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루쉰2010. 9. 17. 22:13
 

무엇을 할 것인가?

정 철 현


 혁명을 위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선충원이 묘사하는 참혹한 광경은 그 당시의 중국을 잘 나타내준다.


상가는 몸통 없는 머리로 뒤덮여 있었고 긴 사다리의 가로대에도 많은 머리가 매달려 있었다. 사다리는 새 대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반란군들은 산에서 대나무를 잘라 사다리의 수직장대에 수평가로대를 고정시켰다. 나는 몹시 놀랐고 사람들이 왜 살해당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또한 왜 머리가 잘렸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잠시 뒤 나는 늘어놓은 귀를 발견했다. 그것은 보기 힘든 기묘한 광경이었다.…… 왜 그들은 머리를 잘렸을까? 나는 확신을 할 수가 없어서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아버지에게 물어보았다. 아버지의 대답은 혁명이었다. 106p, 천안문


루쉰이 살던 중국은 격변의 장이었다. 열강의 침입과 서태후의 섭정으로 그동안 중국을 지배해온 청조는 쇠퇴하고 있었고, 서양으로부터 들어온 새로운 문물은 중국의 전통을 와해시키고 있었다. 개혁과 혁명의 기운이 중국을 감싸고 있었다. 많은 지식인들은 청조를 무너뜨리고 중국을 근대화하고자 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중국을 지배해 왔던 유교적 전통에서 벗어나 서구의 새로운 사상을 도입하고 시험하고자 하였다. 청조와 새로운 중국 사이의 과도기에서 중국은 수많은 혼란을 겪어야 했고, 무수한 피를 흘려야만 했다. 선충원이 위와 같이 묘사하듯, 혁명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어떤 자는 실제로 혁명을 꿈꾸고 실행에 옮기다 죽어갔고, 어떤 자는 아무런 이유 없이 역사의 희생양이 되기도 하였다.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 버리고 거리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 왔다. 몇 사람의 목숨쯤은 중국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 기껏해야 그들은 좋은 심성을 가진 방관자들에게 이야깃거리를 제공해 주거나 악의를 가진 사람들에게 헛소문을 퍼뜨릴 기회를 주었을 뿐이다. 곧 시위로 어떤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다.……… 특히 맨주먹으로 나선 시위로는.  214p, 천안문


 하지만 뜨거운 열망과 투지에 불타올랐던 시위가 끝나면, 남는 것은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애잔한 슬픔만이다. 그것은 그 시위의 방법이 너무나 과격하고, 무모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죽음의 길로 달려가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해서는 지식인들의 책임이 크다. 그들이 하는 말과 행동은 변화를 갈망하는 중국인들에게 매우 파급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 쉽게 말을 하고 실행했다. 물론 그들의 이상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온당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언행으로 인해 희생될 동지들의 허망한 죽음을 한번쯤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기에 맨주먹으로 시위에 나서고, 허망한 죽음을 함께 맞이한다.

  하지만 루쉰이 보기에 그들은 너무나 섣불리 사람들의 잠을 깨웠다. 잠에서 깨어난 대중들이 갈 길이라고는 온갖 위험에 처하는 일과 굶어죽는 일뿐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은 대중을 깨웠다는 것이다.  

가령 여기에 한 마리의 작은 새가 있다고 합시다. 그 새는 조롱 속에선 물론 부자유합니다. 하지만 일단 조롱 밖으로 나오면 거기엔 매라든가 고양이가 있고 그밖에도 온갖 것들이 노리고 있어서 조롱 속에 크느라고 날개의 힘도 없고 나는 것도 잊어버린 처지라면 도무지 살아갈 길이 없는 게 사실입니다. 또 하나의 길이 있긴 합니다. 그것은 굶어죽는 일입니다. 그러나 굶어죽은 것은 생활과 동떨어진 일이므로 문제 삼을 것이 없습니다. 63p

 

조롱 속의 새가 과거의 인습 안에 갇혀 사는 중국인라면, 그 속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물을 접한 대중들은 우왕좌왕할 수밖에 없다. 단지 그들에게 과거의 것이 잘못되었다고만 말한다면, 이러한 지식은 죄악이 될 뿐이다. 그들은 과거가 왜 잘못되었으며, 이를 고치려면 무엇을 해야 하며, 희망찬 미래를 위해서는 무얼할지에 대한 길을 제시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구체적인 길을 제시하지 않았다. 그래서 대중들은 그 속에서 길을 잃어 고통만 받는다.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꿈에서 깨어났는데 가야 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꿈을 꾸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만약 가야 할 길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을 깨우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64p


개혁적 정치인들이 대중들을 구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고, 새로운 국가를 꿈꾸도록 하지만, 어떤 구체적 길 없이 단지 이상, 장래의 꿈만을 이야기 한다면, 그것은 대중들을 희생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루쉰은 이에 대해 현재의 꿈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장래의 꿈은 희망을 가져다주는 것 이외에는 어떤 것도 가져다주지 않는다. 단지 장래의 꿈을 위한 노력과 행동은 너무나 많은 대가를 치르게 한다. 루쉰은 아무런 방책없이 미래에 대한 희망이 만들어 놓은 허구적 결과만을 추구하는 것을 회의적으로 보았다. 미래에 대한 꿈은 꿀 수 있다. 하지만 그 꿈은 현재를 제대로 살지 않는다면 이루어질 수 없다.

 그는 중국민들에게 현재 이루어 내야만할 꿈인 구체적인 길을 제시한다. 루쉰은 몸에 밴 관습을 버릴 것을 말하며, 지금 현재의 삶을 잘 꾸려나가라고 한다. 집 나온 노라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경제, 즉 생활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오랜 중국의 관습적 사고인 남성중심주의를 타파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남녀평등과 남녀균등분배가 가능하며, 이후 여성의 경제적인 자립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또한 그는 전투의 무용함을 강조하며 일상에서 개개인의 변화를 요구한다. 루쉰에게 이 문제는 중국민의 피를 모두 뽑아, 바꿔버리고 싶다고 할 정도로 중요했다. 특히 오랜 기간 동안 가정을 지배했던 사고들을 떨쳐버리는 것에 대해 루쉰은 열변을 토한다. <나의 열절관>, <아버지로서 지금 무엇을 해야하는가>, <노라는 가출하여 어떻게 되었는가?>에서 볼 수 있듯이, 가정의 유교적 전통은 대중을 억압했다.

 특히 <나의 열절론>에서 남성의 소유물로 간주되는 전통적 여성관, 남성위주의 사회를 비판하며, 열절이라는 것은 여성의 희생만을 강조하는 기형적 도덕이라며, 이러한 관념을 없어져야 할 것이라 말한다.


최초의 의문은 불열절의 여자는 국가의 해악이냐는 것이다. 오늘날 국가가 파멸에 직면한 상태에 있다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그 원인은 모두 새로운 도덕과 새로운 학문을 등한히 한 데에 있다. 행동도 사상도 구태 의연하기 때문에 마치 고대의 난세를 연상케 하는 암흑상태가 현출된 것이다. …… 다음 의문은 왜 구세의 모든 책임이 여자에게 있는 가라는 것이다. …… 다음 의문은 그 표창에 어떤 효과가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근거 박약한 것이 왜 오늘날까지 살아남아 있는 것일까? ……… 열절이란 것은 못시 어려운 일이고 몹시 괴롭고 누구도 바라지 않으며 더구나 자타를 함께 이롭게 하지도 않으며 사회 국가에 이익이 되지도 않으며 인간의 장래를 위해서도 도무지 무의미한 행위라고. 그 존재의 활력과 가치는 오늘날 이미 상실되었다고. 16p


또한 자식에 대한 오래된 사고방식을 비판하면서, 루쉰은 먼 장래를 내다본다.

 

늙은 것은 길을 비켜주면서 젊은 것을 재촉하고 격려해서 가게 해야 한다. 도중에 구멍이 있으면 자기가 죽어 그것을 메우면서 그들을 가게 해야 한다. 젊은이는 자기를 가게 하기 위해 구멍을 메워 준 노인에게 감사해야 하며 노인도 역시 자기가 메워준 구멍 위를 지나서 앞으로 전진하는 젊은이를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그런 사정을 안다면 소년에서 장년으로, 노년으로, 죽음으로, 기쁘게 용감하게 나갈 수 있다. 그 한걸음 한걸음이 조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인간의 창출이 된다. 그것이야말로 생물계의 정도이다. 인류의 조상도 그 길을 걸어왔다. 24p


중국의 오래된 사고방식은 부부를 인륜의 시작이라고 놓는다. 루쉰은 이는 맞지 않으며, 부부는 인륜의 중간이라 말한다. 그는 부모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은 또 자식을 낳는 생명의 기나긴 길을 걸쳐 역사가 형성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생명의 길 속에서 부모는 자식에게 은혜를 베푸는 존재가 아니다. 단지 이어받은 것을 이어준다는 점에서 중개자일 뿐이다. 그러니 어른이 아이보다 중요시 여겨져야 근거는 없다. 루쉰에게 있어 혁명이나 변화는 이러한 과정에서 생겨난다. 조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인간형의 창출은 이런 과정 속에 있다. 그런데 중국의 구습은 연속적인 역사의 길을 자꾸 방해한다. 이러한 후퇴는 부모들이 자신들의 권리만을 강조하고, 아이들에 대한 의무를 소홀히 하는 뿌리깊은 구습으로 인해 아이들은 언제나 희생당하며, 사회의 진보를 위한 중개자로서 성장하지 못하기에 생겨난다. 루쉰은 이것이 자연계의 질서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사회의 진보를 막는 원인으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여기에 부모의 역할이 매우 중요한 것이다. 부모가 자식을 억압하고, 희생시킨다면 남는 것은 과거뿐이며, 미래는 없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잘 낳아, 튼튼하게 기르고, 그들을 해방시켜야 한다.

이렇듯 루쉰은 중국민에게 미래의 희망을 앞세우려 하지 않았고, 그들 뼈 속 깊이 자리잡은 오랜된 인습을 고치려했다.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것부터 실행에 옮기라고 말한다. 경제적 능력을 갖추라는 것, 부모는 자식의 앞길을 막지 말라는 당부, 남녀 평등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 한다는 것 등등.. 루쉰은 하나같이 사소한 것들을 말한다. 저기 청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자는 말 대신에 말이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루쉰2010. 9. 5. 13:11

루쉰<죽은 자 살리기>  희사
                                                                                          stock photo : A friendly skeleton leans on a gravestone. The gravestone was left blank so you can add your own message - 3D render.

 

  여기에 대단한 사람이 한 명있다. 그 사람은 위대한 철학자이며 죽은 자마저 살릴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 그의 말 버릇은 산 것이 곧 죽은 것이고, 죽은 것이 곧 산 것”이다. 그는 철학으로 죽음까지 극복한 사람인 보인다. 그의 이름은 장자이다.

  어느 날 그는 물웅덩이에서 하나의 해골을 발견한다. 그는 사명대신(司名大神)에게 부모 처자가 있을 것인데, 이 곳에서 죽었으니 오호 애재라, 대단히 불쌍”하니 이 사람을 되살려 달라고 부탁한다. 한 번은 거절한 사명대신도 장자의 말솜씨에 넘어가 그 해골을 되살리기로 한다

 
 그런데 장자는 왜 죽은 자를 일부로 되살릴 필요가 있었을까
? 그가 사명대신을 부르려고 했을 때 망자들이 나타나서 그에게 말한다. “장주야. 이 바보 같은 놈아! 수염이 반백이 되었는데도 아직 생각이 트이지 못하다니. (중략) 쓸데 없는 참견은 그만두고 빨리 초나라로 가서 유세나 하도록 해라…….


  그렇다
. 그는 자신의 철학을 늘어놓으면서 부탁하지도 않는 죽은 자를 되살리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게 그렇게 쉬운 일인가? 죽음은 하나의 생명의 결정적인 순간이다. 죽음은 오직 그 사람에게만 속하는 것임으로 절대 타자가—게다가 알고 있지도 않는 사람이—끼어들면 안될 것인데 말이다. 그러나 장자는 죽은 자를 건들인다. 죽음에서 깨어난 남자에게 장자가 말을 걷는다. “당신은 어느 시대 사람이요?” 그 알몸의 남자는 500년전의 상조(商朝)시대의 사람이었다. 그는 친척 집에 가는 길에 강도를 당해 죽은 것이었다. 장자의 얘기를 이해할 수 없는 남자는 그것보다도 빨리 자신의 옷과 물건을 돌려주라고 한다. 당신이라는 사람은 정말 도리는 모르는군장자는 싫증을 내면서 말한다. 당신은 원래 해골이었는데 내가 불상히 여겨 사명대신에게 실려주기를 부탁했었소. 생각해 보시오. 당신은 죽은 지 이렇게 오랜 세월이 되었는데 어디에 아직 옷이 있겠소! 나는 지금 당신에게 사례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니 감깐 앉아서 나와 주왕의 시대에 대해 이야기 좀 합시다” 그러나 남자도 그냥 참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난 몰라요. 당신에게 정말로 그런 능력이 있다 한들 무슨 가치가 있소? 나를 벌거숭이로 만들어놓고, 살려준다 한들 또 무슨 소용이 있소? 나더러 어떻개 친척을 찾아가란 말이오? (중략) 이 곳엔 당신 외에는 없었으니 당연히 당신에게 내라고 해야겠소.” 옷이 없으면 살 수 없으니 옷을 달라고 하는 남자에게 장자는 자신의 철학을 설명해 준다. 옷이 있는 것이 옳은 것인지도 모르겠고, 옷이 없는 것이 옳은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하면서.


  싸우고 있는 둘을 경찰이 발견한다
. 그러나 처음에는 장자를 잡으려고 한 경찰도 그가 그 유명한 장자 어르신네라고 알게 되자마자 태도를 싹 바꾼다.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떠나려고 하는 장자에게 남자는 외친다. “당신이 가 버리면, 나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난 어쩌란 말입니까?” 그러나 장자는 ‘초왕을 만나러 가야 하니’ 옷 하장도 안 준 채 가 버린다. “나는 어떻게 해요?” 죽음에서 되살아난 남자는 경찰에게 묻는다. “당신이 그 사람을 놓아주고, 지금은 당신마저 도망치려 하니, 나는 당신을 붙들고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소. (중략) 여보시오. 나더러 어떻게 살아가란 말이오!



  이 소설에서는 자신의 철학과 힘을 갖고 있는 장자의 세게관과 그런것과 상관이 없이 살아온
500년 전의 남자의 세계관이 충돌한다. 그런데 무서운 것은 장자가 남자에 비해 상당히 많은 힘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사명대신 설득할 있는 철학을 갖고 있고, 사람을 되살릴 있기까지 한다. 경찰은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그는 왕을 만나기도 한다. 장자의 . 그런데 장자는 남자에게 장의 옷도 주지 못하는가? 자기가 되살린 남자를 버리고 결국 도망가 버리는가?

 

  장자까지는 아니지만 우리도 자기도 모르게 많은 힘을 갖고 있다. 사람은 맺날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산다. 자기가 던지는 마디 마디가 상대방에게 생각지도 못한 영향을 수도 있는 것이다. 거짓된 희망을 수도 있고, 혼란에 빠뜨릴 수도 있다. 죽음에서 깨어난 남자처럼 자신의 세계에 있던 사람을 억지로 깨우고 다른 세계로 던져 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자기는 사람에게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만약 사람이 다시 자기가 원래 있던 세계로 돌아갈 없었다면, 그것 때문에 중대한 결정을 해버렸다면 우리는 어떻게 것인가

 

  망령들은 장자에게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자신의 일에나 전념하라고 했다. 모든 사람은 자기만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같다. 지금 거기서 안정돼 있는 사람을 깨우는 것은  자칫하면 아주 나쁘게 작용될 수도 있다. 우연한 마주침으로 인한 예상치 못하는 파괴와 살림이 우리의 일상이라면 우리는 속에서 무엇을 믿고 살아가는가? 장자는 무엇을 믿었길래 남자를 살렸는가? 작품에는 장자의 믿음이 보인다. 힘은 있되 믿음이 없는 인간---그것이 장자이며 대부분의 사람의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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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루쉰2010. 8. 31. 02:40
 

그 복수라는 것.

정 철 현


미간척의 복수

 미간척은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한다.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차라리 일어날까 생각해보았다. 475p


그날 그는 어머니로부터 아버지의 원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복수를 다짐했었다. 그의 아버지는 칼을 만드는 명인이었다. 아버지는 왕으로부터 받은 신비한 쇳덩이로 칼을 만들었고, 이를 왕에게 진상하러 갔지만, 자신이 만든 칼로 죽임을 당한다. 의심이 많은 왕은 그가 진상한 칼보다 더 좋은 칼이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하려고 그를 죽인 것이다. 하지만 미간척의 아버지는 이를 미리 알고, 그 쇳덩이를 나누어 또 다른 검을 만들어 숨기고 황궁으로 떠났다. 미간척의 아버지가 죽고 난 후 16년이 흘러 미간척이 청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그에게 아버지의 원수에 대해 말했던 것이다. 미간척은 어머니의 말에 따라 숨겨둔 검을 찾아서, 원수를 갚겠노라고 다짐한다.

 하지만 그는 본디 우유부단하며, 소심하고, 여린 성격의 소유자였다. 아버지의 비운과 원수에 대해 듣고 나니, 그는 왕에 대한 복수심이 불타올랐다. 하지만 막상 원수를 갚을 생각을 하니 걱정스러웠나 보다. 그는 아무 걱정거리가 없다는 듯이 자리에 누워 잠을 자고 새벽에 일어나, 태연히 원수를 찾아가리라 결심했지만, 그렇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던 것이다. 하기야 그는 쥐를 보고도 어찌할 바를 모를 정도의 성격이었는데, 원수를 갚을 생각을 하니 잠이 올 리가 없다.

 어머니는 그의 이런 성격이 마음에 썩 내키지 않았다. 그가 쥐와 한바탕 씨름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원수를 갚겠다고 떠나기 전날 밤 그가 뒤척이는 모습을 보고 어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쥐를 미워했다가 다시 불쌍해하고, 살려주었다가, 자신도 모르게 쥐를 밟아 죽여버리고 괴로워하는 그의 모습에서 우유부단하고 소심한 성격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불구대천의 원수를 갚으려면 용기와 결단력이 있어야 하는데, 미간척의 이런 성격으로는 원수를 갚기는커녕, 목숨만 잃게 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미간척은 밤새 울었는지, 아니면 피곤해서 그런건지 눈이 퉁퉁 부은 채, 대문을 나선다. 푸른 옷에 푸른 검을 메고, 큼직한 발걸음으로 성 안을 향해 줄달음치는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다. 보통 무협소설에서 원수를 갚으러 가는 검객들을 보면, 비장함과 증오감으로 오랜 세월을 감내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극에 달해 오히려 그를 차분하고 살기 넘치게 한다. 그리곤 원수를 찾아가 조심성 있게,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를 베어버린다. 하지만 미간척은 어머니에게 느닷없이 아버지의 원수에 대해 들었던 탓일까? 오랜 시간의 준비도 없었고 치밀하지 못하고 뭔가 불안해 보인다.

 길거리의 왕의 행차 때, 무조건 달려들 생각을 한다. 무모한 발상이다. 보통 치밀한 검객들은 그렇게 원수를 갚지 않는다. 미간척은 앞뒤 재지 않고 왕에게 달려들다 왕의 행차에 절을 하고 있는 누군가의 손에 걸려 넘어진다. 검객 체면을 다 구기는 일이다. 다행히도 그의 의도는 들통나지 않아서, 다음 기회를 도모하고자 한다. 그러나 역시 정신 못차리고 왕이 오는 길목에서 왕을 기다리고자 한다. 과연 그에게 원수를 갚을 기회나 오련지.

 그가 성 밖으로 나가 이제나저제나 왕을 기다리지만 날은 어두워지고 그는 불안하기만 하다. 그런데 그 때 어떤 사람이 국왕이 자신을 잡으려하고 있다며 소리를 지르며 뛰어나오는 사람이 있었다. 미간척은 그를 따라가서 자신을 아냐고 묻는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하며 자신이 대신 원수를 갚아주겠노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의 목과 검을 내놓으라고 말한다.

 그는 원수를 갚을 능력조차 없는 미간척에게 하늘이 내려준 선물인 것인지, 아니면 칼과 그의 목숨을 탐내는 자인지는 모르지만, 미간척은 자신의 목과 검을 그에게 내놓는다. 그 후, 그 사나이, 연자오자는 미간척의 원수를 대신 갚아준다.

루쉰의 복수

 그런데 연자오자가 미간척의 복수를 대신 갚아주는 장면은 『납함』의 <토끼와 고양이>에서 나오는 주인공, 쉰의 행동과 유사해 보인다. 고양이에게 생명을 빼앗긴 그 어린 생명들을 생각하며, 주인공은 그들을 대신하여 복수를 하기 위해 청산가리 병을 들려한다. 쉰과 비슷하게 <미간척의 복수>에서 연자오자는 미간척의 원수를 대신 갚아주려 한다. 여기서 쉰과 연자오자의 행동은 루쉰이 하고자 하는 행동이 아니었을까? 유약한 자들을 대신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복수를 대신해주기가 그것이다. 토끼는 매우 약한 존재고, 미간척 또한 복수조차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유약한 어린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쉰이 대신 복수해주고자 하지만 그리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토끼는 이미 죽었고, 미간척 또한 자신의 목을 내놓았다. 그렇게 모두들 죽고 난 후에 복수를 해야만 한다. 

 소설 속에서 연자오자는 미간척에게 이런 말을 한다.

 의협, 동정, 그런 것들은 예전에는 깨끗했었지만 이제는 모두가 고리대금업자의 자본으로 변했단다. 내 마음속에는 네가 말하는 것들은 전혀 없단다. 나는 단지 너를 위해 복수를 해줄 뿐이야! 479P


 너는 아직 모르는가 보구나, 내가 얼마나 복수의 명인가를. 너의 원수가 바로 나의 원수이고, 그가 또한 바로 나 자신인 것이다. 내 영혼에는 그토록 많은 것이 있다. 남과 내가 입힌 상처말이다. 나는 이미 나 자신을 증오하고 있다. 480P


이 말은 루쉰이 하고 싶은 말이 아니었을까? 복수하고자하는 마음은 정의심이나 동정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단지 고양이나 왕과 같이 약한자를 무참히 짓밟아버리는 자들에 대한 치밀어 오르는 분노 때문이다. 그래서 미간척의 원수가 나의 원수가 되는 것이다. 그는 이런 면에서 복수의 화신이고 명인이다. 하지만 복수를 하고 살기어린 증오감을 내뿜는 자신을 보며, 자신 또한 자신이 그토록 미워하는 자들과 별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미간척의 원수가 루쉰의 원수이고, 그 원수 또한 루쉰 자신인 것이다. 자신 속에 자리잡고 있는 남과 나를 상처 입힌 분노와 증오가 루쉰의 또 다른 원수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 자신을 보며 증오감을 표출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루쉰은 약함들을 억누르는 그 강함을 보고 극단의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다.

진정한 복수

연자오자는 왕 앞에서 미간척의 머리로 신기한 요술을 부린다. 금 솥에 미간척의 머리를 넣고 그것을 위 아래로 왔다갔다하며, 노래를 부르게 하는 요술이었다. 그는 이 요술로 왕을 솥 근처로 유인하고, 왕의 목을 순식간에 그 푸른 검으로 친다. 왕의 머리는 금솥으로 떨어져서 미간척의 머리와 물어 뜯기고 뜯기는 혈투를 벌이게 된다. 연자오자는 미간척에게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었던 것이다. 유약한 미간척은 그런 식으로 밖에 복수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유약한 미간척은 그 속에서도 왕에게 당하기만 한다. 연자오자 또한 스스로 목을 베고 금 솥 속으로 자신의 머리를 집어넣는다. 그리고는 미간척의 싸움을 돕는다. 그러다 그들은 어느 새 누군지 분간할 수 없는 세 개의 백골이 된다. 아무도 누가 왕인지 미간척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참을 수 없는 극단의 증오와 분노는 그 세 사람을 합쳐버려 하나가 되게 한다. 복수를 하고자하는 극단의 감정은 한 사람의 신체와 마음을 바꾸어 놓는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를 죽이기 위해서 말이다. 그 감정은 순간의 것이 아니다. 계속 지속되며, 몸과 마음에 새겨지는 감정일 것이다. 그 몸과 마음은 온통 그에게 향해 있다. 그를 죽이는 순간, 이제 나는 없다. 복수를 위해 살아왔던 나는 그 원수가 없다면 살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 복수를 감행하던 사람들은 그 복수가 끝난 후 죽는 것이 아닐까? 복수는 최소한 이정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신을 오로지 바쳐 누군가를 증오하기, 증오의 감정이 극단에 다달아 나도 없고, 너도 없는 이판사판의 지경의 이르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복수의 경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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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루쉰2010. 8. 28. 01:56

클립과 자석

자석 가까이에 있는 클립은 자석 쪽으로 끌려간다. 클립은 자석 덕분에 나아갈 수 있다. 아니, 클립은 끌려가는 것에 불과하다. 자석이 있는 곳으로 갈 수 밖에 없으니까. 아, 그래도 클립은 자석 덕에 나아갈 수 있다. 끌려가는 걸 포기한 다면 나아갈 수조차 없다.

꿈을 꾼다는 것.

그는 행복한 가정을 떠올려야만 했다. 그가 쓰고 있는 작품의 제목이 ‘행복한 가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작품 속에 평소에 바라던 것을 쭈욱 적어나간다. ‘이것만 있으면 행복한 가정이 될 거 같은데’ 하고 꿈꿔왔던 것들이다. 그런데 그가 고른 것들은 당시에 각광받기 시작한 세련된 것들이다. 자유결혼, 부부사이의 평등을 약조하는 조약, 서양 유학, 문학에 대한 깊은 조예 등등, 젊은 감각을 갖은 사람들이라면 한번쯤은 꿈꿔봤을 것들이다. 우리에게도 그런 것 하나는 있지 않은가? 유행하는 것들 말이다. 유행하는 것이라는 말은 일반적인 경향이라는 것만을 의미한다. 누구나 다 그 취향에 동의하는 건 아니다. 그가 살던 시대에 보수적인 누군가는 자유결혼이나 남녀평등에 치를 떨었을지 모른다. 또 그 취향이라는 게 그리 바람직하지 않은 거일 수도 있다. 서양 유학을 다녀왔고 문학에 대한 깊은 조예가 있더라도 가정이 행복할 거라는 보장을 어떻게 하겠는가. 그리고 그렇지 않다고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또 어떻게 하겠는가. 그것은 단지 그 시대에 유행했던 취향일 뿐이다. 왜 유행했는지, 그게 바람직했는지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될 것은 때로는 정말 그 유행에 진지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꿈을 꾸는데 익숙하다.


그 꿈이 구체적이고 확고한 것은 아니지만, 하루, 하루의 일상에서부터 인생 전체에 이르기 까지, 가정을 꾸리는 것, 공부를 해나가는 것 모두에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가지고 산다. 그런데 그의 ‘행복한 가정’이 말해주듯 우리가 꿈을 꾼다는 것은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를 갈망하는 것과는 다르다. 우리는 원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이고, 불변의 것, 이상적인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 두려움과 불안함, 막연함이 우리를 꿈꾸게 이끌기도 한다. 남들이 다 한다는 걸 보증삼아 위안을 얻으려고 하는 경우가 그렇다. 뭔가 목표가 있다는 것에, 그것도 남들도 다 갖는 목표라는 것에 큰 위안을 삼고 살아가게 된다. 욕망에 의해 뭔가를 꿈꾸기도 한다. 마음속에서 원하는 것을 꿈꾸는 경우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의사’가 되고 싶어 하는 거, ‘공무원’이 되고 싶어 하는 거, ‘아이돌 가수’가 되고 싶어 하는 거 같은 예를 생각해보자. 한국이 아닌 다른 곳, 예를 들어 아프리카 초원에서 이었다면 ‘공무원’이 되기를 바랐을까? 혹은 조선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가수’가 되기를 바랐을까? 이런 것들을 꿈꾸는 것이 한국사회와 무관하다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입된 것을 꿈꾸는 거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뭔가를 꿈꾼다는 것은 그리 아름다운 얘기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불안감과 막연함, 그리고 주입된 환상이 있었다.

그 결코 ‘능동적’이지 못 한 것이 그래도 인간조건인 이유는 우리에게 그것만큼 추진력을 제공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수동적’이긴 하지만 우리는 꿈꾸는 내용에 있어서만큼은 진지하다. 불안감에 의해서면 불안한 만큼, 욕망에 의해서면 욕망하는 만큼 우리는 꿈을 진지하게 여긴다. ‘능동적’이었냐 ‘수동적’이었냐 와는 별개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꿈은 우리의 삶의 추진력을 제공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추진력은 불안감 혹은 외부에서 주입된 환상에 의해 생긴 것이다. 아, 그렇다면 우리는 꿈을 꾸며 이 ‘수동적’인 삶을 계속 나아가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꿈을 버리고 추진력마저 잃어야 하는 것일까? 클립은 자석에 끌려서라도 앞으로 나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자석에 끌리기를 포기하며 나아가기조차 포기해야 하는 걸까?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루쉰2010. 8. 20. 10:50

 

  두 사람이 사랑하여 하나가 된다. 함께라는 것은 '너'와 '나', 두 개의 단어가 아닌 '우리'라는 하나의 단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혼이라든가 하는 제도 하에서의 얘기만은 아니다. 두 사람이 함께함으로써 생기는 여러가지의 '공유'가 있다. 나는 그 공유가 '우리'라는 단어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말과 육체, 시간과 공간, 사물과 인간 관계가 모두 두 사람 공통의 것이 된다.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는 연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을 공유한다는건 어떤 의미인가? 그로 인해 생기는 고난마저도 공유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많은 연인들이 고난의 공유만큼은 견디지 못하고 다시 혼자가 되곤 한다.

  루쉰의 소설 「죽음을 슬퍼하며」에 나오는 두 사람, 주인공과 쯔쥔에게서도 이러한 관계를 볼 수 있다. 그들은 서로 깊이 사랑하여 당시 사회적 풍조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마저도 무시하고 마침내 함께 살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서로의 고난을 함께하게 되고 그에 대한 책임이 생기게 된다. 그 전에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연애에 머무를 때는(주인공이 살던 '회관의 낡은 방'으로 대변되는 시절) 서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그러나 '삶'을 같이 한다는 것은 결코 행복하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고난은 처음에 방을 구할 때부터 시작해서 마침내 주인공이 실직하게 되면서 더욱 더 심하게 치닫는다. 이것은 누구 한 쪽의 탓이라고 할 수도 없고 둘 중 한 명만 영향을 받을 수도 없는 일이다. 서로간에 책임이 있다는 말은 이런 의미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자연스레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쯔쥔과의 관계가 자신을 얽매고 있다고 말이다. '나는 아직 나의 날갯짓을 망각하기 전에 저 새로운 광활한 하늘을 날고자 했다.(p.402)' 주인공은 거듭해서 이러한 서술을 한다. 이것은 처음에는 해고를 당하고 난 뒤 사무실의 답답한 생활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자신의 재능을 펼쳐보겠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나중에 가면 자신을 얽매는 현실의 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뜻으로 읽힌다. 결국 주인공은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된다. 내가 잘 살기 위해서는 쯔쥔과 결별해야 한다고. 그러나 주인공은 결코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쯔쥔에게 이야기 할 때는 '함께 멸망하는 것을 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새로운 생활을 재건해야 한다(p.411)'고 말한다. 길게 보았을 때 주인공에게는 결별이 더 나은 삶을 가져올 지도 모른다. 그러나 쯔쥔은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운명은 이미 내가 준 진실로 결정되었다. ― 사랑 없는 인간은 사멸하고 만다.(p.417)' 그런 점에서 이러한 서술은 화가 날 정도로 뻔뻔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모든 갈등에서 주인공은 결별을 위한 더욱 확실한 사유를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스스로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기까지 이른다. 그리고 쯔쥔에게 그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한다. 사실 이만큼 확실한 사유는 있을 수가 없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람을 무슨 방법으로 잡아두겠는가? 쯔쥔은 얼마 뒤 집을 떠나고 만다. 이것은 물론 '함께 멸망하지 않으려고' 헤어진다는 주인공의 말보다는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때문에 내린 결정일 것이다. 쯔쥔이 떠나자 주인공은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진실을 말해버렸다면서 후회한다. '내가 허위의 무거운 짐을 짊어질 용기가 없었던 탓으로 도리어 그녀에게 진실의 무거운 짐을 지웠다.(p.416)' 하지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위인가?

  주인공의 말에 따르면 '결별하는 것이 서로가 잘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이 두 가지가 그가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진실이다. 결별이 서로에게 좋다는 것은 사실 어디까지나 주인공의 생각, 즉 주인공의 진실이다. 쯔쥔의 진실은 또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두고 자신이 쯔쥔에게 너무 성급하게 진실을 일깨워 주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자신의 학식에 대한 자만심과 쯔쥔에 대한 무시가 섞여있는 태도이다. '쯔쥔의 공로는 완전히 이 식사에 세워지고 있는 듯했다(p.403)'라는 말에서는 그녀를 무시하는 태도가 극에 달한다. 쯔쥔은 그저 밥 밖에 할 줄 모르고, 밥을 먹으라고 닦달함으로써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존재인 것이다. 주인공이 애초에 쯔쥔을 자신과 동등하게 보지 않는 상태에서 그녀에게 사랑과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치가 맞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가 쯔쥔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어떤가?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진실이니 허위이니를 가리기가 어렵다. 주인공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이 진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연인이든 한 번 쯤은 자신이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잠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인 경우도 있고, 아니면 주인공처럼 거의 확신으로 자리잡는 경우도 있다. 둘 중 어느 쪽도 진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허위'라고 말할 수가 있는가? 어떤 생각이 들었을 때 그것을 그대로 좇아 행동해야만 진실이고, 그 생각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허위라는 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노력 또한 간절하고 커다란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에게 정말 허위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진실을 행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합리화이며 자기 위안이 되기도 한다.

  나는 주인공의 결정 자체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함께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그것이 전부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선택과 그에 따르는 결과는 그 사람의 몫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자신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가를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는 스스로가 비겁자라고 인정하는 체 하지만, 사실은 아직도 비겁자가 되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가 비겁자가 되는 순간은 쯔쥔을 떠나던 때가 아니었다. 그에 대한 궤변을 늘어놓는 순간에 비겁자가 된 것이다. 그가 쯔쥔을 정말로 생각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솔직했어야 했다. 쯔쥔을 어설프게 위하는 식으로 얘기를 하는 것은 죽은 그녀에게 더욱 상처만 주는 일이다. 주인공은 바로 이 글을 씀으로써, 한 때 함께였던 사람에 대한 마지막 예우마저도 무너뜨린 것이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