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story/루쉰2010. 8. 20. 10:50

 

  두 사람이 사랑하여 하나가 된다. 함께라는 것은 '너'와 '나', 두 개의 단어가 아닌 '우리'라는 하나의 단어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결혼이라든가 하는 제도 하에서의 얘기만은 아니다. 두 사람이 함께함으로써 생기는 여러가지의 '공유'가 있다. 나는 그 공유가 '우리'라는 단어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말과 육체, 시간과 공간, 사물과 인간 관계가 모두 두 사람 공통의 것이 된다.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주는 연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 모든 것을 공유한다는건 어떤 의미인가? 그로 인해 생기는 고난마저도 공유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많은 연인들이 고난의 공유만큼은 견디지 못하고 다시 혼자가 되곤 한다.

  루쉰의 소설 「죽음을 슬퍼하며」에 나오는 두 사람, 주인공과 쯔쥔에게서도 이러한 관계를 볼 수 있다. 그들은 서로 깊이 사랑하여 당시 사회적 풍조나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마저도 무시하고 마침내 함께 살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서로의 고난을 함께하게 되고 그에 대한 책임이 생기게 된다. 그 전에 두 사람의 관계가 단순한 연애에 머무를 때는(주인공이 살던 '회관의 낡은 방'으로 대변되는 시절) 서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그저 행복하기만 했다. 그러나 '삶'을 같이 한다는 것은 결코 행복하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그들의 고난은 처음에 방을 구할 때부터 시작해서 마침내 주인공이 실직하게 되면서 더욱 더 심하게 치닫는다. 이것은 누구 한 쪽의 탓이라고 할 수도 없고 둘 중 한 명만 영향을 받을 수도 없는 일이다. 서로간에 책임이 있다는 말은 이런 의미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자연스레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쯔쥔과의 관계가 자신을 얽매고 있다고 말이다. '나는 아직 나의 날갯짓을 망각하기 전에 저 새로운 광활한 하늘을 날고자 했다.(p.402)' 주인공은 거듭해서 이러한 서술을 한다. 이것은 처음에는 해고를 당하고 난 뒤 사무실의 답답한 생활로부터 벗어나 비로소 자신의 재능을 펼쳐보겠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나중에 가면 자신을 얽매는 현실의 짐으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뜻으로 읽힌다. 결국 주인공은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된다. 내가 잘 살기 위해서는 쯔쥔과 결별해야 한다고. 그러나 주인공은 결코 이기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쯔쥔에게 이야기 할 때는 '함께 멸망하는 것을 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새로운 생활을 재건해야 한다(p.411)'고 말한다. 길게 보았을 때 주인공에게는 결별이 더 나은 삶을 가져올 지도 모른다. 그러나 쯔쥔은 그렇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녀의 운명은 이미 내가 준 진실로 결정되었다. ― 사랑 없는 인간은 사멸하고 만다.(p.417)' 그런 점에서 이러한 서술은 화가 날 정도로 뻔뻔하기까지 하다.

  이러한 모든 갈등에서 주인공은 결별을 위한 더욱 확실한 사유를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스스로 '나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하기까지 이른다. 그리고 쯔쥔에게 그것을 확실하게 이야기한다. 사실 이만큼 확실한 사유는 있을 수가 없다.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람을 무슨 방법으로 잡아두겠는가? 쯔쥔은 얼마 뒤 집을 떠나고 만다. 이것은 물론 '함께 멸망하지 않으려고' 헤어진다는 주인공의 말보다는 더 이상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 때문에 내린 결정일 것이다. 쯔쥔이 떠나자 주인공은 자신이 너무 성급하게 진실을 말해버렸다면서 후회한다. '내가 허위의 무거운 짐을 짊어질 용기가 없었던 탓으로 도리어 그녀에게 진실의 무거운 짐을 지웠다.(p.416)' 하지만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위인가?

  주인공의 말에 따르면 '결별하는 것이 서로가 잘 살 수 있는 길이라는 것', 그리고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이 두 가지가 그가 말할 수 밖에 없었던 진실이다. 결별이 서로에게 좋다는 것은 사실 어디까지나 주인공의 생각, 즉 주인공의 진실이다. 쯔쥔의 진실은 또 달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를 두고 자신이 쯔쥔에게 너무 성급하게 진실을 일깨워 주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자신의 학식에 대한 자만심과 쯔쥔에 대한 무시가 섞여있는 태도이다. '쯔쥔의 공로는 완전히 이 식사에 세워지고 있는 듯했다(p.403)'라는 말에서는 그녀를 무시하는 태도가 극에 달한다. 쯔쥔은 그저 밥 밖에 할 줄 모르고, 밥을 먹으라고 닦달함으로써 자신의 일을 방해하는 존재인 것이다. 주인공이 애초에 쯔쥔을 자신과 동등하게 보지 않는 상태에서 그녀에게 사랑과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이치가 맞지 않는 일이다.

  그렇다면 그가 쯔쥔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어떤가? 사실 여기에 대해서는 진실이니 허위이니를 가리기가 어렵다. 주인공 스스로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것이 진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떤 연인이든 한 번 쯤은 자신이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게 되지 않을까? 그것이 잠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인 경우도 있고, 아니면 주인공처럼 거의 확신으로 자리잡는 경우도 있다. 둘 중 어느 쪽도 진실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대로, 그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허위'라고 말할 수가 있는가? 어떤 생각이 들었을 때 그것을 그대로 좇아 행동해야만 진실이고, 그 생각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허위라는 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한 노력 또한 간절하고 커다란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 주인공에게 정말 허위가 있다면, 그것은 자신이 어쩔 수 없이 '진실을 행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합리화이며 자기 위안이 되기도 한다.

  나는 주인공의 결정 자체를 비난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함께라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에 따라서 그것이 전부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선택과 그에 따르는 결과는 그 사람의 몫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자신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가를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는 스스로가 비겁자라고 인정하는 체 하지만, 사실은 아직도 비겁자가 되기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가 비겁자가 되는 순간은 쯔쥔을 떠나던 때가 아니었다. 그에 대한 궤변을 늘어놓는 순간에 비겁자가 된 것이다. 그가 쯔쥔을 정말로 생각한다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솔직했어야 했다. 쯔쥔을 어설프게 위하는 식으로 얘기를 하는 것은 죽은 그녀에게 더욱 상처만 주는 일이다. 주인공은 바로 이 글을 씀으로써, 한 때 함께였던 사람에 대한 마지막 예우마저도 무너뜨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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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루쉰2010. 8. 19. 02:59

2NE곰  루쉰 소설집 『방황』

루쉰, 오 마이 라이팅!(Oh, my wri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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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골 서늘한 일상의 ‘침공’

  한 작가가 ‘행복한 가정’이라는 주제로 소설을 쓴다. 그 소설에는 매우 세련된 부부 한 쌍이 등장한다. 작가는 고상하고 우아한 주인공들의 삶을 하나하나 구상해본다. 그런데 소설 구상이 쉽지만은 않다. 안타깝게도 그의 구상은 단지 상상, 가정뿐이기 때문이다. 그가 쓰고자 했던 행복한 가정은 처음부터 ‘가정’에서 시작된다. 주인공들이 살고 있는 도시 조차 정할 수 없다. 그저 A시이다. 당시 중국의 도시 중에서는 ‘현실적’으로 작가가 구상하는 행복한 가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은 한 번도 읽지 않은 책이지만, 교수들이 좋게 평가했다는 이유만으로 주인공들에게 『이상적인 남편』을 읽히고, 진귀한 요리를 먹게 한다. "My dear, please." 느끼한 영어로 서로에게 뱀장어를 권하는 부부라니.
  소설은 어찌어찌 진행된다고 해도 더 큰 문제가 그를 괴롭힌다. 그것은 바로 소설 속 행복한 가정과는 정반대인 그의 일상, 현실이다. 소설을 구상해나가면서 일상의 언어들은 그의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장작 스물다섯 근, 오오는 이십오. 떨어진 장작을 사는 일이 그의 머릿속에서 계속 맴돈다. 그러나 일상이 글 속으로 ‘침투’하려 할수록, 오히려 소설은 작가의 일상에서 점점 더 멀어진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다. 즉, 그는 그의 일상을 하나하나 지워나가며 글을 구상해나가는 것이다. 그는 그의 일상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가령 책장 옆 배추더미라든지, 늘 열려있는 서재 문과는 정반대의 ‘행복한’ 세계를 소설 속에서 구현해낸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일상의 침투는 ‘침공’으로 바뀌어 그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든다. 그는 자신이 쓰려는 ‘행복한 가정’과 배치되는 자신의 현실을 마주 할 때마다, 허리에 바늘이 박히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 스릴러 영화에 나오는 살인마처럼 일상은 그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아내가 아이를 때리는 ‘찰싹’소리,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를 현실세계로 돌아오게 만든다. 결국 그는 자신의 현실과 소설 사이의 괴리를 참지 못하고 원고지를 찢어버리고는 그것으로 아이의 눈물과 콧물을 닦아 준다.

현실은 시궁창, 글쓰기 그리고 루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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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쓰다보면 현실은 시궁창이지만, 손으로는 젖과 꿀이 흐르고 무지개가 뜨는 낙원을 그릴 때가 있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러하다. 내 손으로 쳐내려간 활자들이지만, 나의 일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 그러려니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가끔은 짜증이 밀려오기도 한다. 영어발음 굴려가며 맛있게 먹을 뱀장어를 집어 올렸는데, 뭣도 아닌 현실이 내 허리를 콕콕 찌르고, 순간 놀라 뱀장어를 떨어뜨린다. 떨어진 뱀장어가 능글맞게 웃으며, 네 현실이나 돌아보라 한다. 내가 그려내는 글 속의 세계는 위풍당당하게 미래와 희망을 이야기하며,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뚜벅 뚜벅 나아간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의 일상은 여전히 글과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사실 글과는 달리 나는 전혀 나아가고 있지 못하며, 그렇다고 희망적이 되고 싶은지 그 조차도 잘 모르겠다. 내 글 속에는 희망으로 향하는 너무나 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들이 등장하지만, 정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은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차라리 글을 쓰지 않는다면 좀 더 마음이 편해질까? 더 이상 그 평행선, 뱀장어의 비웃는 얼굴을 떠올릴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루쉰의 소설, 잡문을 읽다보면, 현실 속 자신과 그의 글 사이에서 고민하는 루쉰을 마주할 때가 있다. 그는 변화와 희망을 얘기하지만, 동시에 누구보다도 회의하고 절망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는 그런 그의 글을 “가면 속 외침”이라고 한다. 나는 나의 또 다른 글에서 루쉰 스스로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괴리, 모순을 직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자신의 인생을 직시한다는 것, 그 비참함을 안고 한 시대를 살아낸 ‘인간 루쉰’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나 내가 루쉰을 이렇게 받아들여 글을 쓰는 것과 나의 일상 사이에는 무엇이 놓여 있는 것인가. 루쉰을 위대하다고 ‘쓰는 나’는 오히려 루쉰을 쓰는 행위를 통해서 그를 밀어냈던 것은 아닐까. 루쉰이라는 화살이 내 일상, 현실에 닿지 못하도록 글을 방패삼아 막아내며 말이다.
  소설「행복한 가정」속에서 원고를 찢어버린 작가의 눈앞에 “여섯 포기의 배추더미”가 우뚝 서있다. 루쉰이 직시했던 것은 바로 이 우뚝 서있는(아마 우뚝 서있어 피할 수 없는) 일상이었을 것이다. 오, 마이 루쉰. 오, 마이 라이팅! 아직은 나지막하게 탄식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언젠가 나 또한 원고지를 구겨버리고 ‘무언가’를 마주해야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미 그 배추더미의 실체를 어느 정도 마주해버렸다. 시궁창인 현실과 쉽게 바뀌지 않는 시궁창의 그 끈질긴 관성. 지금 이 순간에도 무의식적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타이핑했다 지우고를 반복하는 나의 글, 나의 현실. 그래서 이번만큼은 시궁창의 관성에 지배당하기 전에 희망찬 ‘그럼에도’가 아닌 ‘오, 마이’의 절규로 끝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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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story/루쉰2010. 8. 14. 22:26

-사람이 사람을 먹는,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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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인(食人)’의 공포에 사로잡힌 남자의 이야기


루쉰의
<광인일기>는 어는 피해망상병을 앓은 남자의 이야기다. “오늘 밤은 참 달이 밝다(루쉰 소설전집,P12)”. 일기는 맑게 갠 밤 하늘에 뜨는 달의 묘사부터 시작된다. 캄캄한 어두움 속에서 달은 맑은 빛을 던져온다. 남자는 혼자 하늘의 빛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는 생각한다. “어다까지나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P12)”.

 

 

남자의 병은 사람들이 자기를 잡아먹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피해망상이다. 밖에 나가면 모든 인간이 해치려는 이상한 눈초리로(P13)” 자기를 째려보고 있다. 길거리에서는 여자가 너를 물어뜯어 놓겠다!(P14)”라고 소리를 치르고 있다. 집에 소작인이 오면 맞아죽은 사람의 내장을 먹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역사 책을 찾아봐도, 책에는 식인 글자가 가득 있다. 남자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소름이 (P14)”차며 이렇게 생각한다. “그들이 사람을 잡아먹을 있다면 나라고 잡아먹을 리가 없을 것이다(P14)”.

그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잡아 먹는 사람들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간다. 사람들은 그가 미쳤으며 의사를 봐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남자는 잇달아 새로운 진실 발견한다. 사람들은 사실은 사람을 잡아먹고 싶어하면서도 수법이 비겁하고 음흉하며 감추려고 하기 때문에 감히 덤벼들지 못하(P17)” 있다는 , 자기의 형도 자기를 먹으려고 하고 있다는 . 그리고 자기는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의 동생이며, 만약에 자신인 잡아먹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람을 잡아먹는 사람의 동생인 (P18)” 깨달은다. 

 

모두가 자기를 잡아먹고 싶어하고 있다는 남자의 확신은 나날이 커져간다. 남자는 묻는다.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 옳은 일인가?(P20)”.

그리고 사람들에게 외친다. “너희는 고칠 있어! 진심으로 마음을 고쳐먹으라구! 이제 멀지 낳아 사람을 잡아먹는 놈들은 세상에서 살아갈 없게 되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 “너희가 마음을 고치지 않으면 자기 자신도 결구 먹혀버리고 말거야. 설사 줄줄이 낳아서 늘어놓는다 해도 잔정한 인간들에게 멸망당하게 거야! 마치 사냥꾼이 늑대를 모조리 잡아죽이듯이벌레처럼 말이다!(P24-25)”.

 

남자는 사람들에게 계속해서 묻는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 알게 된다. “4 동안 내내 사람을 잡아먹어 , 거기서 나도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왔다는 . “4 동안 사람을 잡아먹는 이력을 가진 나는 애초에는 진정한 인간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몰랐지만 지금을 똑똑히 알고 있다!”. 그의 마음의 외침은 이렇게 끝난다. “사람을 잡아먹어 본적이 없는 아이들이 아직도 있을지? 아이들을 구해야지…..(P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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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을 먹는 세상


남자는
광인이라고 불렸다. 그러나 남자가 느끼고 있었던 , 그것은 정말로 이상한것이었을까? 그가 보고 있었던 세상은 우리가 보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미친 세계일까?

우리는 날마다 누군가가 살인 당한 이야기를 들며, 때로는 아주 무서운 뉴스에 접하기도 한다. 어디 뿐인가. 우리는 자기자신을 위해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한다. 사람이 사람을 습격하는 세상, 사람이 사람을 먹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다만 그런 것을 들어도 처음부터 보지 않기로 하거나 나에게는 상관이 없는 일로 치부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남자는 사실이 너무나도 마음에 걸린다. 그는 확신한다. 사실은 모두의 마음속에는 사람을 잡아먹고 싶은 생각이 가득 있음이 틀림없다고. 그리고 자기야말로 먹힐 거라고.

 그러나 그는 자신도 몰래 사람을 먹은 적이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자신도 4천년의 식인의 역사를 가지는 인간의 일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만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남자는 마지막에 아이들에게 미래를 걷는다. 우리는 무엇에 미래를 거는가. 나는 아직 이 답을 찾느라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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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루쉰2010. 8. 13. 01:03
 


 어느 여름, 셋째댁은 그녀의 아이들에게 보여주려고 토끼 한 쌍을 사는 것으로 루쉰의 소설 <토끼와 고양이>는 시작한다. 그 천진난만한 토끼를 보며 아이들은 무척 좋아한다. 호기심 많은 강아지 에스도 그 토끼를 보고 달려들다 재채기를 하고 물러선다. 아이들은 자주 토끼를 껴안고 놀았고, 에스도 토끼를 괴롭히려 하지 않았다. 얼마 후 그 토끼들이 땅을 파자, 모두들 토끼새끼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새로 태어난 토끼 두 마리는 어느 새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다. 그 후 어미토끼도 나타나지 않았다. 셋째 댁은 토끼 굴의 다른 통로에 고양이의 발톱자국이 있는 것을 보고, 새끼 토끼가 사라진 이유가 고양이의 소행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너무나 궁금한 나머지 그녀는 호미로 토끼 굴을 파기 시작한다. 그러자 원래 토끼 굴이 있었던 자리와 좀 떨어진 곳에서 어미토끼와 새끼토끼 일곱 마리가 자고 있었다. 필시 두 마리의 어린생명들이 희생당한 후, 어미토끼는 고양이를 피해 다른 굴로 옮겨가서 새끼를 낳았을 것이다. 셋째 댁은 이제 더 이상 그 어린 토끼들이 고양이에 희생되지 못하도록 지극 정성으로 보살핀다. 하지만 남들은 셋째댁을 보며 그토록 번거롭게 토끼를 기르는 법은 본 적이 없다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런데 이를 지켜본 소설 속 주인공은 갑자기 그 죽은 두 마리의 어린 생명들을 생각하면서 서글픈 마음이 든다. 그는 그 작은 존재의 허약함과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사라진 것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갖는다. 그 토끼들은 존재의 빛을 한번도 발하지도 못한 채 소리 없이 사라졌다. 그는 옛날의 일을 생각한다.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나 회관 앞의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에서 보게 된 가득히 흩어진 비둘기의 털, 그 비둘기는 누군가의 먹이가 되었을 것이다. 마차에 치어서 죽어가는 강아지. 그러나 얼마 후 그 죽음의 흔적조차 순식간에 사라져버린다. 그곳에서 한 생명이 끊어졌으리라는 것을 누가 알 것인가! 그는 그것을 보고 망연함과 허망함을 느꼈다. 생명을 가진 존재들이 그토록 쉽게 나고 사라져 버리는 허망한 모습에 슬퍼한다. 이에 조물주를 원망해보기도 한다. 조물주는 멋대로 생명을 만들기도 하며, 멋대로 짓밟아버리기도 한다면서.

 이 세상을 이렇게 만든 조물주에게 돌을 던져보지만, 자연의 실상은 원래 그러하기에 의미 없는 돌이라는 것을 안다. 셋째댁이 그토록 새끼 토끼를 정성스레 돌보는 것, 주인공이 소리 없이 사라져간 생명들에 대해 연민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과 같은 인간의 선의는 자연 속에서 무참히 짓밟힌다. 하지만 그는 그 무참히 짓밟힌 작은 생명을 기억하고, 그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 또한 그는 작은 존재들을 무심히 밟아버리는 강한 자들을 증오하며, 약한 존재들을 대신해 강한 자에게 복수해주고 싶어한다. 그는 자꾸 책상 속에 숨겨둔 청산가리 병을 떠올린다. 주인공이 얼마만큼 고양이를 증오했는지 잘 나타난다. 청산가리는 정말 강력한 독극물이다. 얼마나 고양이가 싫었으면, 청산가리를 떠올리겠는가! 그는 언제까지나 고양이가 담장 위를 당당하게 활보할 수는 없을 것이라며 확신한다. 이 확신에는 증오에 가득 찬 살기와 비장함이 서려있다. 고양이를 설사 죽이지는 못하더라도, 언제나 그 놈이 저리도 당당하게 살고 있는 꼴을 못보겠다는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증오인 것이다. 그도 다 안다. 그래봐야 약한 자를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는 강자는 여전히 많다고. 하지만 이건 그의 다짐 아닐까? 끝까지 한번 해보자는. 이 세상의 강한 것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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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History/루쉰2010. 8. 10. 14:07

납함에 있는 소설 속 주인공들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들었던 인물은 아큐이다. 다른 인물들과는 다르게 그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아큐는 이런 사람이구나 하다가도 갑자기 방향을 틀어 전혀 다른 행동이 나타난다. 혹은 아예 그의 생각을 읽어버릴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아큐는 자신의 부스럼을 놀리는 동네 건달들에게 몇 번 덤볐다가 항상 벽에 머리를 짓찧게 된다. 그래도 절대로 자신의 부스럼에 대한 놀림을 넘기지는 않는다. 아큐를 일반적인 바보나 맹추라고 생각한다면 그는 몇 번 호되게 당한이후로 놀림을 받아도 그저 속으로 분해할 뿐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맞는 것이 두려우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건달들에게 힘이 통하지 않자 매섭게 째려보기 시작한다. 정말이지 대단한 자존심이다. 이랬던 그가 얼마 안가서 건달들에게 머리채를 잡히자 자신은 벌레라며 빨리 놓으라고 한다. 그 대단한 자존심이라면 오히려 머리채가 뜯겨져 나가도 굴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네가 어떻게 나의 친척일 수가 있냐고 화를 내며 따귀를 때리는 짜오 나으리 앞에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것은 그가 당한 폭력의 수준 차이 때문인 것일까?


그러나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누구에게 맞는 것이 더 아프고, 덜 아프고를 떠나서 맞는 것 자체를 싫어할 텐데 아큐는 폭력을 자처하고 있다. 매에 맞기 전에 변명을 하기보다 매에 맞고 난 후 변명을 하는 것이 그다. 그리곤 후련해 한다. 한 대 맞은 것으로 일이 일단락되었으니 말이다. 보통 맞고 나면 더 반항심이나 울분이 생기는데 후련해 하다니. 자존심이 강한 아큐라면 오히려 가슴속에 남들보다 큰 앙갚음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 크기가 남들보다 큰지 작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나름의 울분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그는 이런 울분을 가끔 정신적 승리법으로 푼다. 자식이 애비를 때리는 거라는 생각도 하고 이 생각이 먹히지 않을 정도로 울분이 심한 날은 제 손으로 제 얼굴을 세게 몇 번 때린다. 맞은 것은 ‘나’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손으로 누군가를 때렸다는 것으로 분풀이를 하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그의 생각이나 기분을 읽어내려 했던 내 시도는 철저히 무너진다. 이런 정신적 승리법을 만들어 낸 그의 사고를 도저히 읽어낼 수가 없다. 짜오 나으리나 가짜 양반, 미장 사람들이 아큐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그를 마을의 하찮은 녀석, 어중이떠중이 정도로 생각하고 있고 평소에도 그의 존재를 크게 인식하고 있지 않다. 소설 속 그의 행적을 봤을 때 충분히 독특한 사람임에도 그를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큐정전>의 서문만 봐도 그렇다. 작가가 그에 대해 확신하고 있는 것은 ‘아’자 하나뿐, 아무런 정보도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기에 그는 너무나 복잡한 사람이다. 혁명당원의 목이 댕강 잘리는 것을 보고서도 ‘혁명이란 것도 괜찮구나’라고 생각하는 그의 사고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혁명을 하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이익들, 예를 들면 짜오 나으리네 가구나 재산들과 그동안 자신을 괴롭혔던 녀석들에 대한 복수가 그를 유쾌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 때문에 그가 혁명에 가담하고자 한 것은 아니다. 거인 나으리의 두려움, 미장 사람들의 두려운 눈빛이 그를 신명나게 했다. 마을의 존경받는 어르신조차도 두려워하는 혁명과 반란에 마을사람들도 덩달아 두려워 지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아큐는 혁명을 하다가 죽을 수도 있는데도 변발을 위로 올리고 ‘반란이다!’를 크게 외치고 다닌다. 그가 멍청하고 상황파악 능력이 모자라서 그랬을까? 아무리 그렇다하더라도 사람들의 두려운 눈빛이 그에게 주는 유쾌함은 설명하기가 쉽지 않다. 바보면 다 혁명하는 자인가.

                                                                                                                                   <왜 영구가 떠오르는 걸까...?>



아큐가 종잡을 수 없는 생각과 성격의 소유자이긴 하지만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하나있다. 그는 그 스스로가 너무 잘났다. 이는 그의 자존심이 세다는 말인 동시에 남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다는 소리이기도 하다. 게다가 들을 마음도 없어 보인다. 무인도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사람처럼 아큐는 그의 기분이나 감정, 이것들의 해소와 자신이 보고 듣는 모든 것에 대한 해석들을 스스로 해결한다. 위에서도 말하지 않았는가. 정신적 승리법이나 혁명에 대해 느끼는 신명 등. 그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그래도 그를 위해 충고를 해주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는 아큐에게 무게감 있게 살아가라고 충고해준다. 아큐의 반응은? 귓등으로 듣지도 않고 자신에게 충고를 해준 그 사람을 욕할 것이다. 아니면 귀를 한번 후비고는 멍한 표정으로 자리를 뜰 것이다. 아큐는 남의 말에 휘둘릴 사람이 아니다. 그는 돈이 없어 며칠을 굶고, 옷이나 집이 없어도 충분히 살아간다. 사는데 전혀 지장이 없다. 그는 그만큼 강하다. 여기서 강하다는 것은 의지가 굳거나 생활력이 강하다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어떤 표현을 써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삶에 단단히 붙어있다는 느낌이랄까. 이런 강함. 그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강함. 그만큼 그는 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일 테다. 여기서부터 아큐에 대한 이해, <아큐정전>에 대한 이해가 시작되지 않을까.


Posted by masou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