그를 말이다.

“사람아 아, 사람아! 인간이란 모두 이렇다. 아침부터 밤까지 싸워도 나아지는 것은 없고, 그렇다고 해서 싸우지 않으면 더 악화된다!(p375)”


사람아 아, 사람아! 이 탄식은 허징후에게서도, 쑨위에에게서도 나온 것이 아니다. 바로 씨리우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씨리우는 어떤 인물인가. 당위원장 서기라는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속으로는 “역사는 지금까지도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고, 부모에게 반항하는 불초자식을 들이밀 줄이야. 참으로 진저리가 난다!(p.96)”라고 푸념하는 자이다. 또는 다시 한 번 웃음거리가 될 수는 없기에, 그렇게 결혼 생활을 계속한다. 사실 그가 바라는 앞으로의 인생은 대단한 것이 아니다. 아마 그가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 마디일 것이다. “아, 쫌!” 귀여워하던 아들놈은 다른 누구보다도 자신을 조롱하고, 재혼한 젊은 아내는 늘 우는 소리다. 씨리우는 여전히 마르크스를, 마오 주석을 이야기하지만, 역사는 이제 그의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되어버렸다.

나는 이 사람, 씨리우가 스스로에게 부여하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다. 젊은이들은 그가 역사에 뒤쳐진 늙은이라고 비판한다. 그가 과거 행했던 잘못에 대해 역사의 책임을 져야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씨리우가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상부로부터 내려온 방침일 뿐 “질 수 없는 책임”이다. 어찌되었건 그가 의미를 갖는 것은 ‘자신의 논리’이다. 만약 지금껏 자신이 가져왔던 논리를 버린다면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그는 사람아, 하고 탄식하면서 계속 싸워가는 것이다. 아무리 의미는 제각각이라지만, 내가 의미 붙여 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것들이, 막상 손을 펴보았을 때 텅 비어있을지도 모른다. 이 두려움에, 나는 꼭 쥔 손을 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초라한 씨리우를 보면서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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