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 작업실2011. 2. 4. 20:50

인도에서 같이 투닥투닥하면서 살던 제 친구들입니다. 찬드라, 만주나트, 아룬, 파완 이에요. 나마스데


연극하는 백지

극단 백지도 별 시리 맘에 들지 않고, 백지 연극반도 썩 맘에 들지 않고,


이리저리 궁리해보던 중에 ‘연극하는 백지’가 떠올랐다! 오호!


그런데 누가 선수를 쳤는지 티스토리 들어와 보니 ‘공부하는 백지’라고 되어있네?


아마 은정언니겠지(우리 통했는가 보오). 공부하는 백지’, ‘연극하는 백지’ 우리 또 뭘 해볼까


즐거운 명절  보내고 계시는가?


나는 이래저래 즐거워하고 있다.


같이 살지 않으니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이야기들을 함께하지 못한다는 게 아쉽다. 소소한 일들이라...


오빠랑 싸우는 데 내가 바가지 긁는 수위가 좀 높아진 것(‘말빨’이 좀 늘었나..),


평창동에서 올라가는 북한산 형제봉이 참 좋다는 것,


12년차 집시 작가 곽세라가 쓴 에세이를 읽고 있다는 것. 등등


여전히 김광석 노래를 즐겨 듣고 있는데, 이젠 그 사람의 우울함에 묻히지 않을 만큼 면역이 생긴 것도 같다.

헤드폰을 쓰고 그의 노래를 힘차게, 크게 따라 부르고 있다. 숨 쉬는 템포 하나하나 살피면서.

가끔씩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김광석의 호소력 짙은 음성이 나오는데 그 부분들은 반복하면서 듣고 있다.

다음 주 토요일에 백지 모임 마치고 김광석 다시 부르기 공연을 갈 예정이다. 으히~

내일(2월5일 토요일) 경상북도 상주로 내려간다. 내려가서 하게 될 일이 아직 막연하기에 조금 더 자리 잡으면 알려 주겠스밍.

뭐, 나의 안부는 이 정도로 전하면 될까나.


그럼 ‘연극하는 백지’ 공지 올리기로 하지.


1.일단 모이는 시간과 장소.


시간은 다수결 원칙에 의해서 토요일 2pm으로 결정되었다.


장소는 빈 가게(좋더라), 홍대 C CLOUD(죠지형 직장! 축하) 등


-우리는 ‘유도리’를 선호한다.(유동성...)



2.‘연극하는 백지’에서 빠지는 사람들의 변


희사: 일단은 연극에 별로 흥미가 없다. 일본에 돌아가서 재일조선인 사람들과 모여서 집단치료를 하는 것이 목표.

        한국에 있는 6월 말까지 ‘정신분석’과 마음세미나에서 열심히 공부할 계획이다. 백지와 어떤 방식으로 만날 수 있을 지 모색 중.


은정: 여기까지! 설 연휴 지나고 전주로 내려간다. 전주에서 무엇을 하게 될지는 아직 미지수이나 무지 바쁠 것이란 건 짐작이 감.
 

        은정을 보려면 전주로!


그러하여 우리 멤버들은,

정아림, 오용택, 정윤미, 황지현, 백선은, 명혜원, 조지훈 총 7명.


3. 봄맞이 잔치(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이에게 시와 노래는 애달픈 양식)


4. ‘연극하는 백지’의 조항! 계약서?


-지각할 경우 두 손은 무겁게


=>3, 4는 잔잔한 윤미언니가 다음에 공지 좀 올려주시길! 이힝


5. 드디어 아큐정전 얘기.


-1막(우리가 올렸던 극)의 CYCLE을 잘 살려서 단편도 되고, 장편도 되는 연극을 하자.

-작업방식


전체 틀거리(시나리오)를 짜 놓고, 막을 나눠서 세세하게 파고들기(기승전결)


1막 정신승리법

1장

배경) 미장의 사당, 늦은 저녁. 인물)아큐, 왕털보, 소디, 칠근이

기: (일당으로 번 6만원 중 4만원을 잃으면서)지고 있던 아큐에게 삼팔광땡이 들어온다.

승: 판이 점점 커지고, 돈이 모자라는 왕털보가 소디에게 빌린 돈을 갚으라 한다.

전: 왕털보와 소디가 싸우다가 판이 파토나고(아큐가 삼팔광땡을 외친다), 아큐를 제외한

모두가 나가버려 아큐가 화를 낸다.

결: 아큐가 마음을 추스르고, 담요 옆에서 푼돈을 발견하고 술을 마시러 나간다.

2장

배경) 미장의 골목, 오후 2시 무렵. 인물) 아큐, 쓰밍, 꾸어똥

기: 쓰밍과 꾸어똥이 담배를 피우다가 아큐를 발견한다.

승: 아큐가 피해가려 하지만 걸려서 놀림을 당한다.

전: 아큐가 대들다가 얻어맞으면서, 스스로를 벌레라고 하자 몇 대 더 맞는다.

결: 아큐는 벌레처럼 기어간다.

3장

배경) 왕룽의 밭, 오후 4시 무렵. 인물) 아큐, 왕룽

기: 아큐가 밭을 갈고 있다.

승: 왕룽이 와서 이것저것 캐묻자 아큐가 짜증을 낸다.

전: 왕룽이 “일꾼이네”라는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진다.

결: 아큐가 코웃음을 치고 힘차게 일을 한다.


2막은
연애의 비극


1. 비구니를 희롱하자 보던 사람들이 신나해서 괜시리 뿌듯해하는 장면.


2. 우어멈 희롱하다가 짜오 나으리네서 쫓겨나는 장면.


3막은
생계 문제


1. 일을 구하러 다니던 중 라이벌 소디와 싸우는 장면.


2. 늙은 비구니 무밭에서 무 훔치다 걸리는 장면.


4막은
혁명


1. 술집에서 혁명당원 이야기하는 장면


2. 아큐가 신이 나서 혁명의 노래를 부르는 장면. (망한 짜오와 소디 쑥덕쑥덕)


5막은
최후


1. 아큐를 병사 둘이 늙은이 앞에 데려다 놓고 동그라미를 그리게 하는 장면.


2. 조리돌리는 장면.


- 초창기에 우리가 선정했던 장면들. 이 장면들을 구체적으로 세밀하게 섬세하게 세세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가 할 작업.



숙제! 홈워크!

1. 아큐정전 전체의 기승전결 짜기!


- 전체 이야기를 네 문장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아큐의 큰 터닝 포인트를 어디로 잡을 것인지가 문제이죠.


2. 2막
연애의비극 장면들 시놉시스 짜기!


- 행동코드, 진술서 쓰기.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다.’


3. 설 연휴에 블로그에 따듯한 안부인사 올리기^^


 

다음 미팅은


2월 12일 토요일 오후 2시 장소는 저번에 모였던 빈 가게입니다.


숙제 해서 오시구요, 혹시 늦는 사람 있걸랑 두 손은 무겁게~


그럼 남은 설연휴 잘 보내시고, 다들 각자의 상황, 위치에서 아큐정전을 흠뻑 느껴보고 옵시다.


크로마뇽(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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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
이야기2011. 2. 2. 22:40




아니 어쩌면 올해부턴 잔잔 혹은 짠짠이겠군요,으허.

어제 남산밑에 또 다시 짐을 풀었습니다.
짐풀고 혼자 심야남산산책길에 나섰어요. 어제부터 날이 딱 풀리고 좋더랍니다.
정말 오랜만에..다들 보고싶더군요잉. 갑자기 혼자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나면서,
이거 원..참, 눈물이 나서 혼자 김광석의 <나의 노래>를 우렁차게 불렀습니다.
(잊지말고들계셔요. 봄맞이파티!를 위한 시와 노래!)
하지만 혼자는 아니구요,
빈집에 장투(장기투숙)하게 됐어요. 놀러오셔요^^ 햇살좋은 집이에요.

빈마을 회의 때 첨 만나서 쑥쓰러운듯 수유리지hot방친구들이 지어준 별명얘기를 했는데
이제 여기분들은 모두 저를 "잔잔"이라고 불러요..(역시 뭔가 쑥쓰러워요)
어젠 한분이 제  노트북손봐주시면서 급 환영회를 하게 됐는데, 그러다 밤새놀고말았지요.
빈마을엔 다섯채의 집이 있는데 저는 아랫집에 살고.. 앞집으로 2차까지가서 결국 첫날부터 외박을 했어요.
다들 아시겠지만 뒷풀이하면서는 잔잔이 짠짜자자잔 "짠짠"이 되기도 합니다.히히

그리고
<청소년>과<흙>을 품고 있습니다, 라는 제 소개에 아랫집 옥상텃밭을 냉큼 맡겨주셔서
날풀리면서 점점 손이 바빠질것 같아요^^으히히.
2월이면 빈집 세돌이라는데, 여기분들이 3년간 사시면서 쌓은 멋지고 재밌는 살림비법들도 열심히 전수받으려구요!

 

5년뒤짱구의 모습이래요. 다들 떡국 먹었지요?
전 부천에서 떡국먹고 아림이네집에가서 희사와 저녁만찬(!)을 즐겼습니다.
그 담날엔 입춘을 맞아 주먹밥과 막걸리싸들고 북한산등산도!꺄

지금은 소래포구에 있는 사촌동생네집에 놀러왔어요.
자주전화해줘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_^10살짜리 저의 멘토에요. 



그리고 이것은 저번 모임에서 슬쩍 얘기했던 거에요.
수유리지핫방에서 끄적였던건데 ^^ 같이 더하고 빼서 해봅시다~

앗 그리고 선재언니결혼식초대장이 왔어요!
2월25일 금요일 저녁인데, 같이갑시당

그럼 담주토요일에 만나요^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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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잔잔
History/루쉰2011. 2. 2. 19:49



장례식으로 시작해서 장례식으로 끝나는 「고독자」. 화자(선페이)는 두 장례식에서 리엔수를 만난다. 살아있는 리엔수와 죽어있는 리엔수를. 그러나 그의 모습은 시종일관 고독해 보인다. 할머니의 장례식에서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던 모습과 여윈 얼굴로 가슴팍에 핏자국을 남기고 떠난 모습은 그가 여전히 고독했음을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 리엔수가 ‘나는 고독하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화자와 소설을 읽는 우리는 그가 지독하게 고독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냉담한 성격, 실의에 빠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 독신주의자, 검은 피부에 작고 마른 체격, 그리고 실패했다고 몇 번이나 울부짖고 있던 그의 서신. 이런 것들을 통해 우리는 그가 고독한 사람이란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그의 고독이 무엇에서 기인했고 그가 왜 거기서 고독을 느끼는지는 알지 못한다. 느낌상, 그가 풍기는 분위기상 그가 고독함을 알 뿐이다. ‘고독’이란 단어로 정의되는 리엔수.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더 알기 위해서는 그의 고독을 파고 들어가야 한다.





표면적 고독


소설은 리엔수 할머니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이질에 걸려 상태가 위급했던 할머니는 리엔수를 찾지만 그가 S시에서 한스산으로 오기 전에 돌아가시고 만다. 마을사람들은 그가 도착하기 전에 모여 회의를 한다. 신당(新黨)인 리엔수가 장례의식을 신식으로 바꾸려고 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회의 끝에 마을사람들은 그에게 옛 전통대로 장례를 치를 것을 요구하기로 한다. 모두들 엄청난 충돌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리엔수는 의외로 담담하게 그 조건을 수락한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대단한 솜씨로 수의를 입혀 마을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이 놀라움은 리엔수가 신당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그가 서양식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옛 도리를 무시하고 서구의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맞는 말이다. 그가 옛 도리를 무시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한스산에서 유일하게 외지로 유학을 나가 서양식 교육을 받은 사람이다. 이 이유만으로 의도치 않게 신당이라는 이름을 얻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추측해 보건데 그는 봉건사상을 떠나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위치에 있었다. 자신을 ‘불행한 청년’이나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하면서 그를 찾아오던 지식인 청년들, 글을 발표한 것 때문에 지방의 작은 신문에서 그를 공격한 익명의 인사들, 그리고 이로 인해 당한 해직. 리엔수는 당시 사회를 바꿔 보려했던 혁명가였던 것이다. 그것이 계몽운동과 관련된 것인지 계급과 관련된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혁명을 꿈꾸는 지식인이라고 하기에 이 청년은 너무나 무기력해 보인다. 매일 집에만 틀어박혀 있고 누군가를 방문하는 일도 없다. 그리고 사람을 냉담하게 대한다. 게다가 결혼도 하지 않아 그 처지가 더 쓸쓸해 보인다. 마치 수많은 좌절을 겪어 더 이상 낼 기운조차 없는 사람 같다.



그도 처음엔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밝은 청년이었을 것이다. 자유나 평화, 희망을 말하는 청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밝은 이상을 품고 뛰어든 세상은 그에게 좌절만을 안겨주었다. 중국에 신교육운동이 일어난 지 20년이 지났지만 자신의 고향에는 초등학교조차 없다. 마을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신당이라며 괴상한 눈을 하고 쳐다본다. 집 주인네 할머니는 결혼을 하라고 성화다. 지식인이라고 하는 자들은 서로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결국 세상은 변하지 않았고 이상은 그저 이상일 뿐이었다. 삶을 살아갈수록 늘어나는 것은 실망과 좌절뿐이다. 그래서 마을 어르신들이 장례를 전통의식에 따라 치르라고 요구했을 때에도 그저 ‘다 좋습니다’라고 체념한 듯이 말한 것이 아닐까. 그가 거기서 옛 전통을 따르지 못하겠다고 주장해도 그것이 받아들여지기는커녕 싸움을 일으키거나 마을을 소란스럽게 할 뿐이다. 봉건사상이나 봉건예교를 배척해야한다는 주장은 이 마을 사람들에게 먹히지 않을뿐더러 화를 돋우는 말이다. 리엔수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어르신들의 요구대로 하고 그것도 대단한 솜씨로 하는 것이 모두에게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이미 많은 좌절을 겪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의 내면



현실과 이상의 괴리. 거기서 오는 슬픔과 고독. 리엔수의 고독을 이렇게 단순하게 정리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의 내면은 그리 간단하지가 않다. 인생에서 좌절과 실망이 계속된다면 사람은 자신의 주위에 방어벽을 치고 세상과 단절하려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방어벽 안에서 나오지 않으려 한다. 그렇게 계속 홀로 외로이 존재하고자 한다. 더 이상 상처를 받고 싶지 않기 때문에. 이런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벽 안 쪽으로 자신을 숨기는 것은 이기적인 행동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보신주의. 밖으로 괜히 나갔다가 넘어지고 다칠까봐 아예 나가지 않는 것이다. 겁쟁이라 불러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만큼 자신을 소중히 여기니까. 세상은 이미 글러먹었다. 내가 나서서 뭘 해 본다 한들 변하지 않는다. 구제불능. 그래서 이렇게 방어벽을 치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잘못 생각한 거요. 모두 결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스스로 누에집을 만들어 자신을 그 속에 가두어 놓고 있소. 세상을 좀 밝게 볼 필요가 있어요.”



언뜻 리앤수에게 적절한 충고 같아 보인다. 그는 깜깜한 누에집 속에서 고독을 즐기는 사람이니 말이다.



“그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누에집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



이건 무슨 의미일까? 내가 담을 쌓기는 했지만 내 의지는 아니었다? 아니면 누에집을 만들기는 했지만 난 그놈의 고독을 전혀 즐기고 있지 않다?



그는 이 말 뒤에 자신의 할머니 이야기를 꺼낸다. 집에서 하루 종일 창밑에 앉아 천천히 바느질을 하던 할머니. 그리고 평생을 말없이 그렇게 살아온 할머니. 리앤수는 할머니의 일생을 이렇게 평한다. ‘스스로 고독을 만들어서 그것을 씹어 삼켜 온 사람의 일생’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니 자연 슬퍼져서 장례식 때 통곡을 하고 말았다. 할머니가 느꼈을 고독과 세상엔 이런 사람들이 많을 것이란 생각에 그는 눈물을 흘렸다. 그는 타인의 고독을 읽어낼 줄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누에집 속에서 오로지 자신의 내면만을 바라보고 고독해하는 사람과는 다르게 남의 고독도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것은 곧 그가 고독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람은 자신의 속에 있는 것만큼을 남에게서 발견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의 내면에는 고독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만큼의 고독을 남들에게서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리앤수는 사람을 냉담하게 대하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집에는 손님들이 드나들었다. 그 대부분은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항상 실의에만 빠져있으란 법은 없어 그에게는 오래 사귄 벗이 없었다. 그에게는 몇 주 찾아오다가 연락이 뜸해지고, 그러다 또 몇 주 찾아오고 사라지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한동안 나에게 찾아와 이런저런 고민을 털어놓고 술로써 그 고통을 함께 잊던 친구가 날 더 이상 찾지 않을 때의 처절함과 쓸쓸함을 그는 잘 알았으리라. 그런데도 그는 손님들을 맞아 주었다. 분명 이 사람도 몇 주 후엔 더 이상 자신을 찾아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이 사람이 떠난 뒤 자신에게 남겨질 쓸쓸함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는 자신만큼 남들의 고독을 잘 이해하고 헤아려주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자신의 고독을 뒤로하고 남의 고독을 들어줄 수가 있었겠는가.



그는 고독이 주는 쓰라림을 잘 알고 있기에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막을 수 없었다. 그 고통을 알기 때문에 그들과 마주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뒤, 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도 그는 아무런 원망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들이 자신을 찾아오지 않는 것은 자신이 해고를 당해 심경이 편치 않아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자신을 ‘겨울 공원’에 비유하며 ‘겨울 공원에 가는 사람은 없잖소?’라고 말한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는 해고를 당하기 전이나 후나 늘 겨울공원이었다. 음울한 건 마찬가지고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돈이 없어 영양상태가 좋지 못한 것과 가재도구가 줄어든 것이다. 천진난만 했던 아이가 나쁘게 된 것은 환경 탓이라고 말하며 자신을 겨울 공원이라고 말하는 사람. 리앤수는 근본적으로 사람을 미워하지 못하는 사람임이 느껴진다. 그래서 화자가 ‘당신은 인간을 너무 나쁘게만 보는 것 같은데’라고 말했을 때 차갑게 웃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그 누에집은 어디서 오는 겁니까’라는 말의 의미는 이런 것이 아닐까. 누에집들은 그 생김새가 다 다르듯이 고독도 그 모양새가 다 다르다. ‘고독’이라는 단어 속에는 전 인류만큼이나 다양한 고독들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리엔수의 고독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고독은 이런 모양을 하고 있다. 거센 바람이나 파도에 온 몸이 상처를 입어도 다른 돌들을 그로부터 보호하고자 하는 큰 바위. 그의 고독은 찢겨진 상처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보호하고 있는 돌들에게 있는 듯 없는 듯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기도 하다.



“아, 사람이 죽은 뒤에 한 사람도 그를 위해 울어 주는 이가 없도록 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야.”



리앤수는 타인의 고독을 받아주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무도 자신을 위해 울지 않게 하려고 한다. 누군가가 죽어 그를 위해 운다는 것은 상실의 아픔이 있다는 것이다. 리앤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아픔조차 남기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결혼도 하지 않은 것 같다. 자신의 죽음에 가장 슬퍼할 가족을 만들고 싶지 않아서. 그는 마치 세상에서 자신의 모든 흔적을 지우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도 결벽증적으로. 마지막까지 모든 고독의 짐을 자신이 짊어지려한다.






그의 삶



리앤수는 성공했다. 그의 장례식에서 그를 위해 울어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형식적인 곡소리만 있을 뿐이었다. 그가 좀 더 살기를 바라던 한 사람도 이미 죽고 없었다. 그는 그의 소원을 이뤘다. 아무에게도 상처를 남기지 않고 떠난 것이다. 마치 성인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모진 환경 속에서 자신이 상처를 입어도 두 팔로 남을 감싸 안은 모습. 그리고 그 와중에도 아무런 존재감 없이 조용히 있다 가는 모습. 십자가를 짊어지고 골고다 언덕(맞나?)으로 향하는 예수님만큼이나 아름다운 모습이다. 희생과 박애의 정신! 그러나 그는 인간이다.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신이 되려 했다. 희생과 박애는 허울 좋은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존재를 잊었다.



리앤수가 가난에서 벗어나 뚜 사단장의 고문이 되어 운이 트이게 되고 난 후 화자에게 서신을 보낸다. 이 마지막 서신에서조차 그는 끝까지 멋있으려한다.



“인생의 변화는 너무도 빠르오! 지난 반년 동안 난 거의 거지나 다름없었소. 아니, 실제로 이미 구걸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소. 그러나 나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소. 나는 그것을 위해 구걸을 하고, 그것을 위해 추위에 떨고 굶주렸으며, 그것을 위해 고독하게 살았고, 그것을 위해 고통을 받았소. 하지만 멸망만은 원하지 않소. 보시오, 내가 좀더 살기를 원하는 한 사람의 힘은 이렇게 컸소. 그런데 지금은 없소. 이 한 사람마저도 없어졌소. 동시에 나 자신도 살아갈 자격이 없다고 느꼈소. 다른 사람은? 역시 자격이 없소. 동시에 난 또 내가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기어코 살아가야 하겠다고 생각하오. 다행히 내가 잘 살아가기를 바라던 사람은 이미 사라졌으니까 그 누구도 마음 아파하지는 않을 것이오. 나는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는 않소.”




언뜻 보면 굉장히 멋있어 보인다. 자신의 굳건한 신념을 지키며 그 신념대로 살아가려고 하는 모습. 그리고 그가 좀더 살기를 원하던 한 친구가 그에게 엄청난 힘이 되었다는 것도 느껴진다. 그 친구는 아마 리앤수와 비슷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친구가 리앤수란 사람을 알아 볼 수 있었을 것이며 그에게 많은 힘이 되었을 것이다. 친구를 잃고 절망하며 울부짖는 리앤수를 보건데 그 친구는 리앤수의 내면을 이해하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의 힘은 얼마나 컸던지 리앤수는 구걸도 추위도 고통도 고독도 견뎌냈다. 그러나 그 친구가 죽자 살아갈 의지를 잃었다. 자신은 살아갈 자격이 없지만 그 친구를 죽인 놈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살아가기를 바라지 않는 놈들을 위해서라도 살아가려 한다. 뭔가 이상하다. 희생과 박애의 리앤수가 갑자기 복수의 화신이 되어버린 느낌이다. 앞에서 살펴본 내면대로라면 이 순간에 리앤수가 취해야 할 행동은 자살이 더 옳아 보인다. 그런데도 살아가려 한다니.



그가 서신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그의 삶은 항상 누군가를 위한 삶이었다. 자신을 믿어준 친구를 위해 살아가던 삶, 그 친구가 죽고 나서는 그의 적들을 위해 사는 삶, 자신을 찾아오는 실의에 빠진 청년들을 위한 삶. 리앤수는 남들을 위해 자신이 살아왔지 자신을 위해 인생을 살아오지는 않은 것이다. 고독, 희생과 박애, 복수라는 것들도 다 그의 이런 태도 때문에 생겨난 말들이다. 이 단어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전제로 생겨날 수 있는 단어들이다. 그는 자신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생각해 왔고 그렇게 만들어 온 것이다. 그는 분명 타인을 위한 삶을 살아왔지만 정작 본인은 그것을 알지 못한다.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본인이 말했듯이 멸망만은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이미 멸망했다. 그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살아갈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는 멸망했다. 이 세상을 자기가 스스로 자신의 발로 서서 살아가는 것에는 많은 책임감이 따른다. 리앤수는 이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에게는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감이 무겁게만 느껴졌고 무의식적으로 피하려 했다. 그리고 이에 대한 핑계거리로 고독과 희생정신이 태어난 것이다. 이것이 삶의 본위가 되었을 때의 모습은 마치 고귀한 신의 모습을 띄게 된다.



리앤수는 서신에서 ‘실패했소’라고 반복적으로 말하고 있다. 간간이 ‘승리했소’라고 말하기도 한다. 자신이 자신의 삶을 평가하고 논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모든 생을 마감하는 사람처럼. 그리고 화자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우리들이 결국 같은 길을 걷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오. 그렇다면 제발 나를 잊어 주기 바라오. 당신이 일전에 나의 생계를 걱정해 준 것에 대해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소. 그러나 이제 나의 일을 잊어 주시오. 나는 이미 좋아졌으니 말이오.”



자신이 누군가의 기억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까? 리앤수는 이 구절을 쓰면서 마음속으로 얼마나 울었을까. 차가운 말투로 자신을 잊으라고 말하지만 속으로 징징 짜면서 정말 외롭다고 울부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서 끝까지 쿨한 척 하고 있다.



자신을 고귀한 위치로 끌어올려 스스로의 생을 논하고 인간관계를 정리하는 리앤수의 모습은 솔직히 오만해 보인다. 그는 나에게 이렇게 변명할지도 모른다. 나는 정말 고독했고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에 그들이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이런 내가 뭐가 오만하냐고. 그가 고독한 것도 상처를 입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그 고독에 휩싸여 누에집만한 세계에 갇혀 살아갈 뿐이었다. 울고 싶고 친구와 밤새도록 이야기하고 싶고 때론 즐겁게 살고 싶은데 삶이라는 것을 너무 진지하게 생각한 나머지 고독이란 단어에 갇혀 살아온 것이다.



이 세상에 그토록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았던 그는 이를 남들에게 상처를 주기 싫어서라고 말하지만 사실 자신이 자신의 존재를 그토록 싫어했던 것은 아닐까.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감도 없고 애착도 없기 때문에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고독과 희생이란 말로 포장했다. 자신의 삶을 살아보지도 않은 사람이 실패했다느니 승리했다느니, 나를 잊으라니 라고 말하는 것은 오만하다. 이 세상에 아무도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없을 거란 생각이나 나만 왜 이런 고통을 다 당하고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다면 당신은 삶을 너무 우습게 보고 있다.
 



(* 사진은 영화 '더 로드' 캡쳐 장면입니다. 소설 '고독자'와는 내용도 다르고 상황도 다르지만 캡쳐를 하면서 왠지 부끄러워지네요. 나는 리엔수를 정말로 이해하기 싫었구나란 생각이 자꾸 들어서요. 반면에 영화 속 주인공에게선 그의 슬픔을 느끼고 말이죠. 시시각각 변하는 저의 마음이 무섭네요.)


Posted by masoume
이야기2011. 2. 2. 19:28

블로그 타이틀 화면을 바꿔봤습니다.
더불어 배경색과 메인 구조두요.
그리고 이전에 필진이였던 여러분 모두는 운영자로 등업(?) 되었습니다.
이 말인즉슨, 이 블로그 관리에 대한 모든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는 것!
'블로그명이 그게 뭐에요 맘에 안들어요!'
'구조가 왜 이따구에요?!!'
'사진이 이상해요!'
등등등..........................불만이 생기시면 직접 처리하시길. 후후훗
돌아가면서 타이틀 바꾸는 것도 재미있겠네요.

신묘년 첫 리뉴얼 타자는 저였습니다.
내일이 음력 1월 1일, 진짜 새해입니다.
다들 올해에도 많은 공부 하시길. 
넘어지고 상처가 나더라도 말이죠. ^-^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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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masoume
History/루쉰2011. 2. 1. 13:46

               

 





-루쉰은 왜 암흑을 바라보았는가-

 









 

         들어가며

 루쉰은 종종 자신을 암흑을 쓰는 작가라고 했다. 그는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을까. 나는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항상 마음에 묘한 응어리가 남곤 했다. 물론 읽으면서 감동할 때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산뜻하거나 상쾌한 것이 아니었으며, 알 수 없는 더러움같은 것이 마음의 한 구석에 남아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그 응어리를 루쉰이라면 암흑이라 불렀을 것이다.

 문장의 곳곳에 나타나는 그의 암흑은 나를 싫증나게 하기도 했지만, 또한 흥미를 끌기도 했다. 그 때마다 나는 루쉰은 성격이 나빴을까?’라든지, ‘왜 이런 것을 쓸 필요가 있나?’라든지 머리를 굴리곤 했다. 그의 암흑은 왠지 나를 끌다. 살짝 열린 커튼에서 안을 들여다보듯이, 나는 그의 열린 상처에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루쉰의 암흑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루쉰의 암흑이란 무엇인가.

1)    혼을 부르는 것보다는, 자기가 자기를 부르면 된다. 불러도 누가 아는가, 무덤의 진호는 자기가 되라.

2)      돌이 부르고 있는 돌의 스님, 자기가 자기를 부르면 된다. 빨리 집으로 돌아갑시다. 무덤의 진호는 질색이에요.

3)      제멋대로 만드는 중산능, ()에게 상관이 있을 것인가. 혼을 불러도 가지를 않네, 제멋대로 자기가 가면 된다. (하략)

 이상 , 어느 수를 들어 보아도 불과 20, 그런데도 거기에는 혁명정부와의 관계, 혁명가에게 행해진 감정 시민의 견해가 남김없이 서술되어 있다. (중략) 남이 것을 읽고 느끼는 것이지만, 지금이 동트기 어두움이라고 끝까지 믿고 싶은 같다. 그러나 시민이 이러한 시민이라면 새벽이건 저녁때이건 혁명자들은 일군의 시민을 짊어지고 전진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술가>

 

글은 루쉰의 여러 잡감을 실린 三閑集에서부터 발췌한 것이다. 루쉰은 종종 이런식으로 시민쪽의 암혹을 써대면서 혁명세력들을 비판했다. 당시 루쉰이 많은 혁명문학자들에게 심하게 욕을 먹었던 것도 그가 꺼침없이 암흑을 폭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암흑이란 무엇이었을까? 루쉰의 글을 읽고 있으면, 암흑이란 그가 실제로 본 내용을 글로 표현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지 않고 넘어가려고 하는 부분, 안 본 척하면서 피해가려는 부분을 아주 날카롭게 부각시키는 것이 그의 암흑이 아니었을까.

 머리 속에서 그린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본 것을 글로 표현하기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아니, 실제로 본 바를 인정하거나 인식하는 것이 어렵다고 해야 할까. 우리는 자꾸 자신의 키워드에 맞춰서 세상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과 어긋나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하거나 아니면 애초부터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인정하고 싶지 않는 현실, 그것을 폭로하기 때문에 그의 글은 우리에게 응어리를 남기고 우리가 자기 스스로를 질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나는 재일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할 때, 머리속에 일종의 재일의 상을 그린다는 것을 요즘에 알게 되었다. 그 상은 내가 마음대로 만들어낸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상과 어긋나는 재일을 아예 부정하려고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만을 갖고서는 절대 현실적으로 뭔가를 실현시킬 수 없다. 이하는 당시의 그런 혁명분학자들을 비판한 루쉰의 글이다.

 

요즈음의 혁명문학가는 극단적으로 암흑을 두려워하여 암흑을 덮어두려 하지만 시민은 대담, 솔직하게 그것을 폭로한다. 한편의 약아빠짐이 딴편의 둔중한 무관심에 부딪친 결과, 혁명문학자는 사회 현상을 도저히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서, 마치 까치는 기뻐하지만 올빼미는 싫어하는 노파처럼 미신이 깊어지고 사소한 길조를 발견하여 자기 도취하고 그것으로 시대를 초월한 셈이 된다.

축하하오, 영웅 여러분! 그대는 전진하시라. 내버려진 참된 현대는 뒤에서 그대의 진군을 바라볼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는 공존하는 채이다. 그대가 눈을 감고 있을 뿐이다. 눈을 감기만 하면 무덤의 진호 보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의 최후의 승리이다.

<주술가>

 

그런대 그가 그려내는 이런 암흑은 가끔 전염될 때가 있다. 그 자신도 암흑을 널리 알리는 것에 우려한 적이 있는 것처럼, 나는 그의 문장을 보면 종종 낙심해버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2ne곰에서도 몇번 썼듯이, 나는 일본에 있었을 때 재일의 해방이나 사회의 변혁을 원하고 있었다. 아니, 그것을 원하고 있었다기보다는 지금 상황에 대한 불만, 부당함을 느끼고 있었다고 하는 편이 나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당시 나는 자기자신의 힘으로 뭔가를 하려고 결심한 것이 아니라, 불만을 쌓고 있기만 했기 때문이다. 나는 주변에 있는 활동가들의 말에 감동하고 집회나 시위에 참석하면서 사회의 부당함을 외쳤다. 그러한 나의 열의’, ‘정의감 루쉰은 (?)하고 돌을 던져 버린다.

 

  만약 혁명의 실제 상태를 모르고 있으면 경우에도 역시 간단히 우익으로 변합니다. 혁명은 괴로운 것이며, 아무래도 더러움이나 피를 머금지 않을 없고, 시인이 상상하는 같은 재미있는 혹은 아름다운 것은 아닙니다. 혁명이라는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으로서 여러 모로 고상하지 않은 성가신 작업이 필요합니다. 시인이 상상하는 같은 로맨틱한 것이 아닙니다. 물론 혁명엔 파괴가 따르지만 이상으로 건설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파괴는 통쾌하지만 건설은 성가신 작업입니다. 그러므로 혁명에 대하여 로맨틱한 환상을 품고 있는 사람은 막상 혁명에 접근하여 혁명이 진행되기 시작하면 금세 실망하기 쉽습니다.

<좌익 작가연맹에 대한 의견>

 

사람은 종종 상황이 한꺼번에 바뀌는 것을, 현재 상태가 혁명되어 좋아지는 것을 바란다. 그러면서 외친다. “혁명을! 자유를!” 그러나 루쉰은 거기에 칼을 댄다(?). 당신은 혁명을 하고 싶은지, 혁명하는 것에 책임을 있는지 말이다. (그는 특히 당시 지식인들에게 신랄한 비판을 하고 있었다.) 나도 글을 읽으면서 질문할 밖에 없었다. ‘혁명이라는 말에 내가 품고 있는 이미지란 무엇인가? 나는 파괴가 아니라 건설에 대해 세밀하게 생각해 적이 있는가? 라고.

 

이를테면 어떤 사람은 구사회를 증오합니다. 그러나 증오할 뿐미녀 장래에 대한 이상은 지니고 있질 않습니다. 열심히 사회 개조를 외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럼 어떤 사회로 개조하고 싶으냐고 물어 보아도 대답은 실현 불가능한 유터피아일밖에 없습니다. 혹은 생활이 몹시 무료하다 못해 무언가 자극물이 필요해져서 대변화를 공상하는 사람도 있읍니다. 따위는 실컷 마시고 먹고 입가심으로 고추를 먹고 십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내려가면, 본디부터 낡은 타입의 인간이면서도 사회적 실패를 만회하려고 새로운 간판을 내걸고 신흥 세력을 이용하여 유리한 위치를 노리는 자도 있읍니다.

<오늘날의 신문학 개관>

 



 

       루쉰은 왜 암흑을 그렸는가

그런데 루쉰은 굳이 암흑을 폭로했는가? 그것은 그가 혁명에 대해서 비판적이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그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으로도 있다.

 

그렇지만, 암흑이기 때문에, 출구가 없기 때문에 혁명이 일어나는 아닌가. 만약 자기 앞에 광명 출구 보증서가 놓여 있지 않으면 혁명에 참가하지 못하겠다면, 이것은 혁명가가 아닐 뿐만 아니라 기회주의자마저도 되지 못한다.

<掃共大観>

 

 이것을 보니 루쉰은 거꾸로 이런 암흑을 직시함으로서 근번적인 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인상을 받는다. 한번 혁명해서 통치자가 바뀌었다 한들 시민의 생활에 변화가 없는, 그런 일상과 동떨어진 것이 아닌 혁명. 암흑자체를 치유하려는 혁명을 말이다.

지금까지 말해 왔듯이, 나는 한국에 오기전에는 일본에서의 재일의 상황에 분노를 느끼고 그것에 대해 싸워야겠다는 생각으로 가득 있었다. 그런 나에게 가장 울린 루쉰의 글은 <華蓋集> 나오는 <생각나는대로 11-3 “동포여,동포여!”>였다. 그는 동포들에게 사회개혁을 외치는 청년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학생들은 연설을 흔히 동포여, 동포여!....”라고 외친다. 그러나 제군은 그것이 어떤 동포이며 동포들이 어떤 마음을 갖고 있는지를 아는가?

 알지못할 것이다. 나의 마음까지도 내가 말을 하기 전에는 아마도 모금하러 사람이 몰랐을 것이다. 

 

그는 학생들이 실제 동포들에게 너무 무지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것때문에 아마도 실패할 그들의 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한다.

 

중국을 좋게 하기 위해서는 밖에도 해야 일이 있다.                                 

이번의 북경에서의 연설회나 모금운동 결과 학생들에게는 여러 사회 층의 사람들과 접척할 기회가 많이 있었다. 여러가지 일에 주의를 기울인 사람들 가운데서 누구라도 좋으니까 자기가 , 받아들인 , 느낀 것을 쓰는 사람이 나오기를 나는 바란다. 좋은 , 나쁜 , 감탄할 , 사나운 , 수치스러운 , 슬픈 아무것이나 모두 발표하여 도대체 우리에게는 어떤 동포 있는가를 모두에게 알리기 바란다.

그것들을 알고 다음에야 밖의 해야 일의 계획을 세울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분식을 하지 않아야 한다. 가령 동포 따위는 있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처음부터 창조를 다시 하면 된다. 암흑 이외에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암흑과 싸우면 된다.

 

 , 루쉰은 학생들에게 관념적 동포상을 증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만나고 동포들에게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귄유했던 것이다. 폭로된 동포의 상은 청년들의 머리 속에 있는 기대와는 다른 것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선동해야 하는 동포들이란 타인의 시체를 보면서 기뻐하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掃共大観>참고). 그러나 그러한 암흑 혁명을 없다는 . 루쉰은 명백하게 폭로된 현실이 자신이 인식한 바와는 어긋나 있어도, 암흑과 싸울 있는지를 사람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것인가

인간에게는 생활속에서 부딪치는 눈을 가리고 싶을 정도의 찌질한 면이 존재한다. 그것은 인간을 찬가하는 아름다운 시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는 것이고, 지금까지 많은 운동속에서 무시를 당해 것들이다 (나의 경험은 적지만 지금까지 보아온 운동에는  암흑을 반영한 구호나 목표를 거의 보지 못했다.) “암흑 사람을 편하게 주는 것이 아니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희망과 혁명에 불타 있었던 마음을 식혀 버리고, 삶에 대한 권태감, 포기하는 마음을 불러 이르킨다. 그렇지만 루쉰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직 실제로 뭔가를 적도 없는데 자기가 몇문장의 글을 읽고 포기하고 만다니 의지야 얼마나 나약한가!라고.

 나는 재일의 문제에 대해서 아직 제대로 부딪쳐 적이 없다. 그리고 옛날에 믿고 있었던 재일은 어떤 면에서는 결국 일본사회에서부터 똑같은 억압을 받고 있고, 그것을 위해 단결할 있다는 , 그리고 억압 받는 사람들이 만나고 연대하는 희망을 갖고 있다. 결과는 아마도 자신이 실제로 실행해 봐야만이 있을 것이다. 일본에 돌아가서 뭔가를 시도해 봐도 그것이 성공할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좋은 점과 나쁜 , 되는 것과 실망스러운 면이 있을 것이다. 전혀 돼서 실패하고 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것을 재일을 만나서 직접 던져보고, 사람들속에서 생각을 키워가지 않으면 결국 재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없을 같다. 그것은 자신의 삶속에서 배우는 것이기에.

루쉰의 암흑을 대하는 자세는 혁명이나 운동뿐만 아니라 또한 자기자신을 대하는 태도에도 적용시킬 수 있을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자신을 만나는 것을 무서워한다. 자신의 암흑을 아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자신의 암흑을 알게 되면 예전처럼 자기에 대해 희망을 계속 가질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를 바뀌고 싶다고 생각할 때는 자신의 암흑이야 말로 알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밝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볼 수 있지만 어두움은 잘 들여다보아야만이 볼 수 있듯이 말이다. 루쉰에게 귀를 기울여 보자.

 

생각컨대, 희망이란 본시 있는 것이라 수도 없고, 없는 것이라 수도 없다. 그것은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시 위에는 길이 없다. 걷는 사람이 많으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고향>

 

그는 사람들 앞에 암흑을 폭로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걸음을 끊지는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걸어가는 것을 통해 사람들의 희망이 되려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에게 성실해지려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결국 암흑과 마주 대할 있는 것은 의지인 것같다. 지금까지 것을 끝내고, 뭔가를 새로 시작해 그것을 건설하고, 더욱 좋은 것을 만들어가는 작업은 쉬운 일이 아니다. 스스로도 일본의 상황, 재일의 처지를 슬퍼하기만 했지, 그것에 대해 자신이 있는 제대로 모색하지 않았다. “파괴는 통쾌하지만 건설은 성가신 작업이다. 그것은 나의 정춘의 타는 마음만으로는 실현시키지 못하는 것일거라고 생각한다. 나의 마음도 실제로 재일조선인들과 만나면서 파괴되고 실망을 느낄 것이다. 그것에 이겨낼 있는 것은 결국 자신의 생각을 현실속에서 어떤 형태로 만드려고 하는 의지, 이렇게 살고 싶다는 의지밖에 없을 같다. 천천히라도 인간의 암흑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자신의 암흑에 어떻게 마주보는가를 삶의 과제의 하나로 삼고 싶다.

 

 


Posted by 알 수 없는 사용자